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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숨진 2500명, 어떻게 구제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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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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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19일 오전, 제주 남문사거리에 위치한 ‘4·3 도민연대’ 사무실이 술렁거렸다.

“김○○ 삼춘 돌아갔수다. 부고났네.”

“아이고 큰일났네. 벌써 금년에 두 사람 돌아가셨네. 현창용 할아방, 김○○ 할아방….”

김○○ 할아버지는 재심 청구소송을 준비 중이었다. 고문 후유증이 심해 요양원에 있던 처지였지만 늦게나마 명예를 회복해야 한다는 가족들의 설득이 큰 역할을 했다. 생전 김 할아버지는 4·3 이야기만 나와도 얼굴을 찌푸리며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증언은커녕 생각조차 하기 싫다며 손사래를 쳤다.

2016년 도민연대는 4·3 수형인 2530명 중 생존자가 40명가량이라고 발표했다. 도무지 행방을 찾을 수 없는 사람을 제외한 숫자다. 일각에서는 한국전쟁 당시 북한으로 간 수형인도 많았을 거라는 추측이 나온다. 제주로 돌아가면 더 큰 화를 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서다.

올해 초 생존자는 30명으로 줄었다. 3개월이 지난 지금 생존자는 28명이다. 올해 초 재심을 통해 무죄를 받은 피해자는 18명(1명 사망)이다. 도민연대와 변호인단은 나머지 12명(김 할아버지를 포함한 숫자)에 대한 소송을 준비하고 있었다. 도민연대에 따르면 5명이 제주도, 6명 육지, 1명이 일본에 거주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 소송에 몇 명이 참여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재심은 형사소송이기 때문에 판결문 등 자료와 당사자들의 구술능력이 중요하다. 애초 걸림돌이었던 판결문 등 자료는 첫 번째 재심을 거치면서 해결됐다. 남은 문제는 생존자들의 구술이다. 11명 중 병원 신세를 지고 있는 사람만 3~4명에 이른다.

생존자들도 고령, 시간 갈수록 줄어


당사자와 가족, 도민연대, 변호인단 모두 “시간이 없다”고 입을 모으는 이유다. 11명 중 한 명인 송순희 할머니의 딸 강영숙씨는 “우리 엄마한테 그런 일이 있었다는 걸 너무 늦게 알았다. 엄마 인생이 너무 억울하다”며 “재심을 청구하는 걸 몰라서 1차 때는 못했다. 더 늦기 전에 재심을 청구하고 싶다”고 말했다.

숨진 수형인 2500여명의 명예회복도 남은 과제다.

이들이 명예를 회복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다. 생존자들과 마찬가지로 재심을 청구해 무죄를 받거나 ‘일괄무효’의 내용이 담긴 특별법 개정안이 통과되는 것이다. 수형인들의 재심을 맡은 임재성 변호사는 “(사망자도) 재심을 청구할 수는 있지만 진술기록이 없고 증언도 할 수 없어 상당히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특별법 개정안이 좀 더 쉽고 명확한 길이다. 오영훈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대표발의한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특별법 전부개정법률안’은 2017년 12월 19일 국회에 제출됐다. 피해자들에 대한 배·보상 근거를 명확히 하고 추가 진상조사를 위해 조사권한을 대폭 강화하는 내용이다.

나아가 특별법 개정안에는 2530명의 수형인을 양산한 불법적인 군사재판 전체를 무효로 한다는 내용도 담겼다. 그간 수형인 구제에 관한 법은 없었다. 이들은 4·3 피해자 가운데 가장 늦게 드러났다. 2000년 특별법이 제정됐지만 이들이 피해자 범주에 들어간 건 2007년이다. 그마저도 보수단체의 반발이 거셌다.

한 수형인 유족은 “근거도, 절차도 없는 재판으로 평생을 고생했지만 옥살이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어디 가서 말도 못하고 살았다. 그래서 피해자로 인정도 못받았다”며 “당사자들은 대부분 사망했고 지금 2세들이 70대에 들어섰다. 이제 이 고통을 끝내야 한다. 이런 상황을 방치한다면 국가라고 할 수 없다”며 울분을 토했다.

“정부 차원의 진상보고서 재발간돼야”


하지만 특별법 개정안은 기획재정부의 반대를 넘지 못했다. 행정안전부는 지난해 9월 행정안전위원회 법안심사소위원회 회의에서 “현재 (희생자가) 1만4000명에 해당하는데 (개정안이 통과될 경우) 보상비용 추계가 1조8000억원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며 “재정당국과 협의가 필요하다”고 난색을 표했다.

궁극적으로는 수형인에 대한 진상규명이 이뤄져야 한다. 지금까지 수형인과 관련된 자료는 수형인 명부가 전부였다. 지난 첫 번째 재심과정에서 ‘군집행지휘서’를 추가 확보했다. 하지만 그 외에 국가가 가지고 있는 관련 자료는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따라서 피해자들의 증언을 공식적인 기록으로 남기는 게 중요하다.

양동윤 도민연대 공동대표는 “시간이 오래 지나 피해자들의 증언에 한계가 있다고 해도 증언이 포함된 정부 차원의 진상보고서가 재발간되어야 한다”며 “재판으로 명예는 회복됐을지 몰라도 진상이 규명되지 않는다면 제대로 된 해결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정부 차원의 진상보고서는 2003년 10월에 마지막으로 발간됐다.

양 공동대표는 이어 “4·3 추념식을 성대하게 하고, 추모공원을 조성하고, 여러 가지 부대시설을 만들고, 피해자에게 의료비를 지원해준다고 해서 제주 4·3이 해결되는 게 아니다”라며 “우리가 역사에서 교훈을 얻는다고 하는데, 정리된 역사가 없다면 교훈을 어디서 얻을 수 있겠나. 특별법에 진상보고서 재발간 내용도 포함돼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 3월 20일 ‘제주 4·3 희생자유족회’는 각 정당 대표와 원내대표실을 찾아 호소문을 전달했다.

“고령의 희생자와 유족들이 세상을 뜨기 시작해 참극을 겪어온 우리에게는 남은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이념이나 (정치)세력의 유·불리가 아니라 피해받은 국민들에 대한 화해와 치유를 통해 대한민국의 새로운 미래를 준비해주십시오.”

이하늬 기자 han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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