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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1 (화)

[이재승의 이코노믹스] 출구 보이지 않는 혼돈 향해 영국은 ‘헛소동’ 벌이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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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연합 정체성과 맨얼굴 드러내

영국인, 국익·글로벌화 사이 고뇌

바다·대륙 사이에서 끝없이 갈등

기업·국제기구 이탈로 침체 불가피

브렉시트가 연 판도라의 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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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렉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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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유럽과 함께 하지만, 유럽에 소속되어 있지는 않다.”

윈스턴 처칠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과 연합국을 지켜내고, 유럽의 평화와 안보의 기틀을 제공한 공로로 유럽 통합의 창시자 중 한 명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처칠이 생각한 유럽의 통합은 ‘유럽합중국(United States of Europe)’이었고, 영국은 이를 이끄는 주체가 돼야 했다. 2차 대전 종전 후에도 영국은 석탄철강공동체로 시작된 유럽통합에 바로 참여하지 않았다.1973년에 뒤늦게 유럽공동체의 일원이 되었다. 초기부터 영국의 정치·경제적 이해관계는 유럽 대륙과 차이가 있었고 북해 석유·가스전 개발 역시 다른 회원국과는 다른 입장을 취했다. 영국은 유럽연합(EU) 내에서도 늘 예외 규정과 예산 환급을 주장하는 껄끄러운 회원국이었다.

2010년 40대에 총리에 오른 데이비드 캐머런은 2015년 총선에서 승리할 경우 영국의 EU 잔류를 국민투표에 회부하겠다는 공약을 내걸었다. EU와의 경제적 연계 때문에 결국 잔류할 것으로 예상됐지만, 국민투표는 예측할 수 없는 결과를 낳았다. 캐머런의 정치적 도박은 브렉시트(Brexit, 영국의 EU 탈퇴)라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게 했고, 영국의 정체성과 경제·정치의 맨얼굴을 드러내게 했다. 탈퇴 시한은 일단 6월30일까지 연장됐지만 앞날은 여전히 미궁 속이다.

“영국은 유럽인가?”에 대한 정체성의 질문은 오랫동안 제기돼 왔다. “노! 노! 노!” 1990년 10월 30일, 보수당을 상징하는 푸른색 정장을 입고 나온 마거릿 대처 총리는 하원 연설에서 쟈크 들로르 유럽집행위원장이 제시한 초국가적인 유럽연합 심화 방안에 대해 노골적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이 세 마디의 짧은 부정은 커다란 정치적 파장을 불러일으켰고 다음 달 대처는 11년 반 동안 머물렀던 다우닝 스트리트를 떠나게 됐다.

유럽회의론은 이후 영국 정치에서 한 발 물러서게 됐고, 영국은 점차 유럽대륙과 긴밀하게 엮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대처의 메아리는 반유럽 뿐만 아니라 반이민의 기치를 들고 2016년 다시 등장했다. “미쳤거나, 악당이거나 아니면 천재”라는 수사를 달고 등장한 선거전문가 도미니크 커밍스는 “통제권을 되찾아오자”는 구호로 브렉시트 캠페인을 승리로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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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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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렉시트에 따르는 경제적 위험성은 이미 시장에 상당 부분 반영돼 왔다. 영국은 국내총생산(GDP) 기준으로 세계 5위의 경제대국으로 전 세계 경제의 3.5%를 차지하고 있다. 금융을 비롯해 항공·의약 산업 등에서 글로벌 경쟁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석유·가스 생산이 경제의 큰 축을 이뤄왔다. 영국은 이미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 탈퇴를 통한 경제적 조정을 경험했다. 파운드화는 1990년 10월 유로화의 전신이던 유럽통화제도(EMS)에 가입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국제통화시장에서 공격의 대상이 되기 시작했고, 92년 9월 16일 ‘검은 수요일’을 뒤로 하고 유럽통화통합을 떠났다. 우려했던 파운드화의 약세와 영국 경제로의 부정적 파급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수그러들며 회복세를 보였다. 금융위기의 여파를 겪기는 했지만 2000년대 이후 런던은 부와 금융의 중심지로 또 한 번의 전성기를 누렸다.

