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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5 (일)

3.1혁명 100년, 신명나는 축전 벌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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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민족평화 축전에 붙여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해 서울 시청 앞 광장에서 열리는 '민족평화 신명천지 축전'을 맞아 <프레시안>은 이이화 역사학자(민족평화신명천지축전 공동대회장)와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의 기념사를 게재한다. 다음은 이이화 역사학자의 글이다. 편집자.

신명나는 민족평화 축전에 붙여

우리는 지금 3.1혁명 100주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지금부터 꼭 백 년 전에 이 강산에는 만세의 함성이 울려 펴졌습니다. 왜, 무얼 위해 우리 겨레는 남자와 여자, 늙은이와 젊은이, 어린이와 어른을 가리지 않고 일제히 떨쳐 일어났을까요? 한번 더듬어 봅시다.

1910년 일제는 조선총독부를 설치하고서 조선을 식민지로 지배했습니다. 그들은 동학농민군과 의병을 토벌하면서 대량학살을 저질렀고 헌병경찰을 동원해 이 땅을 감옥으로 만들면서 수탈의 기지로 삼았습니다. 그런 지 9년이 지나 그들이 무지렁이라고 본 조선민족은 너도나도 일대 항거에 나서 세계를 경악하게 만들었습니다.

세계 1차 대전이 끝날 무렵, 전승국들은 약소민족 해방을 언급했습니다. 전승국에 속하는 식민지를 대상으로 했지만 일본은 참전국가가 아니었습니다. 그 강화회의가 파리에서 열린다는 소식이 전해져 약소민족은 흥분에 들떴습니다. 우리 해외 동포들도 이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당시 상해에는 신한청년당이 조직되어 신규식 여운형 김규식이 정치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들 독립지사들이 모여 세계 정세를 검토한 끝에 두 가지 일을 추진했습니다. 하나는 국내외 민족지사들에게 독립운동을 벌이라는 것, 하나는 파리강화회의에 조선대표를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이어 만주와 연해주에 거주하는 독립지사들이 독립선언서를 발표했고 뒤이어 동경에서 유학생들이 2.8독립선언을 발표했습니다.

국내에서 손병희 등은 이 연락을 받고 고무되어 그 방안을 모색한 끝에 일대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했습니다. 마침 고종이 승하했는데 사람 사이에 '일본 놈'들이 독살했다는 소문이 퍼져 나가 민심을 더욱 충동했습니다. 안팎으로 절호의 기회가 온 것입니다.

먼저 천도교의 손병희 최린 이종일 등이 조직을 동원하고 자금을 마련하면서 모든 일을 맡아 해냈습니다. 민족대표 33인은 숫자에 특별한 의미가 있는 건 아니었습니다. 그저 천도교 측에서 대표를 선정하면서 비밀을 지키려 연락망이 잘 돌아가는 기독교계 인사를 대거 올린 것입니다. 그리하여 불교 대표는 2인이 들었지만 유교계와 천주교계가 빠졌고 농민 노동자 대표도 누락되었습니다. 하나의 결함이라고 볼 수 있지만 어쩔 수 없었던 시대상황 탓일 것입니다.

탑골공원에서 시위가 시작되자 국상을 치르려 올라온 유림들과 종로의 상인, 각급 학생들이 순식간에 몰려들어 만세를 불렀습니다. 이와 동시에 평안도 등지에서 만세시위가 이어졌고 전국 곳곳으로 파급되었습니다. 독립선언서를 읽고 감동해서 시위에 나선 것이 아니었습니다. 일제는 본토에 있는 군대를 증원해서 경찰과 합세 진압에 나섰습니다.

만세시위는 서울과 평안도에서 동시에 전개되었고 연달아 지방으로 파급되었습니다. 전국 어느 곳이건 천도교인과 기독교 교도들 그리고 학생들이 그 중심을 이루었고 상인 농민 어부로 번져 나갔으며 기생과 백정도 참여했습니다. 특히 사람이 많이 모이는 장날에 주로 일어났고 산위에서 외치는 산호(山呼), 어부들이 벌이는 선상시위도 있었습니다. 평화시위가 기본을 이루었으나 총칼에 맞서 주재소 파괴와 방화, 관공서와 친일파 주택을 습격 파괴 방화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 소식이 외국 동포들에게 전해지자 먼저 만주의 서간도와 북간도 중심으로 만세 시위가 벌어져 특히 동포들이 많이 사는 용정 훈춘 등지에서 열기가 높았습니다. 연이어 연해주의 연추와 블라디보스토크로 번졌습니다. 미주의 하와이, 샌프란시스코 그리고 멕시코로도 이어졌습니다.

