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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8 (토)

'저학력' 재소자들, 토론서 케임브리지대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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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꾸려진 뉴욕 교도소팀

'모든 국가, 핵무기 가질 권리 있나' 英 최고 명문 대학팀과 3대3 토론

지난 19일(현지 시각) 캐츠킬산맥에 둘러싸인 뉴욕 나파넉의 '동부 뉴욕 교도소'에선 '모든 국가는 핵무기를 가질 권리가 있다'는 주제를 놓고 두 팀이 3대3으로 찬반 토론 대결을 벌였다. 한쪽은 이 교도소 죄수들로 구성된 '재소자팀'이고, 다른 쪽은 200년 역사가 넘은 영국 케임브리지대 토론팀 '케임브리지 유니언' 소속 대학생들이었다.

조선일보

2014년 동부 뉴욕 교도소 재소자로 구성된 토론팀 학생들이 버몬트대와의 토론 경기를 준비하고 있다. 이들은 최근 영국 케임브리지대와 벌인 토론에서 승리했다. /PBS 다큐멘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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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소자팀 중 고졸 학력을 가진 이는 레지 채트먼(39)이 유일했다. 18세 생일을 몇 개월 앞두고 2급 살인죄로 25년형을 선고받고 감옥에서 고교 과정을 마쳤다. 반면 1815년 설립된 케임브리지 유니언은 마거릿 대처 전 총리,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 달라이 라마 등 쟁쟁한 인물을 토론자로 초빙하기도 한 세계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된 대학 토론팀이다. 워싱턴포스트(WP)는 지난 20일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라며 두 팀 간 토론 대결을 소개했다. 토론의 논제는 '모든 국가는 핵무기를 가질 권리가 있다'는 것. 재소자팀이 찬성, 케임브리지팀은 반대 입장을 개진하며 대결을 벌였다. 승패가 뻔할 것 같았던 대결이었지만, 놀랍게도 승리를 거머쥔 쪽은 재소자팀이었다.

재소자팀은 열악한 상황에서 토론을 준비했다. 감옥에선 인터넷이 금지되기 때문에 자료 검색은 교도소 안의 빈약한 도서관에 의존했다. 책이 부족해 교도소 측에 주문 요청을 넣으면 도착까지 몇 주씩 걸렸다. 토론을 도와주는 외부 강사에게 필요한 자료를 복사해서 반입해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케임브리지팀은 "핵무기가 불량 국가에 넘어갈 경우 엄청난 재앙을 가져올 수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에 대한 해법으로 '모든 핵무기 폐기(nuclear zero)'를 제시했다. 재소자팀 채트먼은 최종 변론에서 "모든 핵무기 폐기라는 것은 현실화가 어렵다"고 반박하며 "핵을 가진 몇몇 엘리트 국가가 타국에 핵을 금지하는 것은 제국주의와 글로벌 불평등을 양산할 우려가 있다"고 주장했다. 심사위원단은 핵 폐기의 구체적 방법론을 제시하지 못한 케임브리지대 대신 명확한 논점을 유지한 재소자팀의 승리를 선언했다.

동부 뉴욕 교도소 재소자 토론팀이 꾸려진 것은 2013년이다. 2001년 뉴욕 바드대학교와 연계해 교육 프로그램 일환으로 만들어졌다. 이 토론팀은 2014년 미 육군사관학교 토론팀을 초빙했다. 별 기대 없이 동기부여를 위해 연 이 토론 대회에서 뜻밖에도 재소자팀이 승리했다. 2015년엔 하버드대 토론팀까지 이겼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열악한 환경과 짧은 가방끈에도 불구하고 재소자들이 이 같은 실적을 거둔 요인으로 학생들에겐 부족한 사회 경험을 꼽았다. 워싱턴포스트는 "온라인 검색만 하면 바로바로 답을 찾을 수 있는 시대에 재소자들은 환경적 제약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나의 주제를 깊이, 오랫동안 생각하고, 거기에 집중한 것이 역설적으로 승리한 비결"이라고 분석했다.



[뉴욕=오윤희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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