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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4 (금)

박근혜를 퇴장시킨 ‘박근혜 재판관’의 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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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서기석·조용호 헌법재판관 퇴임… 보수 우위 ‘5기 헌재’ 막 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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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년간 우리 사회는 극심한 정치적·사회적 갈등과 분쟁을 겪었고, 이것이 정제되거나 해결되지 못한 채 헌법재판소로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중략) 재판관으로서 지난 6년의 시간은 저로서는 영광되고 보람된 나날이기도 했지만 참으로 힘든 나날이기도 하였습니다. 왜 이렇게 임기는 길어서 이 고생을 하는지 원망한 적도 있었습니다만 (중략) 우리 사회가 직면한 다양한 갈등과 이해관계를 조정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를 찾아냄으로써, 사회의 진정한 통합과 화합을 이룩하는 것이야말로, 이 시대에 우리 재판소가 수행해야 할 역사적 소명이라 믿습니다.”

임명권자 파면에 동의한 재판관들

4월18일 헌재를 떠난 서기석 헌법재판관의 퇴임사는 파란만장했던 헌재의 지난 6년을 압축해 보여준다. 이날 서 재판관과 조용호 헌법재판관의 퇴임으로 헌재 5기 재판부는 무대 뒤로 퇴장했다. 박한철 헌재소장 체제의 5기 재판부는 헌법재판소법에 규정된 ‘8종 사건’을 모두 처리한 유일한 재판부가 됐다. 대통령 탄핵 심판과 정당 해산 결정이라는 전례 없는 사건들을 모두 다뤘기 때문이다. 9명의 재판관은 법관으로서 최대치의 경험을 한 셈이다.

그 가운데서도 서기석·조용호 재판관은 남다른 소회를 품을 만했다. 이들은 자신을 재판관으로 임명한 박근혜 전 대통령을 파면한 결정에 동의했다. 이들의 결단으로 헌재는 헌법을 유린한 대통령을 만장일치(박한철 소장의 퇴임으로 8 대 0)로 권좌에서 끌어내릴 수 있었다.

법관이 임명권자의 이익에 반하는 판결을 하는 것은 전혀 논란이 되지 않는다. 법관은 오로지 법과 양심에 따라 판결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최고 법원의 판사는 국가의 운명에 공동 책임을 지는 중요한 자리다. 임명권자가 법을 지키지 않을 경우 응징해야 할 의무가 있다. 미국 연방대법원에 좋은 사례가 있다. 1974년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의 사임을 불러온 ‘워터게이트 사건’ 관련 판결이다.

사건의 발단은 공화당이 민주당 전국위원회 사무실에 도청 장치를 설치했다 적발된 것이었는데, 닉슨 대통령이 증거 조작에 관여한 것이 확인되면서 탄핵 위기에 몰렸다. 닉슨은 백악관에 녹음테이프가 있음이 드러난 뒤에도 대통령 특권을 내세워 특별검사와 상원 조사위원회에 증거 제출을 거부했다. 그러자 연방대법원은 8 대 0(9명 가운데 윌리엄 렌퀴스트 대법관이 닉슨 행정부의 법무차관 경력을 이유로 스스로 제척됨) 만장일치로 닉슨 대통령에게 녹음테이프를 비롯한 증거를 제출하라고 명령했다. 당시 닉슨 대통령이 임명한 워런 얼 버거 대법원장과 다른 두 명의 대법관들이 모두 닉슨 대통령에게 반기를 든 것이다. 이 판결로 닉슨은 재선에 성공한 지 2년 만에 탄핵 위기를 맞았고, 결국 판결이 선고된 지 16일 만(1974년 8월9일)에 스스로 물러났다.

박 전 대통령은 2013년 4월19일 서기석, 조용호 재판관을 임명했다. 박 전 대통령은 앞서 대검찰청 공안부장을 지낸 박한철 재판관을 헌재소장에 임명함으로써 헌재의 보수화를 꾀했다. 당시 헌재에는 노무현 정부의 ‘사법부 과거사 청산’ 작업에 따라 박정희 정권 때 자행된 과거사 판결들의 위헌 여부를 다투는 사건들이 있었다. 만약 헌재가 과거사 판결들을 바로잡으라는 결정을 내린다면 ‘아버지의 명예회복’에 힘썼던 박 전 대통령에게 큰 타격을 줄 수 있었다.

통합진보당 해산과 ‘피음사둔’

서기석·조용호 재판관의 가세로 헌재는 보수가 압도하는 구도로 재편됐다. ‘박근혜 청와대’가 의도한 대로 헌재는 정치, 사회의 보수화에 앞장섰다. 대표적인 게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이다. 김이수 재판관을 제외한 재판관 8명이 모두 정당 해산에 동의한 이 결정으로, 헌재는 박근혜 정권의 든든한 버팀목이 됐다. ‘양승태 사법부’가 최고 법원의 위상을 헌재에 빼앗길까 두려워 박근혜 정권과 ‘재판 거래’를 시도할 정도였다.

