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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9 (화)

'이충무공 쌍룡검' 행방 묘연…회수 어려운 도난 문화재 [심층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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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커녕 도난 시기·수량도 불명확 심증만 있고 물증은 없다/국보부터 사당 문짝까지 무차별 피해 / 목록 정리하고 제때 신고만해도 큰 도움 / 2017년 환수 보물 1993호 ‘이선제 묘지’ / 반출 시도때 작성된 실측도 결정적 역할 / 2014년부터 5년간 3181점 도난 당해 / 관리 허술한 비지정문화재 94% 차지 / 전문가들 “문화재 폭넓게 관리·연구 기증·기탁 활성화… / 도난 재발 막아야”

세계일보

지난 5일 전북 부안군 부안읍 동중리에 작은 잔치가 열렸다. ‘돌오리상’의 귀향을 축하하는 자리였다. 절도범의 손을 탄 게 2003년이니 16년 만에 제자리를 찾았다. 어렵사리 돌아온 돌오리를 쓰다듬는 주민들의 얼굴에 기쁨이 넘쳤다. 그런데 돌오리의 부재는 정말 그렇게 길어야 했을까. 이런 의문을 떠올리게 하는 씁쓸한 뒷사정이 있다.

관리 주체인 부안군이 돌오리 도난을 신고한 건 사건이 벌어지고 무려 12년이 지난 2015년이었다. 그제야 문화재청 사범단속반은 본격적인 수사에 나섰다. 지정문화재인 ‘부안 동문안 당산’(국가민속문화재 19호)의 일부라서 거래가 어려운 데다 수사망까지 좁혀오자 용의자가 돌오리 은닉처를 자진(?) 신고한 게 회수로 이어졌다. 제때 신고만 했어도 돌오리의 유랑이 그렇게 길어질 일은 없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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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일 문화재청에 따르면 1985∼2018년 문화재 3만677점이 도난 피해를 보았고, 이 중 6598점이 회수됐다. 아직도 찾지 못한 문화재는 어디를 떠돌고 있을까. 수십년 전 분실돼 회수가 난망인 문화재는 아직 남아 있기는 한 걸까.

부안 돌오리의 사례처럼 도난문화재를 되찾는 데는 긴 시간과 큰 인내가 필요하다. 전문가들은 소장하고 있는 문화재 목록을 정리해두고, 사건 발생 사실을 제때에 신고만 해도 효과가 크다고 입을 모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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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장 정원으로 흘러 들어간 묘지의 석물

절도범들이 노리는 문화재는 무차별적이다. 국보인 ‘소원화개첩’(238호)부터 지역 사당의 문짝까지 수만점이 피해를 보았다. 하지만 특정 문화재를 대상으로 범행이 집중되는 경향이 있기도 했다. 1980년대 말∼1990년대 초에는 절터나 묘지 등에 있는 석물의 도난이 심했다. 당시 남한강 일대에 별장 건설이 이어지면서 정원을 꾸미기 위한 용도로 수요가 많았다고 한다. 문화재청 사범단속반장을 지낸 허종행씨는 “명절 즈음에나 묘지에 가니 석물의 도난 사실 자체가 늦게 확인되는 데다 당시엔 사진을 찍어두는 경우도 별로 없었다”며 “도난된 게 분명해 보여도 증거가 마땅찮으니 회수하는 데 어려움이 컸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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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수수색영장 집행을 통해 확보된 도난 고서적과 도자기. 문화재 도난 사건의 경우 일시, 수량, 범행 대상 등을 구체적으로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회수에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문화재청 제공


영정 도난 사건이 빈발하기도 했다. 1990년대 말 KBS의 ‘TV쇼 진품명품’에서 영정 몇 점이 1억원이 넘는 것으로 감정되면서 영정 도난이 줄을 이었다. 뜻하지 않게 영정이 돈이 된다는 걸 절도범들이 아는 계기가 된 것이다. 도난문화재 정보에 오른 영정은 36건이나 된다.

문짝이나 목판 같은 건 오랜 시간을 지내며 자연스럽게 밴 ‘고풍’ 때문에 실내를 장식하는 의자, 탁자, 액자 등에 활용되며 절도범들의 손을 많이 탔다.

◆심증은 있으나 물증이 없다… 부실한 도난 정보

현재 문화재청 홈페이지 ‘도난문화재 정보’에는 593건이 올라 있다. 이 중에는 도난 시기, 수량, 대상 문화재 등을 알 수 없는 게 적지 않다. 평소 관리가 소홀함을 보여주는 것이고, 도난이 발생한 뒤에는 회수를 어렵게 하는 요인이다.

1988년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는 경북 안동의 ‘만우정’, 정재종택 도난 사건에서 책, 문서, 그림을 “모두 도난당했다”고 하는데, “소장목록이 없어 정확한 수량은 알 수 없고” 200점 정도로 짐작할 뿐이다. ‘세종 금천리사지 옥개석 등’은 “2011년부터 보이지 않았다”는 주민들의 이야기만 전하고 있다. 1932년 화가 이상범이 그린 ‘이충무공 영정’은 도난 일시를 ‘1969∼2009년 사이 추정’으로 해놓아 있으나 마나 한 정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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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대부분을 관리하는 지방자치단체의 관심 부족이 드러나기도 한다. 지역 내에 상당히 많은 문화재가 있는 한 지자체는 절터에 있던 석물이 없어졌다고 최근 문화재청에 신고했는데, 해당 석물의 사진이 한 장도 없었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도난문화재란 ‘심증’이 짙어도 ‘물증’이 없어 회수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런 상황은 소장자·소장기관의 문화재 관리가 허술하다는 걸 보여준다. 문화재청 사범단속반 한상진 반장은 “최소한 무엇이 없어졌는지는 알아야 찾을 수가 있는 것 아니냐”며 “소장 목록을 만들고, 사진을 찍어두라고 권유하고 있으나 여전히 개선해야 할 부분이 많다. 도난 리스트에 올리면 거래 자체가 불법이기 때문에 회수하는 데도 상당한 효과를 가진다”고 말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구체적인 도난 정보는 회수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절도 후 해외로까지 유출된 문화재의 환수 사례에서 도드라진 특징이다.

