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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시계 태엽 관리인·욕조에 온수 받는 사람·백조 감독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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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난로 관리인 불륜으로 드러난 영국 왕실의 별별 직업

영국 일간지 더 선은 최근 "런던 버킹엄궁의 '벽난로 관리인' 개리 존스(55)가 직장 동료인 여성 청소부 조안 안셀(44)과 내연관계"라고 보도했다. 각자 가정이 있는 이들이 1년여 국빈 만찬장과 외빈 접견실 등에서 밀회를 가졌다고 한다.

그런데 영국 여론은 이 궁중 불륜보다 벽난로 관리인이란 직업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더 놀랐다. 가디언은 '욕정에 불을 지펴라'란 제목의 풍자 기사에서 벽난로 관리인(fendersmith)의 개념을 설명하며 "소매치기(fingersmith)와 헷갈리지 말라" "일반 국민의 캠핑엔 동행할 수 없다"고 꼬집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일반인들은 '듣도 보도 못한' 일자리가 영국 왕실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벽난로 관리인은 버킹엄궁 내 300개가 넘는 벽난로를 보수하고 불씨를 관리하는 정규직이다. 원시적 난방에 의존하던 근대 이전 궁정의 특수직으로 명칭 자체가 고어(古語)로 분류된다. 존스는 이 일을 35년 전 선대로부터 세습받았고, 엘리자베스 2세 여왕(92)과 같이 TV를 볼 정도로 친하다고 한다.

여왕 부부와 직계 가족이 거주하는 버킹엄궁엔 방이 775개고 상주하는 정규 직원이 800여명이다. 대형 공기업 규모다. 주 30~40시간 근무에 연봉은 민간보다 훨씬 높고 여왕 직속이라 소득의 상당 부분이 비과세인 '꿈의 직장'이다. 특히 영국 국민에게조차 생소한 직종이 세분화돼 있어 왕실이 가끔 채용 공고를 낼 때마다 도마에 오른다.

이를테면 '커튼 제작자(curtain maker)'는 궁궐 내 커튼을 만들고 보수하는 데 연봉 2만2000파운드(약 3200만원), 귀빈실 등 78개 욕조를 돌며 목욕물 온도를 맞춰주는 '욕조에 물 받는 사람(bath runner)'은 1만4000파운드(약 2000만원) 받는다. 평일 아침 9시마다 여왕의 방 창밖에서 스코틀랜드 전통 악기 백파이프를 15분 연주하는 '인간 알람'인 파이프 연주자(piper of sovereign)는 인간문화재급으로 4만8000파운드(약 7000만원)를 받는다. 정작 엘리자베스 여왕은 수년 전 한 손님에게 "아침마다 그 소리 듣기 지겹다"고 말했다고 한다.

버킹엄궁 내 350여개의 옛날식 시계 태엽을 감고 관리하는 '시계 태엽 감는 사람(clock winder)'은 3만1200파운드(약 4600만원)를 받는다. 영국 내 야생 백조는 모두 여왕의 소유로 이 '특별 재산'을 점검하는 '백조 감독관(warden of the swans)'도 있다. 매년 7월 5일간 런던 템스강변 백조의 개체 수를 조사해 보고하는 일인데, 83세의 교수 출신 조류학자가 맡는다. 이 외 장서 19만권, 예술품 15만점, 와인 수만병, 말 수백필도 수많은 전문가가 나눠서 관리하고 있다.

전통을 엄격히 지키는 영연방 수장의 거처이자 국빈을 대접하는 장소인 만큼 세분화된 인력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러나 10여년간 재정난에 브렉시트까지 겹치면서 왕실 규모와 씀씀이를 놓고 부정적 여론도 크다. 연 3억파운드(약 4400억원)의 왕실 유지 비용은 대부분 여왕 소유 부동산 수익으로 충당하지만 궁내 인건비와 물품 구입·수리 비용은 정부 교부금, 즉 국민 세금을 쓰기 때문이다. 텔레그래프는 "옛날엔 왕이 잠들기 전 침대에 칼이 들었는지 먼저 굴러보는 하인도 따로 있었다니 지금은 약과"라고 비꼬기도 했다.

[정시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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