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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8 (수)

'노딜' 하노이 핵담판…"미국, 북한에 공 넘겼다" [박수찬의 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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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보

북한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의 분수령이 될 것으로 기대를 모았던 ‘하노이 담판’은 결렬로 끝났다. 빅딜도 스몰딜도 없는 ‘노딜’이었다.

제재 완화를 주장하는 북한과 영변 핵시설 외에 제3의 핵시설까지 비핵화 대상에 포함하려는 미국간의 시각 차는 양국 최고지도자의 결단으로도 좁혀지지 않았다. 북한 핵개발의 상징인 영변 핵시설에 대한 가치 판단도 크게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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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북미 정상회담이 결렬된 28일 베트남 하노이 메트로폴 호텔에 마련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오찬장이 텅 비어있다. AFP 연합뉴스


북미 양측이 수차례 실무협의를 거치며 준비했던 2차 정상회담이 결렬됨에 따라 북한 비핵화 논의는 당분간 ‘올스톱’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대화를 포기하는 것은 정치적 부담이 크다는 점에서 군사적 긴장이 고조될 확률은 낮지만. 양측 모두 새로운 협상 전략을 수립하면서 전열을 재정비할 시간이 필요하다. 냉각기가 불가피한 대목이다.

2차 회담이 결렬되면서 공은 북한에 넘어갔다는 평가가 나온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달 28일 회담 결렬 직후 기자회견에서 “서두르기보다는 올바른 결정을 내리는게 중요하다”고 말했고,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준비가 돼 있지 않았다.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북한을 압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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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1일 유럽 에어버스 위성이 촬영한 영변 핵시설. 최근 눈에 띄는 활동은 포착되지 않고 있다. AFP 연합뉴스


◆‘영변 핵시설 폐기→제재 완화’ 작동하지 않은 이유

리용호 북한 외무상과 최선희 외무성 부상은 1일 기자회견을 갖고 “미국이 유엔 제재의 일부인 민수경제와 인민생활에 지장을 주는 항목의 제재를 해제하면, 영변 핵의 플루토늄과 우라늄을 포함한 모든 핵물질 생산시설을 미국 전문가들의 입회하에 두 나라 기술자들의 공동의 작업으로 영구적으로 완전히 폐기하겠다고 제안했다”며 “하지만 미국은 영변 외에 한 가지를 더 해야 한다고 끝까지 주장했으며, 미국이 우리의 제안을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 명백해졌다”고 밝혔다.

이는 북한이 미국의 의중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을 방증한다. 회담 1주일 전 미 행정부 고위 당국자는 미국의 목표는 최대한 높은 수준의 핵동결이라고 밝힌 바 있다. 변 밖에서 가동되고 있는 플루토늄이나 고농축우라늄(HEU) 공장은 물론 핵탄두 운반체인 탄도미사일과 대량파괴무기(WMD) 포기까지 거론했다. ‘플러스 알파’의 범위를 넓혀 북한을 압박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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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리용호 외무상이 1일 새벽 북한 대표단 숙소인 베트남 하노이 멜리아호텔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전날 열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2차 정상회담이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결렬된 데 대한 입장 등을 밝히고 있다. 왼쪽은 최선희 외무성 부상. 연합뉴스


이같은 압박은 정보당국이 수집한 정보에 기반하고 있다. 정보 소식통은 “미국은 북한 지역을 말 그대로 스캔하면서 정보를 수집할 능력이 있다”고 전했다.

미국은 지난해 6월 1차 회담 전부터 북한 전역을 철저히 감시하며 방대한 정보를 수집해왔다. 이와 관련해 거론되는 기관이 미 국립지리정보국(NGA)이다. NGA는 스파이 위성 또는 드론을 통해 촬영된 수십억 장의 항공사진을 분석한다. 때로는 ARGUS-IS라고 불리는 초고해상도 카메라도 동원된다. 현존하는 최고 해상도인 18억 픽셀 카메라로 지상 6.5㎞ 상공에서 지속적인 감시가 가능하다. 100대의 프레데터 드론을 동시에 띄운 것처럼 중소도시를 한 번에 감시할 수 있다. 이를 통해 하루 100만 테라바이트(TB)의 촬영 정보가 축적된다.

