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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이영종의 평양오디세이] 코드 인사 논란 따라 휘청이는 대북 싱크탱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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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퇴 압박’에 하차 손기웅 원장 이어

김연철 원장도 10개월 만에 장관행

청와대 선호의 ‘코드 인사’ 반복 정황

“올곧은 연구기관 위상 회복될 때”

국책 연구기관 통일연구원에선 그간 무슨 일이
지난 8일 청와대는 김연철 통일연구원장을 통일부 장관에 내정한다고 발표했다. 지난해 4월 취임한 후 330일 만에 이뤄진 장관 임명 소식에 연구원 박사들 사이에선 수근거리는 소리가 나왔다. 전임 원장인 손기웅 박사가 10개월 만에 퇴임한 데 이어 연거푸 1년도 채우지 못하고 수장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수장이 자주 바뀌니 조직의 안정은 물론 연구활동의 연속성이나 방향성도 흔들리게 될지 모른다는 목소리였다.

통일연구원에선 그간 무슨 상황이 벌어졌을까. 찬찬히 몇년간의 흐름을 되짚어 보면 정권의 변천에 따라 국책 연구기관들의 책임자를 교체하고, 권력의 코드에 맞는 인사를 낙하산식으로 앉히는 모양새가 반복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 사태와 문재인 정부 출범 시기에 이뤄진 통일연구원장 인사 논란은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일 수있다. 총리실이 노골적 개입을 한 것은 물론이고, 청와대 인사수석실이 배경에 자리한 정황도 감지된다는 게 관련자들의 주장이다.

중앙일보

통일연구원은 1991년 민족통일연구원으로 출범해 통일·북한 중추 국책 연구기관으로 자리매김 했고, 서울 남산·수유동 시절을 거쳐 2015년 서초동 시대를 열었다.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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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단은 2017년 3월 취임한 손기웅 통일연구원장을 그해 5월 출범한 현 정부가 뒤흔들면서였다. 손 원장은 박근혜 대통령 탄핵 보름여 만에 이뤄진 임용 절차에 따라 발탁됐다. 전임 최진욱 원장이 2014년 3월부터 3년간의 임기를 채우고 퇴임한 데 따른 조치였다. 손기웅 원장은 통일연구원 내부의 동료 박사 2명과 함께 3배수 후보에 올랐고 최종 낙점됐다. 황교안 권한 대행 체제에서 선발 절차와 임용이 이뤄진 데다 어쨌든 연구원 출신 인사들 간의 경쟁에 따른 인사였다. 이전 정권을 ‘적폐’로 치부하는 현 정부의 인식과도 거리가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현 정부 출범 두 달 후인 2017년 7월부터 국무총리실과 정부 부처가 산하 연구기관장에 대한 인사자료를 뒤적이며 교체를 조율하기 시작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9월 박근혜 정부 고용노동부 장관 출신인 방하남 한국노동연구원장이 사임했고, 11월엔 교육부 차관을 지낸 김재춘 한국교육개발원장이 도중 하차했다. 같은 달에 26개 국책연구기관의 인사와 운영을 총괄하는 총리실 산하 경제인문사회연구회(경사연) 김준영 이사장은 임기를 2년 넘게 남겨놓고도 사퇴했다.

퇴임 압박이 가해진 건 통일연구원도 예외가 아니었다. 손기웅 전 원장은 “원장 취임식을 한 당일 민주당 정책위 회의에서 ‘손기웅 선임에 대한 부적절 보고서’가 회람됐다는 얘기를 듣고 해당 문건을 확인한 뒤엔 눈앞이 캄캄했다”며 “정부 출범 이후엔 사퇴를 요구하는 강도가 더 세졌다”고 말했다.

그간 합리적이고 무난하게 경사연을 이끌어 왔던 김준영 이사장의 퇴임과 때를 같이해 총리실은 경사연 산하 기관장들에 대한 감사에 착수했다. 같은 해 12월 한국개발연구원(KDI) 김준경 원장이 사임한 것을 시작으로 현정택 대외경제정책연구원장, 김상호 보건사회연구원장이 자리를 내놓았다. 버티던 손기웅 원장도 이듬해 1월 11일 퇴임식을 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국책 연구기관장의 사퇴압박이 사전 계획에 따라 전방위적으로 이뤄졌다는 사실은 퇴임 이튿날 손 전 원장과 경사연 K 사무총장 사이에 이뤄진 전화통화에서도 확인된다.

