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한국에서 벌어지는 상황에 비추면 덴마크의 탈원전 결정은 동화 같다. “한국은 세계 최고의 원전 기술력을 갖고 있다”는 국내 원전주의자들이 덴마크처럼 세계 최고 수준의 원자력 연구 역량까지 갖고 있다면 탈원전의 탈자도 꺼내지 못했을 게 분명하다. 한국의 원전주의자들은 탈원전 정책을 재고해야 할 이유가 차고 넘친다고 하지만 실상은 반대이다. 원전을 새로 짓는 나라는 중국과 몇 나라 외에는 없다. 지난해 착공한 원전도 전 세계적으로 단 2기뿐이다. 탈원전 비판 논리도 한꺼풀만 벗기고 들어가면 다 무너진다. 최근 탈원전 정책 때문에 미세먼지가 심각해졌다는 주장은 완벽한 가짜뉴스다. 탈원전 정책에 따른 원전 가동 중단은 시작하지도 않았다. 현 정부 들어 원전 발전량이 줄어든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는 부실공사가 드러난 데 따라 원전에 대한 안전을 점검하느라 벌어진 결과일 뿐 탈원전 정책 때문이 아니다. 정부의 탈원전 정책 때문에 해외 원전 공사 수주를 하지 못했다는 주장은 전형적인 왜곡이다. 지난해 영국 원전 수주에 실패한 것은 조건이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국의 탈원전 정책 때문에 수주하지 못했다는 주장은 영국 가디언지 기사에서 맨 뒤에 잠깐 언급됐다. 이것을 한국 언론이 대서특필해 핵심 요인인 것처럼 둔갑시켰다. 탈원전 정책 탓에 핵 공학 관련 학과에 학생이 줄었다는 주장도 코미디다. 대학에서 영원히 잘나가는 학문·학과는 없다. 원전은 영원할 것이라는 이데올로기에 원전주의자들이 목매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미 깨어진 원전 불패 신화의 조각을 붙들고 주술을 걸고 있는 것이다.
덴마크의 탈원전 12년 토론은 치열했다.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에 집착한 보어의 이상과 학문적 전통을 포기하는 게 쉬울 리 없었다. ‘원전은 짓지 않지만, 원자력 연구는 계속한다’는 결정이 나온 것은 그 산물이다. 원전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모르니 연구는 이어가자는 것이다. 사시사철 균질하게 부는 질 좋은 바람이 풍력이라는 대안 에너지에 힘을 실은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토론에 가장 기여한 것은 덴마크의 정치다. 덴마크는 지금도 좌우 정당 간 의석수가 1석밖에 차이나지 않는다. 정책을 놓고 치열하게 토론한 뒤 결론이 나오면 인정하는 것이 전통이다. 이런 정치문화가 건강한 원전·탈원전 논의를 가능하게 했다. 그리고 탈원전 법안을 통과시킨 이듬해 체르노빌 사고로 전 유럽이 공포에 떨고 있을 때 덴마크 사람들은 “원전을 짓지 않기로 한 우리 결정이 옳았다”며 안도했다. 그리고 지난 40년 동안 기존 3개의 원자로를 차례로 닫았다. 원전 셧다운을 실현하면서 전기에너지의 70%를 풍력으로 대체한 최고의 친환경 에너지 국가로의 변신을 완성했다.
현 정부의 정책대로 간다고 해도 완전한 탈원전에 이르는 데는 60년이 걸린다. 원전 정책을 놓고 토론할 60년이라는 시간을 받아놓은 것이다. 미래를 전망할 근거가 부족하면 사실에 입각해 사고하는 게 과학하는 자세다. 원전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억지 주장이 합리적 토론을 방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자유한국당도 탈원전 비판에 올인할 게 아니라 향후 원전 공약을 고민해야 한다. 탈원전을 주장하는 쪽도 더 유연해질 필요가 있다. 탄소를 덜 배출하는 에너지원으로서의 원전의 효용도 무시할 것만은 아니다. 빌 게이츠가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에도 신원전 프로젝트를 계속 추진하는 이유를 주목해야 한다. 50년 전 덴마크에서 일어난 일이 우리에겐 불가능한 것인가.
이중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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