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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일)

"슬픔도 원망도…모두 신의 무지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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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사진 제공 = 창작과비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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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생각해도 슬픔은 명사가 아닌 것 같다. 동사다. 슬픔은 자체로 존재하지 못하고 행위로만 관찰된다. 슬픔은 구체성이 없어서 오직 슬퍼하는 인간만 남게 되는데, 슬퍼하는 표정을 자세히 들여다보다가 생의 잠언으로 바꿔버리는 한 소설가가 있다. 아마도 이 방면에서 저토록 경이로운 '슬픔의 마에스트로'는 없을 것이다.

소설가 권여선(54)의 '레몬'(창작과비평사 펴냄)이 출간됐다. 이효석문학상 대상 후보작이었고 남산예술센터에서 연극으로 육화됐던 중편 '당신이 알지 못하나이다'를 개작한 장편이다. 줄거리는 이렇다. 월드컵으로 환호하고 열광하던 2002년 고교생 해언이 살해된다. 용의자는 풀려났고 동생 다언의 시공간은 폐허가 된다. 17년이 지나 다언은 용의자의 집을 찾아가 마주 앉는다.

자정 무렵 권여선 작가에게 질의서를 보냈더니 새벽 3시께 회신돼 있었다. 모니터를 사이에 둔 밤의 대화였다. 애도되지 못한 죽음과 이미 불가능해진 복수, 누가 더 슬플까.

―장편으로 늘린 이유에서 출발할까요.

▷개작은 부분적으로 세밀하게 진행되었고, 전체 틀은 유지되기 때문에 언뜻 보면 변화된 부분을 찾기 힘듭니다. 분량이 50매 정도 늘었습니다. 그나마 인상적으로 개작된 부분은 태림이라는, 죽은 해언의 같은 반 친구이며 해언에게 질투를 느꼈던 여성이 나오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계간지에 발표된 '당신이 알지 못하나이다'가 남산극장에서 연극으로 공연된 적이 있었는데, 그때 태림 역을 맡았던 우정원 배우가, 워낙 연기를 잘하는 배우기도 하지만, 태림역을 너무도 심도 있게 아프게 해내는 걸 보고 제가 깊은 감동을 받았고 반성을 많이 했습니다. 아, 내가 태림에게 너무 감정을 이입하지 못했구나, 태림의 고통을 등한시했구나, 소설가로서의 게으름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책으로 낼 때는 태림이라는 인물을 좀 더 들여다보고, 우정원 배우가 연기한 어떤 아슬아슬한 슬픔을 좀 반영하려고 했는데, 잘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당신이 알지 못하나이다' 제목에서 당신은 신(神)인지요. "주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저들이 하는 짓을 알지 못하나이다"(누가복음 23장 24절)에서 '저들'의 자리를 '당신'으로 치환했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했습니다. 이를 환언하면 '신의 무지'가 아닐까 싶은데, 의도하신 바가 맞는지요. 이 질문에 정답이 있을까 싶지만요.

▷네, 맞습니다. 당시 제목을 지었던 의도가 정확히 그러했습니다. 김다언의 말에도 나오듯, 세상의 끔찍하고 불가해한 불행에 대해 인간도 똑같이 신에게 신의 무지를 물을 권리가 있지 않나 생각했습니다.

―왜 '레몬'이었을까요.

▷제목이 '레몬'으로 바뀐 이유는, 출판사 측에서 원래 제목으로 가려다 그래도 몇 가지 제안을 주셨는데, 그중 하나가 '레몬'이었고, 저는 이상하게 그 제목에 끌렸습니다. 아마 '레몬'이 노란색을 떠올린다는 점, '리본'과 발음이 비슷하다는 점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다음 세 가지 모습 가운데 가장 슬픈 인간은 누구입니까. 애도되지 못한 죽음(해언), 상실을 껴안고 진행되는 삶(다언), 복수가 불가능해질 만큼 연약한 인간(용의자 한만우).

▷아무래도 다언이, 비극적 사건을 겪은 당사자이기도 하고 사건을 어떻게든 해결하려고, 자기 내부에서 끝내려고 복수를 실행하는 인물이기 때문에, 저로서는 가장 감정이입이 많이 되었고, 그래서 가장 비극적으로 느껴지는 인물입니다.

―3년 전 '안녕 주정뱅이' 출간 당시 인터뷰에서 제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소설 쓰기가 제일 즐겁고, 퇴고가 제일 괴롭다." 그러나 이번 소설은 중편으로 쓰실 때도, 장편으로 개작하시면서도 (다소 다른 의미이겠지만) 즐거움과는 거리가 먼, 괴로운 작업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봅니다. 집필 당시 느낌을 회고하신다면.

