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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1 (화)

[왜냐면] 쉽지 않은 여정, 통일로 가는 길목에서 / 전경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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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전경원
전교조 참교육연구소장·문학박사


1970년 3월18일 저녁 8시. 독일 통일을 위한 첫 정상회담을 하루 앞두고 서독의 본에서 빌리 브란트 총리를 태운 기차가 동독을 향해 출발했다. 이튿날 오전 9시30분. 기차는 동독 에르푸르트 중앙역에 도착했다. 역에서는 동독 총리 빌리 슈토프가 기다리고 있었다. 둘은 회담 장소 에르푸르트호텔로 이동했다. 브란트가 호텔에 도착하자 독일 시민들이 호텔로 몰려왔다. 그들은 ‘빌리’를 외쳤다. 처음엔 브란트도 동독 시민들이 자신들의 지도자인 빌리 슈토프를 연호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들이 환호한 것은 동독 지도자 빌리 슈토프가 아닌 서독 지도자 빌리 브란트였다. 이때 빌리 브란트는 환호에 한 손을 들어 미소로 응답했다. 동시에 군중에게 두 손을 낮게 펼치며 자제를 요청하는 몸동작을 취했다. 동독에 거주하던 주민들에 대한 깊은 배려였다. 실제로 첫 정상회담이 끝난 뒤 동독의 슈토프는 어떻게 군중이 경찰 방어선을 뚫고 호텔 입구까지 찾아와 ‘빌리’를 외쳤는지 책임을 추궁했다.

같은 해 5월21일. 두번째 정상회담이 서독 국경도시 카셀에서 열렸다. 그런데 동독의 슈토프 총리가 카셀역에 도착하자 시위대가 구호를 외쳤다. 게다가 기차역에서 회담장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불행한 사고가 발생했다. 군중 속 한 사람이 경찰 통제선을 뚫고 나와 동독 총리가 탄 차량을 향해 소형 폭발물 두개를 던졌다. 다행히 차량은 손상을 입지 않고 도로를 그대로 질주해 벗어났다. 설상가상으로 회담장에선 서독 극우단체 청년들이 취재 허가증을 위조해 회담장에 진입했다. 이들은 회담장에 걸려 있던 동독 국기를 끌어 내려 심하게 훼손했다. 회담장 밖에선 극우단체와 공산당 계열 시위대가 서로 격렬하게 충돌했다. 결국 회담은 합의에 이르지 못했고 양국에 상처만 남겼다.

‘현상을 변화시키기 위한 현상의 인정’이라는 개념을 놓고도 서독 내부에서 첨예한 갈등과 논쟁이 재연됐다. 브란트는 “한 걸음도 나아가지 않는 것보다 작은 발걸음이라도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낫다”고 대응했다. 동시에 “통일이 아니라 현재 가능한 것부터 실천해가는 원칙”을 언급했다. 그들은 내부갈등과 분열을 겪으면서도 결국 오롯이 통일된 국가를 이루어냈다.

2018년 9월19일 저녁. 문재인 대통령은 15만명 수용이 가능한 평양 5·1경기장에서 북한 주민을 대상으로 연설했다. “우리 민족의 운명은 우리 스스로 결정한다는 민족 자주의 원칙을 확인했습니다.” “어려운 시절에도 민족의 자존심을 지키며 끝끝내 스스로 일어서고자 하는 불굴의 용기를 보았습니다.” “평양 시민 여러분, 동포 여러분. 우리 민족은 우수합니다. 우리 민족은 강인합니다. 우리 민족은 평화를 사랑합니다. 그리고 우리 민족은 함께 살아야 합니다.” 매우 사려 깊은 연설이었다. 북한에 대한 배려와 존중을 느낄 수 있었다. 이날 연설에서 15만 평양 시민들은 총 13회에 걸쳐 문재인 대통령의 연설 내용에 박수와 환호로 화답했다.

싱가포르와 베트남 하노이에서 두차례에 걸친 북-미 정상회담이 열렸다. 하지만 만족할 만한 수준의 합의 결과를 도출하진 못했다. 그런 이유로 평화 통일과 민족 번영을 위한 남북의 노력이 다시 시험대에 올랐다. 독일 사례에서 확인되듯 통일은 쉽지 않은 여정이 될 것이다. 우리 사회도 독일과 같은 내적 갈등을 이미 경험하고 있다. 그러나 이 고통은 통일로 가는 길목에서 발생하고 겪을 수밖에 없는 필연적 고통이다. 그렇기에 슬기롭게 대처하고 극복해나가야 한다. 싱가포르와 베트남 하노이를 거친 우리의 여정이 이제는 서울과 판문점 그리고 평양에서 열매 맺기를 간절히 기대해본다. 그 중심에는 ‘남’과 ‘북’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의 역할이 어느 때보다 절실하고 중요한 시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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