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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87살 마약운반책의 마지막 임무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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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한동원의 영화감별사

<라스트 미션>

마약운반범 노인 실화에 바탕

가족에게 외면당하고, 가난하고

인터넷시대 거부하는 참전용사

‘클린트 이스트우드표’ 주인공

영화의 최종 목적지는 결국 가족

인위적인 느낌 지우기 힘들지만

이스트우드 팬들에겐 충분한 영화

뭔가 보여주려 용쓰지 않는 멋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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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부터 대뜸 연세를 거론하는 것은 무척 실례되는 일이겠다만, 그럼에도 이 정도는 흔치 않은 사안인지라 거론하자면, <라스트 미션>은 거의 90살에 육박하는 고령인 1930년생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22번째 주연 연출작이다. 또한 <그랜 토리노> 이후 10년 만의 주연 연출작이기도 하다.

그런 만큼 국내 개봉용 제목인 ‘라스트 미션’은 충분히 ‘엇,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마지막 영화?’라는 오해를 충분히 불러일으킬 수 있겠다만, 우리는 이 영화의 원제가 마약운반책을 뜻하는 ‘더 뮬’(The Mule)임을 잘 알고 있는지라 그러한 오해는 능히 피할 수 있다. 그럼에도 연세와 관련된 이슈는 계속해서 남는다. ‘이제 곧 89살이 될 배우가 꽤 터프한 액션물에서나 등장할 것 같은 마약운반책 역할을?’ 같은.

그렇다. ‘고령’은 <라스트 미션>의 중심에 있다. 그런데 이 영화의 ‘고령’은 그리 평온한 고령은 아니다. <라스트 미션>에서 고령은 말하자면 스웨덴 영화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풍의 상당히 다이내믹한 고령이다.

고집불통이지만 ‘꼰대’는 아닌

이 영화의 원재료는 600㎏이 넘는 마약을 트럭에 싣고 가다가 체포된 레오 샤프라는 87살 노인의 이야기를 다룬 <뉴욕 타임즈 매거진>의 2014년 기사다.

단연 주목되는 것은 마약운반범의 나이다. 미국 마약단속국의 단속기록상 최고령으로 알려진 이 마약운반범은 지금의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거의 비슷한 나이에 현행범으로 체포되었다. 바로 이 점이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2000년 작 <스페이스 카우보이>(또는 1992년 작 <용서받지 못한 자>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겠다) 이래로 줄곧 다뤄온 테마 중 하나인 늙는다는 것, 그리고 그것과 함께 오는 것들, 즉 회한, 고집, 여유, 귀여움, 슬픔 등을 다루기 위한 훌륭한 조건이 되어줌은 두말할 나위도 없겠다. 더욱이 이 이야기로는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연출뿐 아니라 주연까지 맡을 수 있다. 그리하여 <그랜 토리노>의 작가 닉 쉥크가 시나리오를 집필한 이 영화의 주인공 ‘얼 스톤’(클린트 이스트우드)에는, 지금껏 익히 보아온 클린트 이스트우드표 노인 캐릭터의 특징들이 두루 집대성되어 있다.

백합 전문 원예사로서 젊은 시절에 가족을 두고 떠돌아다녔던 얼 스톤은 지금은 가족들한테서 거의 버림받았고 딸은 그와 말을 섞으려 하지도 않는다.(<밀리언 달러 베이비>, <그랜 토리노>) 또한 그는 “인터넷? 그딴 게 왜 필요해?”로 시작해 전자상거래에 밀려 꽃농장과 집을 압류당하면서 “인터넷이 싹 다 망쳐놨네”로 끝나는 정보기술 거부반응자 내지는 혐오자이며(<스페이스 카우보이>, <그랜 토리노>), 동시에 아들 뻘의 깡패들이 들이대는 총을 밀쳐내며 “그딴 걸로 안 쫄아”라고 말하는 참전용사다.(<그랜 토리노>와 주인공들이 군인이거나 군인이었던 <스페이스 카우보이>, <아버지의 깃발>, <아메리칸 스나이퍼>, <설리>) 게다가 영어로도 모자라 스페인어로까지 “재수 없는 인간”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고집불통에 까칠한 성격의 소유자이지만, 그래도 근본에서는 따뜻하고 인간적인 사람이다.

무엇보다도 얼 스톤은 앞선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노인 캐릭터들이 그랬듯이, 자기원칙과 판단만 옳다고 믿으며 그것을 주위에 설교하고 강요해대는 자(=꼰대)가 아니다. 물론 그는 음담패설을 가사 삼는 노래를 좋아라 따라 부르고, 부끄러움 없이 성매매를 하는 등, 요즘 시대에서는 거의 사회적 콘크리트 더미에 매장되고도 남음이 있을 행위들을 서슴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길에서 마주친 레즈비언(이른바 ‘다이크’) 오토바이족을 마주쳤을 때 찡그리거나 피하는 대신, 그들에게 윙크를 날려주는 융통성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오히려 얼 스톤보다 훨씬 더 꼰대스러운 캐릭터는, 그를 밀착감시 하기 위해 멕시코 카르텔 본가에서 파견된 새파란 조직원 ‘훌리오’(이그나시오 세리치오)다. 그는 자신의 높은 서열과 총을 앞세워 꼰대 행위를 일삼는데(전형적인 청년 꼰대), 그런 그의 나사를 스리슬슬 노련하게 풀어주는 얼 스톤의 모습에서는 클린트 이스트우드표 노인 캐릭터들의 디엔에이(DNA)가 그대로 보인다.