▷네. 정말 괴로운 작업이었습니다. 원래 생각으로는 중편 원고를 두 배 정도 뻥튀기를 하여 제법 두툼한 장편을 내려고 했는데, 퇴고가 너무 괴로워 원래 목표의 십분의 일의 성과밖에 거두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소설이라는 게 이상해서, 일단 완성되어 발표되고 나면 스스로 어느 선 이상으로 변형되는 것을 완강히 거부하는 그런 속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가 아무리 뻥튀기를 하려고 해도 '레몬'이 좀처럼 자라주지를 않았습니다.

―완벽한 복수란 무엇일까요. 또 완벽한 치유는 가능할까요. 그리고 만약 선생님이 실재하는 다언이라면, 용의자의 집(A동 301호)에 들어가시겠습니까. (참고로, 소설 '레몬'의 바로 이 장면에 대해 정홍수 문학평론가는 다음과 같이 평했다. "김다언이 한만우 집에 들어서는 장면에서 권여선 소설이 보여주는 문학적 깊이는 정말 놀랍다. 거기에는 전율할 정도로 생생한 인간 진실의 호흡이 있다. 붕괴하는 삶 앞에서 애도의 방식을 질문하는 소설은 많지만, 그애도가 문학 혹은 소설의 자리에서 정말 가능한지 한계선까지 밀어붙인 작품은 드물다.")

▷저는 아마 들어가지 못할 것 같습니다. 완벽한 복수도, 완벽한 치유도 없겠지만, 제게 복수와 치유는 양립하기 어려운 개념입니다. 만약 다언이 복수하지 않고 그럭저럭 살아갔다면 언젠가 시간이 흐르면 치유될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다언은 복수하지 않을 수 없고, 복수를 함으로써 죄를 짓지만, 그 죄는 내가 평생 받겠다, 그렇게 스스로를 처벌하는 방식의 복수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다언의 복수는 치유가 아니라 절대 치유되지 않겠다는 의지를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복수의 방식 또한, 스스로 시시각각 자기가 저지른 죄를 환기하는 대상을 평생 품고 가야 하는 식의 복수를 하는 거죠.

―소설 바깥의 질문도 드리겠습니다. 본명은 권희선이시죠. '인간 권희선'과 '소설가 권여선'은 어떻게 다르고 또 같을까요. 작가가 자신을 타자화하는 게 가능하다면, 소설가 권여선이 보기에 인간 권희선은 어떤 사람입니까.

▷인간 권희선과 소설가 권여선은 좀 다른 종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많이 다릅니다. 제가 평생 권희선으로만 살았다면, 상상만으로도 숨쉬기 힘들 만큼 답답합니다. 권여선이 권희선을 가엾게 여기는 연민의 눈으로 본다면, 권희선은 권여선을 보며 어쭈, 양반됐군, 비아냥거릴 겁니다. 그 태도의 차이 속에 둘의 차이가 있지 않을까 싶네요.

―흔히들 '골방'이라고 표현을 하지요.. 선생님께서 집이 아닌, 주로 카페에서 쓰신다고 어떤 인터뷰에서 말씀하신 바를 들었는데 카페든 집이든 작가에게 그곳은 골방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 골방의 풍경은 어떤 모습인지, 어떤 풍경인지, 어떤 기후인지 궁금합니다. 물리적인 모습이 아니라 '쓰는 행위'가 이뤄지고 있는 정신적인 모습으로서의 골방의 모습을 말씀해주신다면.

▷처음에는 뭔가 소리도 들리고 시간도 흘러가고 하다가, 어느 순간 모든 것이 딱 멈추어버리는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정신적 골방은 고치처럼 자라나서 어느 순간, 제가 어디에 있든, 도서관이든 카페든, 저를 완전히 둘러싸 버려서 모든 것으로부터 저를 격리시키고 모든 것을 중단시킵니다. 그곳에는 바람도 불지 않고 소리도 들리지 않고, 다만 세상에 없던 무언가가 생겨나서 숙성되고 꿈틀거리는, 그런 장소.

―가장 아팠던 소설을 꼽아주신다면.

▷지금은 '레몬'이 가장 아픕니다만 첫 소설 '푸르른 틈새'가 쭉 아팠습니다.

―'푸르른 틈새'를 쓰기 시작하던 당시 상상했던 권여선의 미래 모습이 지금 모습과 얼마나 같고 또 얼마나 다를까요.

▷여전히 제 속에선 권희선이 징징거리고 있지만 그래도 그걸 어르고 달래주는 권여선이 있어 다행이다 생각합니다. 소설이, 더 넓게는 글쓰기가 저를 많이 변화시켰습니다.

―마지막 질문은 조심스럽습니다. 해언의 죽음은 애도되지 못한, 선생님 주변의 누군가의 죽음과 연관이 있을까요. 상실된 해언이라는 인물의 이름이 단지 고유명사가 아니라, 어떤 보통명사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 여쭙습니다.

▷제 내부에서 아직도 애도되지 못한 죽음이라고 할 수 있는, 이십대 초반에 겪은 친구의 죽음이 이 소설과 무관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왜, 라는 질문 앞에서 아직도 저는 분명한 답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김유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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