일제 경찰과 군인들은 평화적으로 만세시위를 하는 군중을 향해 총을 쏘고 칼을 휘둘렀고 때로는 방화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 1년 동안의 피해사항을 보면, 200만 명 이상이 참여해 피살자 7,700여 명, 부상자 4만 6천여 명, 체포자 5만여 명, 교회 건물의 방화 59개, 학교 건물의 방화 3개, 민가의 방화 724채였다고 합니다. 이 만세시위는 세계사에도 유래를 찾을 수 없는, 우리 역사 이래 최초의 전면적 민중봉기였고 평화행진이었습니다.

3.1혁명이 전개되자 민족지도자들은 상해에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헌법을 제정했습니다. 헌법은 주권재민(主權在民)의 국민국가를 지향해 공화제를 채택하면서 3.1정신을 계승한다고 표방했습니다. 대한제국의 '대한'을 빌려왔지만 '민국'이라고 해 왕조국가를 지향한 게 아니라 민주주의 국가임을 선포한 것입니다. 임시정부의 내각과 의정원에 참여한 인사는 좌우익이 골고루 참여해 민족적 역량을 총 결합했습니다. 이는 민족독립을 이룩하려는 의지의 단적인 표현이었습니다.

상해 프랑스조계에 있는 임시정부 청사에는 국가의 상징인 태극기가 펄럭였고 중국의 지원을 받았으며 미주를 비롯해 세계 곳곳 동포들의 후원금이 몰려들었습니다. 해외 망명 인사들의 구심점이 되었습니다. 임시정부는 광복군을 조직해 참전국이 되려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강대국에 의해 전쟁 당사국의 지위를 얻지 못하는 난관을 겪었습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해방 뒤 대민민국 정부 수립의 모태가 되었습니다.

대한민국 헌법은 3.1정신을 계승하고 임시정부의 법통을 잇는다고 명시했습니다. 단독 정부를 추진한 이승만, 통일 정부를 주창한 김구 김규식, 좌우합작을 모색한 여운형 홍명희 그리고 북한정권의 수령인 김일성도 3.1정신을 받들었습니다. 현재 진정한 민주주의 실현, 화해 협력의 바탕 위에서 평화 통일의 실현, 인권을 존중하는 사회를 이룩하는 과정에서 동학농민혁명, 3.1혁명, 4.19혁명, 5.18과 6월 민주항쟁, 촛불혁명은 우리에게 역사적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이를 기억해 두어야 할 것입니다.

지금 유적지 곳곳에서 이를 기리는 축전을 벌이고 있고 남북이 공동행사를 진행하고 있기도 합니다. 우리 겨레는 까마득한 옛적부터 사람들이 군무(群舞)를 추면서 하늘을 우러러 보고 땅을 굴렸습니다. 임금과 신하, 귀족과 평민이 어울렸습니다. 농경문화는 평화의 축전을 벌였지 정복 연습을 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에는 어울림과 한풀이와 씻김이 곁들여져 있었습니다. 이를 해원상생(解寃相生)이라 합니다.

지금 우리는 이 옛 전통을 살려 민족평화를 소구(訴求)하는 역사맞이, 해맞이 굿과 줄당기기를 벌이는 축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제 광장은 민족-민중세상을 만드는 문화의 터전이 되어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신명나는 민중정서를 드러내고 민족통일을 염원하는 축전으로 승화되기를 기원합니다. 모두 함께 손을 맞잡고 춤을 추며 노래를 부릅시다.

프레시안

▲ 전시 개막을 하루 앞둔 지난 21일 서울 종로구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3,1 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 특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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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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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 이이화 민족평화신명천지축전 공동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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