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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일)

[낙태죄, 그 너머를 이야기하다 ⑤회]‘모자보건’을 넘어 ‘성과재생산권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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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재판소가 ‘낙태의 죄’에 대한 위헌 여부를 결정하는 판결을 앞두고 있습니다. 지난 2012년 합헌 결정을 이후 7년 만입니다. 전 세계적으로도 임신중지(낙태)의 비범죄화 결정이 각국에서 연이어 이루어지고 있는 가운데 헌법재판소의 이번 결정 또한 중요한 역사적 전환점이 될 것으로 기대합니다. 그러나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끝은 아닙니다. 이제는 처벌로서 책임을 전가해 온 국가와 사회가 어떻게 더 나은 삶의 조건을, 우리의 권리를 보장할 수 있도록 할 것인지 이야기해야 합니다. 임신이나 임신중지의 상황을 강요받지 않을 수 있는 사회를, 누구나 포괄적인 성교육과 정보를 접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어떠한 변화가 이어져야 할까요. '성과재생산포럼'이 주 1회 총 다섯 번의 연재를 통해 그 구체적인 방향을 제안합니다. 향이네에서 만나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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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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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죄 위헌소송(2017헌바127)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최종판결을 앞두고 있다. 입법 후 66년간 존치되어 왔던 형법상 낙태죄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우리는 곧 목도할 것이다. 하지만 낙태죄 조항의 폐지 그 자체가 성과재생산권리의 자동적인 보장을 의미하지 않는다. 과거 가족계획사업의 일환으로 광범위하게 인공임신중절이 시행 되어왔던 때를 지금보다 재생산권이 확보되었던 시기로 볼 수 없듯이, 낙태가 처벌이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는 실질적인 성과재생산권리가 담보되지 않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에서 인공임신중절에 대해서 규정하고 있는 법은 형법과 모자보건법이다. 형법상 낙태죄 조항이 사라지게 된다면, 이에 따라 모자보건법 역시 변화가 불가피하다. 낙태죄 폐지 이후 과연 모자보건법은 실질적인 성과재생산권리를 확보하는 법적 테두리가 될 수 있을까?

■모자보건법은 모자보건에 관심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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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보건법은 탄생에서부터 수차례의 개정이 이루어져서 현재의 모습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재생산 정치의 역사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1973년 모자보건법은 형법상 낙태가 금지되어 있던 상황에서 가족계획사업을 정당화하기 위한 법적 근거로서 제정되었으며, 2009년 모자보건법의 대대적인 개정은 저출산 대책의 일환으로 난임부부 지원의 법적 근거 마련을 위해 이루어졌다. 지난 오십 여년 간 국가의 인구정책은 출산억제정책에서 출산장려정책으로 급선회하였지만, 정책의 일차적인 대상이 여성의 몸과 재생산 능력이라는 사실은 행정자치부의 ‘가임기여성지도’의 제작이나 보건사회연구원의 하향결혼 확산을 위한 ‘백색음모’ 제안에서 볼 수 있듯이 가족계획사업 당시와 비교하여 질적인 변화가 없다. 그리고 이러한 인구정책은 모자보건법을 통해서 실행되어왔다.

모성 건강 혹은 영유아 건강에 대한 통합적이고 일관된 장기적인 관점에서 모자보건법이 시행되어오지 않았다는 사실은 이제까지 모자보건법이 인공임신중절시술과 난임시술이라 불리는 보조생식기술을 어떻게 규제하고 지원해 왔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2009년 당시 보건복지부 장관은 ‘낙태율을 절반만 줄여도 출산율 증가’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으며, 인공임신중절 예방계획은 저출산 대책의 하나로 수립되어 모자보건법에 포함된다. 이후 매년 줄어드는 합계출산율의 지표가 공개될 때마다 불법낙태시술 처벌 강화와 관련된 법안이 논의되고 있으며, 인공임신중절이 보다 더 강력하게 범죄화 되고 규제되는 상황 속에서 모자보건의 대표적인 지표인 모성사망비율은 급증하였다. 또한 이와는 반대로 아이를 낳기 위한 보조생식기술의 사용은 2005년 이전까지 어떠한 공적인 감독이나 관리가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난임부부 지원이 효과적인 출산장려책의 하나로 여겨지게 됨에 따라 2006년 ‘난임부부지원사업’이 시작되었다. 보건복지부는 ‘난임부부의 절반만 임신에 성공해도 수만 명의 아이가 태어날 것’이라고 주장하였으며, 이를 근거로 난임지원에 대한 규정이 모자보건법에 포함되었으며 보조생식기술은 국가가 나서서 지원해야하는 재생산 의료 영역이 되었다. 하지만 보조생식기술 사용 증가에 따른 다태아 출생아의 증가, 고위험 임신의 증가, 조산 및 저체중 출생아 증가에 대해서 모자보건법은 해결책을 제시해주지 못하고 있다.