이런 경험에 비춰 보면 앞으로 브렉시트가 진행되더라도 경기 둔화는 불가피하겠지만 영국 경제의 중장기적 펀더멘탈은 크게 흔들리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브렉시트 초반에 우려됐던 탈퇴 배상금도 비교적 원활히 조율됐다. 그러나 영국에서 대륙으로 이전하는 국제기구와 주요 기업들이 늘고 있고, 파운드화는 여전히 불안한 흐름을 보이고 있다. 합의문 없는 ‘노딜(No Deal) 브렉시트’에 대한 불안감은 상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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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 총리. [EPA=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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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렉시트는 완벽히 준비된 프로젝트가 아니었다. 이는 40여 년 간의 미지근한 유럽통합에의 참여와 캐머런의 정치적 도박, 그리고 때 마침 부각된 난민위기가 만들어 낸 완벽한 폭풍이자 역사적 우연이었다.브렉시트는 단순히 유럽에 대한 선호를 넘어서 도시와 지방, 화이트 칼러와 블루 칼러, 친이민과 반이민 진영에 이르기까지 복합적 대립 구도를 반영한다.

산지에서는 70%에 가까운 탈퇴 지지가 나왔고, 중소도시에서도 예상이 뒤집혔다. 브렉시트의 초기 논의에서 크게 부각되지 않았던 북아일랜드 문제가 핵심적 의제로 부상했고, 결국 꼬리가 몸통을 흔들게 됐다. 엘리트들은, 그리고 런던은 늘 이긴다는 고정관념이 붕괴되고 말았다.

브렉시트는 이런 혼란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수순을 밟고 있다. 브렉시트의 정치에는 영국과 영국인의 이익, 소속 정당과 집행부의 정치적 미래가 복합적으로 반영돼 있다. 브렉시트는 시간과의 싸움이기도 하다. 탈퇴 시한 뿐만 아니라 5월 말 유럽의회 선거, 향후 EU 집행진 선출을 앞두고 조속한 결정의 압력을 받고 있다. 영국은 출구가 보이지 않는 혼돈을 향해 질서정연한 행군을 하고 있다.

설령 영국이 잔류로 선회한다고 해도 유럽의 심화된 통합에 기여할 것이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돌아온 영국의 강력한 리더십 행사도 난망하다. 셰익스피어의 표현을 빌리면 ‘한 발은 바다에, 다른 한 발은 육지에’ 두면서 유럽의 일원이 돼 온 영국이 지금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최선이 아니라 차악일 수 있다. 처칠이라면 이 시간을 이렇게 묻는다. “가장 어두운 시간(the darkest hour)”인가, 아니면 역사에 기억될 “최고의 시간(the finest hour)” 인가. 이 말을 들은 셰익스피어가 넌지시 내뱉는다. “헛소동(Much ado about nothing).” 결정의 시간은 다가오고 있다.

브렉시트와 세계화, 그리고 한국의 선택
브렉시트는 EU 회원국 지위에 대한 결정을 넘어서 반엘리트주의·민족주의·포퓰리즘에 이르는 다양한 문제를 제기했다. 엘리트-세계화-유럽통합으로 이어지는 등식과 신자유주의 국제질서는 위기를 맞고 있다. 세계화와 민족주의의 충돌은 전세계적으로 확대되고 있다. 국가경제 관리의 자율성은 시대적 담론의 주제가 되었다.

그러나 브렉시트를 반세계화로 곧바로 연결시키는 것은 단순화의 오류를 가져올 수 있다. 브렉시트에는 기존 정치엘리트와 체제에 대한 분노를 넘어서 문화적·사회적 보수주의, 영국 중심주의 같은 다양한 요소들이 반영돼 있다. 영국은 여전히 EU가 제공하는 다양한 제도의 혜택을 원하고, 개방 경제의 수혜자로 남고 싶어한다.

결국 국익과 글로벌 경제 간 균형점을 찾는 것은 그 사회의 제도와 정치를 반영한다. 브렉시트에서 보듯이 해결책은 엘리트의 시각에서만 볼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목소리를 반영해야 한다. 그러나 새로운 합의점을 만들어 나가는 방식은 실용적이어야 한다. 밖으로의 눈과 손을 놓지 말아야 한다. 담론과 이념 중심의 세계화는 지나가고 있다. 신자유주의나 반세계화 모두 경계의 대상이 돼야 한다.



이재승 고려대 국제학부 장 모네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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