하지만 북한은 미국의 정보능력을 영변 핵시설 폐기와 핵실험 및 장거리 로켓 발사 영구 중단 카드만 제시하며 제재 완화를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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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8일 베트남 하노이 JW메리어트 호텔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이 2차 북미 정상회담 결렬 배경을 기자들에게 설명하고 있다. 하노이=AFP연합뉴스


북한의 제안은 트럼프 대통령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북한이 해제를 요구한 유엔 제재는 2016~2017년에 채택된 5건이다. 이 가운데 2017년에 채택된 제재안은 북한이 각종 미사일을 계속 발사하는 등 도발을 멈추지 않자 트럼프 행정부가 주도해 만들어졌다. 결자해지(結者解之) 방식의 제재 완화를 원했다면, 트럼프 대통령에게 해제 명분을 줬어야 했다. 그것이 바로 ‘플러스 알파’였다. 미 정보당국이 파악한 제3의 핵시설과 일치하는 ‘플러스 알파’가 조금이라도 제시됐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영변 핵시설의 가치에 대해 미국이 높게 평가하지 않았거나 북한의 제안에 대한 신뢰 부족 가능성도 제기된다. 북한은 영변 핵시설 폐기만으로도 주요 제재를 무력화할 수 있다고 판단할 정도로 영변의 가치를 높게 매겼다. 하지만 영변은 미 정보당국의 면밀한 감시를 받고 있다. 추적이 가능한 요소는 위협대상이 아니다. 숨기기 쉽고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우라늄 농축시설이 진정한 위협이다. 북한은 과거 영변 핵시설의 가동을 중단하거나 불능화 조치를 하고도 재가동에 나선 전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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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오른쪽)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8일(현지시간) 베트남 하노이의 소피텔 레전드 메트로폴 호텔에서 단독 정상회담 도중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다.


◆북한의 딜레마 “판 깰 수 없어 vs 신뢰부족”

2차 회담이 결렬되면서 북미 간 비핵화 협상은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안개 국면’을 맞게 됐다. 트럼프 대통령은 “빨리 하기보다는 옳은 일을 하고 싶었다”며 ‘속도조절’을 거론했고, 리용호 북한 외무상은 “우리의 입장에는 변함이 없으며, 미국이 협상을 다시 제기해오는 경우에도 우리 방안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라며 추가 제안 가능성을 일축했다.

하지만 북한과 미국의 입장을 비교해보면, 북한으로서는 협상 과정에서 미국에 ‘플러스 알파’를 제시하는 ‘통 큰 양보’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게 일반적인 관측이다. 트럼프 행정부로서는 핵실험 및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시험발사 중단으로 미국 본토에 대한 북한의 군사적 위협은 크게 줄어들었다. 풍계리 핵실험장은 폭파되어 사용이 불가능하다. 매우 초보적인 수준의 핵동결이 진행된 상황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시간적 여유를 가질 수 있다. 대북 제재 해제 또는 완화를 미국이 당장 수용해야 할만큼 다급하지 않다.

북한은 미국의 태도 변화를 이끌어낼 지렛대가 마땅치 않다. 핵실험과 ICBM 시험발사를 재개하면 지금보다 더 강력한 제재에 직면한다. 미국과의 협상도 불가능해진다. ‘벼랑끝 전술’을 사용하려면 미국을 압박할 카드가 있어야 하나, 김 위원장에게는 그런 카드가 없다. 한국을 상대로 휴전선에서 국지도발을 감행하는, 북한의 전통적 전술도 사용할 수 없다. 남북 관계 개선에 적극적인 문재인정부와 맺은 9.19 남북 군사합의마저 깰 경우 북한은 고립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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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볼턴 미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지난달 27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베트남 국가주석의 회담에서 생각에 잠겨있다. AP통신


북한이 미 정보당국조차 파악하지 못한 제3의 핵시설에 대한 정보를 미국에 제공한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정보당국이 수집한 북한 내 핵시설 목록을 갖고 있는 트럼프 행정부는 북한의 핵신고 목록을 확보해 비교하면서 북한의 비핵화 의지를 확인하고 ‘완전한 비핵화’를 달성하려 하고 있다. 그런 미국에게 비밀 시설을 1~2곳이라도 공개한다면, 미국은 북한의 비핵화 의지를 인정할 명분을 얻게 된다.

하지만 북한이 제3의 핵시설을 미국에 순순히 공개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미국에 대한 신뢰가 부족한 상황에서 핵시설을 공개하기는 어렵다. 미 정보당국이 북한 내 핵시설을 어느 정도까지 파악하고 있는지에 대해 북한은 알지 못하고 있다. 공개 수위를 결정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릴 수 있다는 뜻이다. 북한 내 핵시설 정보를 미국에 제공할 경우 유사시 미군의 표적으로 선정돼 폭격 대상이 될 가능성도 있다.

‘하노이 핵담판’이 결렬되면서 북미 간의 비핵화 협상은 냉각기에 접어들었다. 미국은 북한과의 협상이 정체돼도 큰 문제가 없는 상황을 만들어 협상 주도권을 잡았다. ‘자국우선주의’를 중시하는 트럼프 대통령의 성향을 감안하면, 미국은 처음에 제시했던 조건을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 결국 북한이 어떤 형태로든 새로운 제안을 내놓아야 할 상황에 직면할 가능성이 높다. 김 위원장이 평양으로 복귀한 이후 북한의 태도 변화 여부에 관심이 집중되는 이유다.

박수찬 기자 psc@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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