물론 이제까지 모자보건법의 테두리 안에서 여성이 출산의 도구나 피해자로서만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70년대 강력한 산아제한 정책은 어떤 여성에게는 인공임신중절시술의 접근성을 높여주고 가족 내에 출산과 관련한 협상력을 확보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을 수 있으며, 현재 체외수정을 통해서 자녀를 출산하고자 하는 여성들에게 공적 난임시술 지원은 재정적 도움과 함께 난임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개선함으로써 도움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간과하지 말아야할 문제는 낙태시술에서 난임시술까지 재생산기술의 사용이 인구 조절에 초점이 맞춰지고 숫자로 환원되는 합계 출산율의 증감에만 관심을 가지게 됨으로써, 모자보건법이라는 틀 안에서도 재생산 기술의 일차적인 사용자인 여성들의 몸과 건강의 문제는 오히려 부차적이고 사소한 것으로 여겨져 왔다는 점이다.

■모자보건법은 위계와 차별을 기반으로 작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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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보건법은 모성과 영유아 건강 증진의 목적 이전에 인구조절을 위해서 존재해왔으며, 나아가 어떠한 시민이 인구를 재생산할 자격이 있는가의 경계를 끊임없이 구획해왔다. 역사적으로 모자보건법이 ‘불임수술’에 대한 조항과 ‘인공임신중절수술의 허용한계’ 조항을 통해서 아이를 낳아야 하는 시민과 그렇지 않은 시민, 태어날 자격이 있는 생명과 그렇지 않은 생명을 우생학적 논리의 의하여 선별해왔다면, 현재 난임시술에 대한 조항들은 보조생식기술을 사용해서 재생산을 할 수 있는 자격을 법적 혼인관계에 있는 이성애 부부로 한정함으로써 또 다시 ‘정상가족’의 신화를 강화시키고 있다. 인공임신중절 예방 대책으로 언제나 습관적으로 거론되는 대책이 ‘미혼모 지원’이지만, 싱글 여성이 보조생식기술을 사용하여 엄마가 되고자 하는 재생산 실천은 금지되어 있다. 난임시술의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난자채취와 관련된 시술은 현재 건강보험의 혜택을 받을 수 있지만, 같은 기술을 싱글 여성이 항암치료와 같은 의료적 이유로 자신의 재생산능력을 보존하기 위하여 난자동결을 위해서 사용할 경우에는 어떠한 공적 지원도 받을 수 없다. 이처럼 모자보건법은 개개인의 재생산과 관련된 권리와 건강의 문제를 어떻게 보장해 나갈 것인가에 대한 깊은 고민을 담고 있기 보다는, 당장의 인구를 증가시킬 수 있는 재생산 실천을 선별적으로 지원함으로써 재생산의 위계화를 정당화하는 법적 근거로 존재하고 있다.

낙태시술에서 난임시술까지 문제는 기술에의 접근성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형법상 낙태죄가 폐지된다 하더라도, 모자보건법상 정확한 의료 정보와 최상의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권리가 개인이 처한 사회경제적 위치나 혼인관계에 따라서 차별적으로 주어진다면 이는 본질적으로 성과재생산권리가 확장되었다고 보기 힘들 것이다. 개개인의 아이를 낳을 것인가 혹은 낳지 않을 것인가에 대한 의사결정과 실천의 과정은 국가의 인구정책과 별도로 존중 받아야 한다. 합계출산율 0.98 시대에도 안전하고 합법적으로 임신중지를 할 수 있는 권리는 보장되어야 하며, 보조생식기술에 대한 정책적 지원의 고민은 ‘출산율 제고’의 명분과 상관없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이 과정은 젠더, 섹슈얼리티, 장애, 혼인관계, 계급에 따라 위계적이고 차별적으로 이루어져서는 안된다.