그런 장면들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가 물건 배달 중에 마주친 흑인 가족과의 짤막한 에피소드다. 타이어가 펑크 났지만 핸드폰 신호가 터지지 않는 관계로 타이어 교체법을 검색하지 못해 쩔쩔매고 있는 그들에게 얼 스톤은, 때는 이 때다, “요즘 사람들은 이게 문제야. 인터넷 없이는…” 운운을 날려준 뒤 그들을 흔쾌히 도와준다. 그러면서 “검둥이(negro)들도 돕고, 좋네”라는 대단히 부적절한 언사를, 그야말로 무신경과 무지의 발로에서 날리는데, 이에 대한 이 흑인 부부의 적절하고도 똑똑한 대응, 그리고 얼 스톤의 반응은 ‘세대 갈등’에 대한 하나의 모범답안이라고 하면 너무 거창한가….아무튼 무척이나 풋풋하고 훈훈한 것이었다.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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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가져다주는 여유

그런데.

단연 독보적인 연령의 마약운반범이라는 특이함, 그리고 유쾌하고 정감이 가는(하지만 이전 영화들이 주는 기시감으로 가득한) 노인 캐릭터만으로 영화 한편을 끌고나가기엔 무리가 따른다는 것은 자명한 일. 하여 영화는 이 실화의 리포트 기사를 쓴 작가(샘 돌닉)가 취재 내내 품었던 질문, 하지만 끝내 속시원한 해답을 얻지 못했던 질문인 ‘이 양반은 대체 왜 그런 짓을 했는가’에 주목한다. 그리고 그에 대한 영화 나름의 답을, ‘고령’과 나란히 또 다른 중심축으로 놓는다.

<라스트 미션>이 내놓는 답은 바로 ‘가족’이다. (이 ‘가족’에 해당되는 부분은 이 영화의 픽션 대부분을 차지한다.) 얼 스톤은 처음에는 ‘범죄수익’으로 자기 자신을 챙긴다. 집과 농장의 압류를 풀고, 트럭을 신차로 바꾸고 등등. 그리고 그 다음에 그가 챙기는 것은 ‘제2의 가족’쯤 되는 참전용사들이다. 마약 배달 수고비를 불이 난 참전용사회관 수리비로 기탁하는 등등. 이쯤에서 관객들은 마약배달판 로빈훗을 상상하게 되지만, 영화의 최종 목적지는 결국 가족이다.

앞서도 잠깐 말했듯 얼 스톤은 가족들로부터 거의 버림받다시피 했고, 나이 들고 곤경에 처한 뒤에야 가족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아보려 애쓴다. 잘 될 리 없다. 꽃에 왜 그리 돈과 시간을 들였냐는 전 부인(다이앤 위스트)의 질문에 “아름답고 특별하잖아. 하루 만에 만개했다가 순식간에 져 버리고”라는 대답을 했다가 “가족도 마찬가지야”라는 말과 함께 면전에서 퇴짜를 맞을 뿐.

하여, 그는 마약 배달로 번 돈으로 손녀의 학비를 대는 등 가족들에게 도움이 될 이런저런 일들을 한다. 하지만 영화는 이런 그의 모습을 드러내놓고 보여주지 않는다. 그저 슬쩍슬쩍 ‘관계가 점차 회복되고 있음’을 확인시켜주는 정도다. 왜 아니겠는가. ‘잃어버렸던 가족도 돈이면 살 수 있다’라는 결론에 봉착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더구나 그 돈은 마약 배달 수고비다) 대신 영화는, 후반부 최고 갈등 상황의 중심에 가족을 놓는다. 그리고 이 설정을 통해 ‘87살 마약운반범’이라는 희귀한 실화 위에 자신만의 테마를 얹어놓는다.

사실 그러한 흐름은, 얼 스톤이 가족들로부터 외면당하는 장면이 등장하는 도입부부터 예상되었던 것이었다. 그 예정된 목적지, 즉 얼 스톤이 가족과 일(사실은 목숨)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갈등 상황까지 이야기를 끌고 가기 위해, 영화는 공들여 포석을 깔아간다. 하지만 그럼에도 ‘예정된 목적지’의 인위적 색채는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다. 작가 닉 쉥크의 유머 감각과,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다이앤 위스트라는 두 배우의 존재에 더해,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친딸(앨리슨 이스트우드)이 아버지를 외면하는 딸의 역할로 캐스팅되기까지 했는데도 말이다.

더욱 아쉬운 대목은 브래들리 쿠퍼, 로렌스 피쉬번, 마이클 페냐 같은 쟁쟁한 캐스팅에도, 주인공을 추적하는 마약단속국 사람들 쪽의 이야기가 상당히 뻣뻣하게 겉돌고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퍼펙트 월드>(1993)에서 탈옥수 주인공을 추적하던 경찰 추적팀 쪽의 인물들이 영화 전체와 맞물리며 냈던 에너지를 기억한다면, 이 영화의 마약단속국 쪽의 에피소드가 남기는 아쉬움은 더 크게 느껴진다.

그럼에도 <라스트 미션>은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팬들에게는 충분한 영화다. 무엇보다 이 영화엔 뭔가를 보여주려 아등바등 용쓰지 않는 멋이 있다. “오래 사셔서 말조심 하지 않아도 되는 분들”만의 유머와 자연스러운 위안이 있다. 만일 나이가 이런 여유를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라면 나이 먹는 일도 그다지 나쁜 일만은 아니겠다는 생각이 든다. 걸작이든 아니든 그의 영화를 한편이라도 더 보고 싶은 팬으로서, 그의 연세 드심은 분명 반갑지만은 않은 일이긴 하지만.

한동원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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