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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5 (일)

집에 가 샤워를 한다, 오늘 묻은 수많은 말들을 씻어내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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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전새벽의 시집읽기(28)
직장인 회식 자리 꼴불견 1위는 무엇일까? ‘술 강요하는 사람’이란다. 그럼 사교모임 전체를 통틀어 꼴불견 1위는 무엇일까? 아무래도, ‘혼자만 떠드는 사람’ 아닐까?

얼마 전의 일이다. 친구 하나를 만나 맥주 한 잔 마시면서 사는 얘기를 나누자고 했다. 그런데 오랜만에 만난 이 친구 녀석, 자리에 앉으면서 말을 시작하더니 안주가 나오고 잔이 비도록 말을 멈출 기색이 없었다. 처음에는 ‘수다가 그리웠나 보다’라는 생각에 잠자코 들어주었는데, 시간이 지나자 잠이 올 지경이었다. 결국 나는 그를 제지하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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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를 막론하고 사교모임 전체를 통틀어 꼴불견 1위는 바로 '혼자만 떠드는 사람'이다. 말을 짧게하는 것과 말수가 적은 것은 다르다. 짧게, 더 많이 전달하는 '기술'이 필요하다. [사진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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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 1분 말하고 나면 1분은 들어주자."

그러자 녀석은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더니, 다시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집으로 돌아가는 택시 안에서도 비슷한 일을 당했다. 시트 깊숙이 몸을 묻고 쉬려는데 기사가 별안간 고백한 것이다. 오늘 택시 운행 첫날이라고, 내가 두 번째 손님이라고. 나는 택시 운전을 해본 적은 없지만, 첫 출근이라는 것은 몇 번 해봤으므로 어렵지 않게 그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다. 수다라도 떨면서 긴장을 풀고 싶은, 설렘과 두려움이 혼재된 그 마음을.

결국 잠을 포기하고 몸을 일으키며, 전에는 무얼 하셨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얘기를 시작했는데 강남에서 용인까지, 그는 멈추지 않고 얘기를 했다. 덕분에 택시에 내릴 때쯤엔, 나도 아스팔트에 구멍을 뚫는 일에 대해 제법 알게 되었다.

도망치듯 집으로 들어가 옷을 벗고 샤워를 했다. 땀과 먼지보다는, 오늘 내게 묻은 말들을 씻어내야 할 것 같았다. 침대에 누워서는 습관대로 스마트폰을 쥐었는데,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뉴스를 봐도 SNS를 봐도 하나같이 말들이 너무 많아, 조금도 읽어낼 힘이 없었다. 결국 나는 스마트폰을 내려두고 다른 걸 집었다. 마침 내게는 짧게 말하되 더 많이 말하는 책들이 몇 권 있었다.

미국의 작가 마크 트웨인을 아는 사람이라면, 다음과 같은 그의 일화를 들어봤을 법하다. 어느 날 출판사에서 그에게 "이틀 내에 두 쪽짜리 원고 필요" 라고 급하게 전보를 보내자, 그가 이렇게 회신했다는 것이다.

"이틀 내에 두 쪽짜리는 불가. 30쪽짜리는 가능."

이 일화는 짧게 말하는 것이 오히려 더 어렵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말을 짧게 한다는 것은 그저 말수가 적은 것과는 다르다. 내가 칭송하고자 하는 것은 침묵이 아니라, 짧은 말로 더 많은 것을 전달하는 ‘기술’이다. 간밤에 읽은 책에 좋은 예시가 있길래 가지고 왔다. 미국 시인이 쓴, 매우 짧은 시 한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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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리 스나이더, <오직 한번>. [사진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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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를 다른 분이 번역한 것을 봤는데, 이런 식이었다. 거반 적도 / 거반 춘분 / 정확히 자정… 안타깝지만, 이 번역은 잘못되었다. 의미가 틀린 것이 아니라, 형태가 잘못되었다. 이 시는 문장 길이가 점점 짧아지다가 마지막 행에서 다시 길어지는 게 핵심이기 때문이다. 의미만 맞으면 됐지 왜 문장의 길이까지 따지냐면, 이 글자들이 하나의 그림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를 조금 떨어져서 보자. 각 단어의 의미 대신, 시가 이루는 전체 모습을 살펴보면, 밤바다 위를 비추는 달과, 수면에 퍼지는 월광의 모습이 보인다. 이렇게 활자와 여백을 활용해 이미지를 구축하는 시를 ‘구체시(具體詩)라고 한다. 특수한 형체를 지닌 시라는 뜻이다.

시인은 월광의 아름다움을 두고 구구절절 읊는 대신, 짧디짧은 운문을 택했다. 게다가 거기에 빈 여백을 두기까지 했다. 그저 ‘보름달’로 이어가면 좋을 단어를 굳이 ‘보름’하고 ‘달’로 구분 지음으로써, 독자의 숨을 멈추게 한 것이다. 짐작하건대, 아름다운 밤바다의 모습을 감상하다가 숨이 막히는 순간을 나타낸 것이리라. 말의 내용보다 형태로, 말 자체보다 여백으로 더 많은 것을 보여주다니, 세상에는 이러한 방식의 말하기도 있다는 걸 기억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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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리 스나이더는 그의 구체시에서 여백의 미를 보여준다. 여백을 남기며 보는 사람이 여백의 미를 채워나갈 여지를 준다. 사람 사이에서도 여백과 개입이 관계를 만든다. 사진은 산수화처럼 여백을 담아 표현한 선재도 여름풍경. 주기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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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쓴 개리 스나이더는(Gary Snyder, 1930~) 일찍이 일본에서 연구하며 불교에 몸담았던, 그야말로 동양적 가치를 추구해온 인물이다. 그러니까 그의 구체시가 그리는 장면에 서사를 강조하는 서구의 미술보다 분위기를 강조하는 동양 미술과의 접점이 많아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또 그의 표현방식은 일본의 하이쿠와 비슷하다는 평을 받는데, 하이쿠가 모든 문명권의 문학 중 가장 짧은 장르로 여겨진다는 것을 떠올리면, 스나이더는 말의 홍수에서 익사할 위기에 놓인 우리를 구원해 줄 구명조끼 같은 작가라 하겠다. 짧게 말한다는 것은 듣는 사람이 개입할 여지를 준다는 것이다. 그림을 그릴 때 의도적으로 여백을 남기면 보는 사람이 그 여백을 상상력으로 채우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 개입이 관계를 만든다.

말을 짧게 한다는 건 상대방을 나와의 관계에 놓이도록 만드는 일종의 기술인 것이다. 우리, 그것을 대화의 기술이라고 부르자. 그렇다면 쉬지 않고 떠드는 부류는 어떻게 볼 것인가? 내가 보기에는 그것도 일종의 기술이다. 사람들이 멀어지게 만드는, 절교(絕交)의 기술 말이다.

전새벽 회사원·작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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