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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4 (금)

[이영완의 사이언스 카페] 문어도 惡夢을 꾸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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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부색 바꿔 天敵 속이는 문어… 꿈꾸는지 잠잘 때도 같은 행동

문어 뇌에서 렘수면 신호 포착

미국 작가 필립 K 딕이 1968년 발표한 '안드로이드는 전기 양(electric sheep)의 꿈을 꾸는가?'는 과학소설의 고전(古典)이다. 나중에 할리우드에서 '블레이드 러너'라는 이름으로 영화화됐다. 소설 주인공은 핵전쟁으로 황폐해진 미래 지구에서 탈주한 안드로이드를 잡는 현상금 사냥꾼이다. 안드로이드는 폐기 명령을 피해 도망친 생체 로봇 노예로 겉모습은 물론 생각까지 사람과 구분하기 힘들 정도이다. 과연 인간과 로봇을 구분하는 본질적인 가치는 무엇일까.

소설에서 핵전쟁의 생존자들은 살아 있는 동물을 키우는 것을 인간적인 가치를 입증하는 행위로 여긴다. 주인공의 유일한 소원도 전기 양 대신 살아 있는 동물을 한 마리 키우는 것이다. 작가는 묻는다. 그렇다면 인간과 구분하기 힘들 정도인 안드로이드는 전기 양의 꿈을 꿀까, 아니면 주인공처럼 살아 있는 양을 꿈꿀까.

최근 소셜미디어에서 필립 딕의 소설을 떠올리게 하는 동영상이 화제가 됐다. 미국 콜로라도주(州)의 한 동물원 수족관에서 문어가 잠자는 모습을 찍은 동영상이다. 문어는 규칙적인 호흡을 하며 편히 잠자고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피부색이 흰색에서 검은색으로, 다시 흰색으로 계속 바뀌었다. 문어는 평소 천적의 눈을 피하기 위해 주변 환경에 따라 피부색을 바꾼다. 동영상 속 문어도 혹시 물개 같은 천적을 만나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닐까.

꿈은 안구(眼球)가 아주 빨리 움직이는 '렘(REM·급속 안구 운동)' 수면 상태에서 발생한다. 이때 몸은 팔다리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마비시키는 호르몬을 분비한다. 덕분에 절벽에서 뛰어내리고 하늘을 나는 꿈을 꿔도 몸이 다치지 않는다. 1959년 프랑스 과학자인 미셸 주베는 독창적인 실험을 통해 처음으로 동물도 사람처럼 꿈을 꾼다는 주장을 펼쳤다. 그는 고양이의 뇌에서 렘수면 동안 몸을 마비시키는 기능을 차단했다. 그러자 고양이는 잠을 자면서 뭔가 바라보듯 고개를 돌리고 적을 마주한 것처럼 허리를 동그랗게 세우고 발을 휘저었다. 렘수면 상태에서 꿈을 꾸고 있음을 행동으로 입증한 것이다.

조선일보

/일러스트=이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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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 연구에서도 동물이 꿈을 꾼다는 증거가 나왔다. 영국의 뇌과학자 존 오키프 박사는 사람의 뇌에 특정 장소에 대한 기억을 관장하는 세포가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는 이 연구로 2014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다. 영국 유니버시티칼리지런던(UCL)의 휴고 스피어스 교수는 2015년 쥐의 뇌에서도 장소 세포가 작동하는 증거를 찾았다. 연구진은 쥐에게 먹이를 찾는 실험을 시킨 다음 잠을 잘 때 뇌 활동을 관찰했다. 그러자 렘수면 상태에서 사람의 뇌에 있는 장소 세포와 같은 부위가 활발하게 작동했다.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연구진도 앞서 쥐가 미로(迷路) 탈출 실험을 하는 동안 나타나는 뇌 신호 형태가 렘수면 상태에서 반복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동물이 꿈을 꾼다는 결정적인 증거는 동물 자신이 직접 제시했다. 지난 2018년 세상을 떠난 암컷 고릴라 코코는 생전 수화(手話)로 마치 꿈을 설명하듯 실제 경험하지 않은 환상적인 일이나 사람, 장소를 자주 표현했다. 코코의 짝이었던 수컷 마이클은 어릴 때 밀렵꾼에게 가족을 잃었다. 마이클 역시 종종 잠에서 깨자마자 수화로 "나쁜 사람들이 고릴라를 죽인다"고 했다. 악몽(惡夢)을 꾼 것이다.

과학자들은 렘수면 동안 뇌가 낮에 경험한 일들을 장기 기억으로 정리하고, 노폐물을 청소하며 호르몬도 보충한다고 설명한다. 꿈이 기억과 뇌 발달에 필수적이라는 말이다. 실제로 한창 뇌가 자라는 유아기는 잠자는 시간의 대부분을 렘수면으로 보내지만, 성인은 그 비율이 20%로 줄어든다. 개나 고양이, 고릴라도 성장하면서 기억과 뇌가 발달한다는 점에서 꿈을 꾼다고 볼 수 있다.

문어는 무척추동물이지만 뇌만큼은 사람과 비슷하게 발달했다. 과학자들은 인간 외에 의식을 가진 존재로 무척추동물에서는 단연 문어를 꼽는다. 문어는 개와 비슷한 5억개 정도의 신경세포를 갖고 있다. 포유동물과 달리 대부분 온몸에 퍼져 다리 움직임과 시각 정보 처리에 쓰이지만 일부는 사람의 뇌처럼 보호막에 싸인 채 모여 있다. 여기서 인간의 뇌에서 기억과 학습을 담당하는 해마와 유사한 신경조직이 발견됐다. 문어도 꿈을 꿀 능력을 갖춘 셈이다.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연구진은 2012년 국제학술지 '플로스 원'에 문어와 갑오징어 같은 두족류 연체동물은 잠을 자는 동안 몸 색깔이 변할 때 인간의 렘수면 상태와 같은 신경 신호가 나타난다고 밝혔다. 문어는 어떤 꿈을 꿀까. 필립 딕의 소설에서라면 수중(水中) 양의 꿈을 꾸는 것은 아닐까.

[이영완 논설위원 겸 과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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