정당 해산 결정에서 서기석·조용호 재판관의 활약은 두드러졌다. 조 재판관은 안창호 재판관과 함께 다수의견(법정의견)보다 더 강경한 보충의견을 냈다. 보충의견은 통진당이 추구하는 진보적 민주주의를 “북한식 사회주의를 추종하고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부정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보충의견을 낸 두 재판관은 “(통진당의 행위는) 우리의 존립과 생존의 기반을 파괴하는 소위 대역 행위로서 불사의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다”고 일갈했다.

조 재판관은 정당 해산 결정에 반대했던 진보 진영을 조롱하는 표현을 보충의견에 담는 데 힘썼다. “맹자의 고사에 나오는 피음사둔이라는 말이 있다. ‘번드르르한 말 속에서 본질을 간파한다’라는 뜻이다. (중략) 그들(통진당)의 가면과 참모습을 혼동하고 오도하는 광장의 중우, 기회주의 지식인·언론인, 사이비 진보주의자, 인기 영합 정치인 등과 같은, 레닌이 말하는 ‘쓸모 있는 바보들’이 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그는 “둥지에서 뻐꾸기의 알을 발견하고 적절한 조치를 한 뱁새는 자신의 종족을 보존하게 되지만, 그냥 둔 뱁새는 자기 새끼를 모두 잃게 된다”며 통진당 해산의 당위성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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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핵 이후… 엇갈린 두 사람

서 재판관은 다수의견을 정교하게 가다듬는 데 일조했다. 당시 사정을 잘 아는 헌재 관계자는 “처음에는 보충의견이 법정의견이 될 뻔했다. 보충의견은 자칫 진보정당 활동 전체를 부정할 위험이 있었다. 그래서 서 재판관을 비롯한 몇몇 재판관이 나서서 법정의견을 다시 썼다”고 말했다.

두 재판관은 탄핵 심판 당시 박 전 대통령 쪽이 ‘기각’에 가담할 것이라 분류했다. 박 전 대통령이 지명한 만큼 탄핵에 찬성하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였다. 두 재판관과 함께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지명한 김창종 재판관이 기각에 가담해 5 대 3으로 탄핵 정족수 6명을 채우지 못할 것이라는 게 당시 청와대의 분석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만장일치였다. 서 재판관 등은 탄핵이 기각될 경우 박 전 대통령의 남은 임기 1년여 동안 극심한 정치적 혼란이 닥칠 것을 우려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당시 헌재 주변에는 탄핵 심판 선고일이 다가오면서 탄핵에 반대하는 태극기 부대의 집회가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두 재판관은 이후 헌재 역사에 남을 사건에서 확연히 다른 길을 걸었다. 서 재판관은 양심적 병역거부 사건에서 양심적 병역거부자를 위한 대체복무제를 도입하지 않은 것을 위헌으로 판단했다. 그의 판단은 양심적 병역거부 처벌 조항 자체를 위헌으로 판단한 4명의 재판관과 함께 법정의견을 구성했다. 그는 애초 양심적 병역거부라는 말에 부정적이었다고 한다. 병역의무의 형평성이 깨질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에서다. 그는 사석에서 “양심적 병역거부로 교도소에 가는 청년들을 생각하면 틀림없이 대체복무를 허용해야 하지만, 이 제도가 ‘금수저’에 악용될까 걱정된다”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반면 조 재판관은 “대체복무제의 도입은 국가공동체 구성원의 책임 의식과 병역의무를 이행하고 있는 군인 등의 안보관에 부정적 영향을 주어 양심적 병역거부자와 양심을 빙자한 병역기피자의 급격한 증가를 초래할 수 있다”며 양심적 병역거부자 처벌을 합헌으로 판단한 소수의견에 가담했다. 소수의견은 “처벌조항에 의해 달성되는 공익은 국가공동체의 안전보장과 국토방위를 수호함으로써, 헌법의 핵심적 가치와 질서를 확보하고 대한민국 국민의 생명과 자유, 안전과 행복을 지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6기 재판부는 진보가 ‘우세’

최근 헌법 불합치 결정이 난 낙태죄 위헌소송은 두 재판관의 시각차를 더욱 부각했다. 서 재판관은 “낙태죄 처벌은 임신한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제한해 위헌적이다”는 다수의견에 동의했다. 반면 조 재판관은 낙태에 대한 무조건적인 반대를 주장한 소수의견을 주도했다. “지금 우리가 자기낙태죄 조항에 대한 위헌, 합헌의 논의를 할 수 있는 것도 우리 모두 모체로부터 낙태당하지 않고 태어났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 태아였다.” 그는 태아 생명 보호의 근거로 ‘인간의 존엄성’을 끌어들였다. 태아의 생명을 인간존엄 개념으로 접근하면 법리 논쟁은 사실상 불가능해진다. 존엄한 태아의 생명은 여성의 자기결정권에 절대적으로 앞서기 때문이다(고봉진 ‘태아의 헌법상 지위’(2016년 2월29일) 참조).

서기석·조용호 재판관의 퇴임으로 헌재는 유남석 헌재소장 체제의 6기 재판부를 맞게 됐다. 6기 재판부는 보수가 압도적이었던 5기 재판부와 달리 진보가 우세를 보인다. 새로운 진용의 헌재가 5기 재판부의 성과를 토대로 최고 재판소로 거듭날지 관심이 쏠린다.

이춘재 기자 cj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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