‘이선제 묘지’(보물 1993호)가 2017년 환수될 수 있었던 것은 1998년 밀매단이 일본 반출을 시도할 때 작성된 실측도, 조서 등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동화사 지장시왕도’(2017년 환수)와 ‘옥천사 나한상’(〃)은 미국의 경매에 나왔는데, 조계종의 ‘불교문화재 도난백서’를 토대로 반환을 요구해 30년 만에 제자리에 돌려 놓았다. 조계종 문화부 신유철 문화재팀장은 “명확한 정보가 있었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환수할 수 있었다”며 “각 사찰이 소장한 전체 문화재 리스트를 작성하고, 도난된 것이 있는지 확인하고 있다”고 말했다.

◆“기증·기탁으로 도난 재발 막아야”

회수한 문화재를 잘 관리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 특히 상대적으로 관리가 허술해 범행의 타깃이 되는 비지정문화재가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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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일 문화재청에 따르면 2014∼18년 5년간 도난당한 문화재 3181점 가운데 3004점(94.4%)이 비지정문화재였다. 회수된 문화재(1833점)에서도 비지정문화재(1827점) 비중이 압도적이다. 쉽게 범행 대상이 된 비지정문화재는 다시 피해를 보기도 쉽다는 게 문제다. 실제 경북 봉화의 쌍벽당은 2000년, 2003년, 2011년 세 차례에 걸쳐 고서 수백권과 제사상 등을 도난당했다. 경북 상주의 용호리 삼층석탑은 2003년 8월 도난당한 것을 두 달 뒤 회수해 원위치에 돌려놓았으나 2009년 7월 탑의 일부가 다시 없어졌다.

문화재 주변에 폐쇄회로(CC)TV 등 보안장비가 확충되고는 있지만 지방의 박물관, 대학, 연구소 등에 기증·기탁을 활성화하는 것이 보다 근본적인 대책이라는 의견이 많다. 한상진 반장은 “원위치에 두는 게 원칙이긴 하나 회수한 문화재를 본래 있던 야산 같은 곳에 되돌려놓는다면 다시 사라질 위험이 크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며 “지역의 박물관 등 기탁을 유도해 도난을 막는 것은 물론 시민들과의 접촉을 늘리는 것도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 각 지방 문중의 고서적 정리 사업을 오랫동안 이끌고 있는 한국학중앙연구원 안승준 실장은 “보안장비를 늘려도 절도범이 마음만 먹으면 훔쳐가는 게 어렵지 않다”며 “기증·기탁은 도난 피해를 막고 폭넓게 문화재를 연구,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이라고 밝혔다. 안 실장은 또 “지정문화재 중심의 문화재 정책 때문에 비지정문화재에 대한 주목도가 떨어지는 게 현실이다. 예산과 인력을 늘려 문화재를 폭넓게 관리, 연구할 수 있는 역량을 키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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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이 사용했던 것으로 알려진 쌍룡검.


◆일제강점기 1910년 유실 추정 행방 묘연한 ‘이충무공 쌍룡검’ 국보 ‘소원화개첩’ 등도 확인 안돼

도난 리스트에 올라 있는 문화재 중에는 가치와 의미가 각별해 안타까움이 더욱 큰 것들이 있다. 이순신 장군이 사용했던 것으로 알려진 ‘이충무공 쌍룡검’은 1910년쯤 궁내부 박물관에서 전시되었다가 수장고로 들어간 후 행방이 묘연한 상태다. ‘이충무공 난중일기 초고본(을미일기)’은 1595년 작성한 친필 일기다. 1795년 간행된 ‘이충무공전서’에 활자로 수록되어 있으며, 종가에서 보관해왔으나 역시 일제강점기인 1928년 유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도난 시기나 유물의 성격으로 볼 때 아직 존재한다면 일본에 있을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소원화개첩’은 도난문화재 중 유일한 국보(238호)다. 시서화에 뛰어났던 세종의 세째 아들 안평대군의 글씨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다. 낙관과 도장이 찍혀 있는 진본으로, 국내에서는 이 문화재가 안평대군의 유일한 작품이었다. 한 문화재 전문가는 “유물 자체가 없어졌을 수 있다”며 “누군가의 손에 들어가 노출되지 않고 있는 상황이라면 소장자가 세상을 떠난 뒤 모습을 드러낼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배익기씨가 감추고 내놓지 않고 있는 ‘훈민정음 상주본’은 값을 매길 수 없는 ‘무가지보’(無價之寶)로 통한다. 국보 제70호 훈민정음과 같은 판본이지만 보존 상태가 좋고 학자의 어문학적 견해가 많아 가치가 더 큰 것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전남 순천 송광사 16조사 진영 중 13점(보물 제1043호)도 눈에 띈다. 송광사를 중심으로 고려 후기에 활약한 고승 16명을 그린 초상화인데 1995년 1월 3점만 남기고 사라졌다. 당시 경찰은 사찰 전각 뒤쪽 흙벽에 지름 1m 가량의 구멍이 난 것으로 보아 절 내부 사정을 아는 문화재 전문절도범의 소행으로 추정했지만 범인을 잡지 못했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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