■모자보건의 프레임은 성과재생산권리를 담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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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보건법은 ‘모성 및 영유아의 생명과 건강을 보호하고 건전한 자녀의 출산과 양육을 도모함으로써 국민보건 향상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하고 있지만, 실제 이 법에서 관심을 가지고 있는 대상은 임산부, 그리고 보다 정확하게는 새로 태어나는 국민이 될 태아와 영유아이다. 2009년 저출산 문제 해결을 위해서 단지 임산부 뿐만이 아니라 가임기 전체의 여성의 생식건강 보호가 필요하다는 배경 아래, 모자보건법에서 모성이란 ‘임산부’와 ‘가임기 여성’으로 새롭게 정의되었다. 임신과 출산에 국한되지 않은 보다 포괄적인 재생산 건강 증진을 위한 지원은 필요성에 대한 인지는 긍정적인 변화이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재생산 건강의 문제는 모성을 임산부에서 가임기 여성으로 확대한다고 보장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여전히 모든 여성은 어머니가 될 잠재적인 존재이며 여성건강의 핵심에는 임신과 출산이 놓여있다는 전제에서 만들어진 모자보건법은 모두를 위한 성과재생산권을 확보하는 데에 한계가 있다. 재생산과 관련된 신체 기관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것이 곧바로 모든 인간은 재생산을 통해 부모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 신체 기관과 관련된 건강을 추구할 권리는 아이를 낳을 것인가 혹은 낳지 않을 것인가의 의지나 계획과 상관없이 마땅히 보장되어야 한다. 자궁경부암 예방과 관련된 정확한 정보와 의료 서비스는 ‘자궁이 있는 모든 개인’에게 제공되어야 하는 기본적인 건강권의 문제이지, 미래의 어머니가 되어야 할 어린 여성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국가가 지원해야하는 서비스가 아니다. 재생산 관련 신체기관의 질병은 아이를 낳을 계획이 있는 사람에게나 없는 사람에게나 예방 되어야 하는 질병이지, 아이를 낳아야 하기 때문에 더 치명적인 질병이 되거나 아이를 낳을 계획이 없는 사람에게는 사소한 질병이 되는 것은 아니다.

■‘모자보건’을 넘어 ‘성과재생산권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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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 합법화를 지지하는 아르헨티나 여성들이 지난해 8월9일(현지시간) 새벽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의회 앞에서 낙태 합법화 법안이 상원에서 7표차로 부결됐다는 소식을 듣고 울부짖는 여성을 끌어안고 위로하고 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 AF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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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법상 낙태죄가 폐지된 이후, 앞으로 임신중지와 관련된 내용들은 어떠한 법과 정책에서 어떠한 관점에서 다루게 될 것인지가 중요한 문제로 제기될 것이다. 앞서 밝혔듯이 낙태죄 폐지 운동의 핵심은 낙태할 자유를 성취하는 것이 아니었다. 낙태죄 폐지 운동의 핵심은 재생산과 관련된 개인들의 선택과 실천을 국가는 단죄하고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재생산권 보장을 통해서 지원해야 한다는 것이며, 이제까지 임신과 출산 그리고 돌봄과 양육의 일차적 주체로서 존재해왔던 여성들의 경험과 판단은 의심과 규제의 대상이 아니라 경청과 존중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많은 여성들이 임신과 출산을 경험하고 있으며, 또 많은 다른 여성들은 임신중지를 필요로 하고 있다. 모가 되지 않기 위해서 임신중지를 원하는 여성에게 적용되는 법이 모자보건법이라는 것은 애초에 모순적이었다. 외부의 압력이나 제한 없이 아이를 낳을 수 있는 혹은 낳지 않을 수 있는 권리, 그 권리를 실천하기 위해서 최상의 의료 정보와 서비스에 차별없이 접근할 수 있는 권리, 그리고 재생산과 관련된 신체 건강을 추구할 권리는 ‘모자보건’의 문제가 아닌 시민권의 문제이다. 모자보건의 틀을 넘어서 성과재생산권리를 어떻게 추구할 것인가가 앞으로 우리에게 던져진 중요한 과제이다.

필자 소개

성과재생산포럼 기획위원. 여성학 연구자. 미국 메릴랜드 대학교 여성학과에서 초국적 보조생식기술산업과 재생산권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현재 하버드 한국학 연구소 박사 후 연구원으로 재직하고 있다.


김선혜 성과재생산포럼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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