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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8 (토)

[김광일의 입] ‘검은머리 외신’ ‘매국노’ 비난... 누가 ‘매국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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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룸버그 통신 기자에 대한 ‘검은머리 외신기자’ 비하 논란, 그리고 ‘매국노’ 비난 논란, 제대로 한번 따져볼 때가 됐다. 과연 누가 인종차별주의자이고, 누가 매국노인가. 사건의 발단부터 보자.
국회 연설에서 나경원 한국당 원내대표가 12일 "대한민국 대통령이 ‘김정은 수석 대변인’이라는 낮 뜨거운 이야기를 듣지 않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처음에 민주당은 나 대표에게 집중 포화를 퍼부었다. 이해찬 민주당 대표는 ‘국가원수 모독죄’라는 실정법에 있지도 않은 죄명을 들먹였다.
그러다 ‘김정은 수석 대변인’이란 표현이 작년 9월 블룸버그 통신 제목인 것으로 드러나자 민주당은 방향을 바꿨다. 13일 민주당 대변인은 성명에서 "미국 국적 통신사의 외피를 쓰고 국가원수를 모욕한 매국에 가까운 내용이라 당시에도 적잖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고 했다.
하태경 바른미래당 최고위원은 17일 이렇게 말했다.
-"민주당은 문재인 정권을 ‘문두환’ 정권으로 만들려고 작정한 것이다."
-"문명국가가 아니라 야만독재 시대에나 있는 일이다."
-"블룸버그 통신사의 결정으로 그 최종 책임은 통신사지 기자 개인이 아니다."
-"히틀러 시대 때나 있을 법한 야만적인 국수주의다."
네이버 위키백과에서 ‘매국노’를 찾아봤다. 이렇게 돼 있다. ‘한국에서는 일제 강점기에 일제에 동조하는 행위를 저지른 자들은 친일반민족 행위자 목록에 게재되며 친일파로 불리며 경멸되고 있다.’
그렇다. 지금 민주당이 말하는 "매국"이라는 표현에는 ‘친일반민족’이라는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우리 역사에서 ‘매국노’란 표현을 가장 적나라하게 썼던 사례가 ‘친일 매국노’다. 한 외신 보도를 ‘매국’이라고 비난할 때, 이것은 ‘일제 청산’이라는 현 정권의 드라이브와 그 뿌리 정신이 맞물려 있는 것이다.

‘아시안 아메리카 기자협회(AAJA)’란 기구가 있다. 미국과 아시아 전역에 회원이 1500명이 넘는다. 이 협회는 19일 성명을 냈다.
"기자 개인에게 가해지는 인신 공격적 비판" "신변의 위협까지 받는 상황"이라고 했다. 특히 이 협회는 민주당 논평에 등장한 ‘검은 머리 외신기자’라는 표현을 중대한 ‘인종차별’이라고 규정했다. 이렇다. "한국인 기자가 외국 언론사 소속으로 취재활동을 하는 것이 비정상적이라는 함의가 담겨 있다."

민주당 대변인은 19일 한발 물러섰다. ‘매국에 가까운 내용’이라고 했던 것에 대해 "적절한 것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반성의 여지가 있다고 본다."는 것이다. ‘반성’이면 ‘반성한다’고 할 것이지, ‘여지가 있다고 본다’는 식으로 끝을 비튼다. 용변 보고 뒤 안 닦는 것처럼 토를 단다. 남 얘기하듯 유체이탈 표현이다.
‘검은머리 외신기자’에 대해서는 "온라인에서 네티즌들이 사용하는 용어를 차용한 것"이라면서 느닷없이 네티즌 핑계를 댔다. "다분히 ‘정치적인 용어’"라면서 "인종적인 편견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적절했는지 성찰하겠다"고 했다. 1500명 아시아 아메리칸 기자들이 ‘검은머리 외신기자’을 ‘인종 편견’이라고 하는데, 민주당은 "상관없다"고 한다.

이미 항의 성명을 냈던 서울외신기자클럽(SFCC)은 정부 입장을 묻고 있다. 청와대는 묵살하고 있다. 라디오 프랑스 인터내셔널 소속 프레드릭 오자르디아스 기자가 17일 청와대와 외신기자의 소통 창구인 단체채팅방을 통해 다시 물었다. "청와대 입장은 무엇이냐." 입장 표명 요구를 묵살하는 것은 적절한 대응이 아니다."

지금까지 10명이 넘는 기사들이 단톡방을 통해 청와대 입장을 묻고 있지만 청와대 측은 대통령의 공식 일정에 대한 설명만 되풀이하고 있다고 한다. 서울외신기자클럽은 청와대가 답변을 거부할 경우 각국 대사관에 ‘언론자유·인권 침해 보고서’를 제출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청와대와 현 정권은 국제 사회에서 언론자유 침해, 인권 침해가 얼마나 중대한 사안인지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한 외신기자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10개국 이상에서 취재했지만 여당이 기자 개인을 상대로 인종차별적 논평을 낸 것은 (한국이) 처음이고, 중대한 인종차별 문제에 정부가 침묵하는 것 또한 처음이다."

자 이제 묻는다. 결과적으로 블룸버그 통신기자가 매국 행위를 한 것인가. 여당 대변인이 매국 행위를 한 것인가.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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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김광일 논설위원이 단독으로 진행하는 유튜브 ‘김광일의 입’, 상단 화면을 눌러 감상하십시오.

[김광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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