▶손 전 원장=“12월 말에 3대 기관장 나갈 때 제 이름이 청와대에서 나왔다고 사무총장님한테 얘기 들으니 더 망설일 이유가 없더라.”

▶K 사무총장=“다른 분들 것은 11월 초에 나왔고, 원장님 건은 12월에 나와서 한 달의 차이가 있다. 정부 측 잘못이 있죠. 미리 노티스(notice) 줬으면 12월 말에 자연스럽게 정리하면 되는데. 그 사람들이 그걸 참 그렇게 해가지고….”

▶손기웅=“그런데 BH라는 게 청와대입니까, 국가안보실인가요.”

▶K=“저희는 인사수석실에서만 통보받아요.”

▶손기웅=“(잘못 알아듣고) 민정수석실에서?”

▶K=“아니오. 인사, 인사수석. 다른 루트는 저희는 모릅니다.”

▶손=“그때 그럼 제 이름이 분명히 12월에 나왔습니까.”

▶K=“네. 그 이전에는 일괄로 한 번 왔었는데, 그땐 (손 전 원장 이름이) 없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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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기웅 통일연구원장 사퇴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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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기웅 박사가 원장직을 사퇴하던 시점에 경사연 이사장은 공석(후임 성경륭 이사장은 2018년 2월 취임)이었다. 사무총장인 총리실 고위간부 출신 K씨가 사실상 이사장을 대신해 경사연의 해당 업무를 지휘했다. K 사무총장의 발언에 따르면 청와대 인사수석실이 국책 연구기관장을 사퇴시키려 리스트를 작성해 시기별로 나눠 실행에 옮겼다는 얘기가 된다. 통일연구원장의 경우, 경사연 산하 3대 기관장 인사를 마무리한 직후 사퇴시키려 했지만, 손 전 원장이 버티면서 해를 넘기게 됐다는 게 K 사무총장의 언급 취지다.

퇴임을 거부하던 손 전 원장이 성희롱 논란에 휩싸인 과정도 석연치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손 전 원장은 2017년 12월 말 전체 직원들과의 송년회를 연구원 인근 서울 강남고속터미널 소재 한식당에서 열었다. 회식을 마치고 헤어지는 과정에서 엘리베이터 앞에서 만난 남녀 직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한 햇 동안 수고했다”는 말을 건넸다는 게 손 전 원장의 주장이다.

그는 “직원 격려 과정에서 신체 접촉이 있었던 점은 명백한 잘못이라 생각하지만 총리실에서 감찰까지 벌이고 원장 퇴임 압박 카드로까지 내세운 건 이해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이 과정에서 연구원 담당관은 원장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총리실에 관련 내용을 고발조치 했다는 전언도 나온다. 더우기 손 전 원장은 “퇴임 이후에도 모든 문제를 공론화하기 어려운 압박이 있었다”며 “문제를 거론하지 말라는 압박인지 최근 국가인권위원회가 ‘재임 중 성희롱 사건에 대한 경위서’ 제출을 요구하는 공문을 보내왔다”고 밝혔다.

손 원장에 대한 사퇴 압박이 절정을 치닫던 시점에 연구원 안팎에서는 “문재인 대선 캠프 출신인 김연철 박사가 후임 원장으로 올 것”이란 소문이 퍼졌다. 원내에서 두 명의 중견 박사가 3배수에 올랐지만 결국 김연철 원장으로 결론 났다.

김 원장 임명을 놓고 “석사급 연구원으로 통일연구원에서 일한 경력이 있는 북한 전문가”라는 지적과 “코드에 맞지 않는 전임자를 밀어내고 대선 캠프 출신의 김연철을 앉힌 것”이란 비판이 엇갈렸다. 연구원들 사이에선 이번엔 정치권과는 거리를 두고 소신있게 올곧은 연구 결과를 고수할 인사가 발탁돼 조직 안정과 연구활동의 정상화가 이뤄져야 한다는 기대감이 형성되고 있다. 물론 그런 희망 역시 결국은 이뤄지기 어려울 것이라는 공감대도 그들의 기대를 잠식하고 있다.

이영종 통일북한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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