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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6 (일)

[박완규칼럼] 혐오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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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견서 비롯된 혐오표현 확산/갈등 부추기고 곳곳에 상처 남겨/우리 사회 공론장 황폐해져/법적 제동장치 마련 서둘러야

우리 사회에서 혐오표현이 유행병처럼 번진다. 남녀, 세대, 지역, 계층 간 틈을 비집고 들어가 갈등을 증폭시키고 곳곳에 상처를 남긴다. 편견에서 비롯된 혐오표현이 증오범죄로 이어지기도 한다.

혐오(嫌惡)는 싫어하고 미워하는 것을 뜻한다. 영국 철학자 토머스 홉스는 저서 ‘리바이어던’에서 ‘욕구’와 ‘혐오’를 대비시킨다. “하나는 다가가는 운동을, 또 하나는 멀어지는 운동을 의미한다”고 했다. “노력이 어떤 것으로부터 멀어지는 쪽으로 나타날 때 일반적으로 혐오라고 부른다. 혐오는 우리를 해친 적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해칠 것인지 아닌지를 모르는 사물에 대해서도 가지게 된다.” 어떤 것도 혐오의 대상이 될 수 있지만, 혐오를 표현하면 차원이 다른 문제가 된다.

세계일보

박완규 논설실장


혐오표현이 온라인 커뮤니티 등을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다. ‘일간베스트저장소’가 ‘김치녀’ 등 ‘××녀’ 시리즈로 여성을 비하하자, 여성주의 사이트 ‘메갈리아’ ‘워마드’가 미러링(mirroring) 전략으로 대응하면서 ‘한남충’ 등 남성 비하 발언을 쏟아냈다. 2016년 강남역 인근 노래방 화장실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이 여성혐오 범죄로 알려지면서 남성혐오 표현이 급속히 퍼졌다. 지금 유행하는 여성·남성혐오 표현은 입에 담기조차 거북할 만큼 적나라하다. 최근에는 서울 지하철 전동차의 임산부 배려석이 ‘가위표(×)’ 등의 낙서로 훼손돼 ‘임산부혐오’라는 말까지 등장했다.

노인혐오 표현도 사회적으로 용인할 만한 수위를 넘어섰다. 일각에선 ‘틀딱충’ ‘연금충’ 같은 노인 비하 표현을 쓴다. 장애인이나 외국인 근로자, 다문화가정 자녀에 대한 혐오표현도 우려할 만한 수준이다.

전문가들은 사회적으로 좌절감이 깊이 뿌리내리면서 분노의 표현을 넘어 약자를 겨냥한 혐오표현이 확산되고 있다고 분석한다. 살기 힘든 탓을 만만한 상대에게 돌리는 것이다. 서울대 행복연구센터 조사 결과 한국 성인남녀 중 14.7%가 일상생활에서 장애를 일으킬 정도의 중증도 이상 울분을 느끼며 사는 것으로 나타났다. 울분이 분노를 넘어 혐오로 표출되는 것이다. 동영상 플랫폼 유튜브에서는 혐오표현이 구독자를 늘리는 수단으로 쓰인다. 정치권조차 특정 계층의 지지를 끌어내기 위해 혐오표현에 가세하는 실정이다.

이제 혐오표현은 심각한 사회문제가 됐다. 우리 사회의 공론장이 혐오표현으로 얼룩지면서 황폐해지고 있다. 사회 자정 기능에만 맡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진단이 나온다.

국가인권위원회의 ‘혐오차별 대응 특별추진위원회’가 20일 출범했다. 추진위는 출범선언문에서 “지금 한국 사회는 ‘혐오’의 한가운데에 있다”며 “혐오의 문제는 사회 모든 구성원이 단호하게 대응해야 할 과제”라고 했다. “혐오는 구조적 차별을 재생산하고, 다양한 차이를 가진 ‘모든’ 사람의 ‘공존’을 파괴한다”는 게 추진위의 문제 의식이다. 인권위는 외교부, 법무부, 문화체육관광부, 교육부 등과 함께 혐오표현 예방 범정부 플랜도 마련할 방침이다.

법적 제동장치 마련을 서둘러야 할 때다. 미국 법철학자 로널드 드워킨은 ‘민주주의는 가능한가’에서 “영국을 비롯한 유럽 여러 나라에서는 인종 때문에 공개적으로 모욕당하지 않을 법적 권리가 있다. 이 권리는 ‘혐오발언’을 범죄로 규정하는 법률로써 보호된다”고 했다. 혐오표현은 인권과 관련된 문제다. 드워킨은 “기본 인권이란 어떤 ‘태도’로 취급받을 권리다. 곧 개개인을 중요한 존엄성을 지닌 인간으로 보는 이해를 표현하는 태도를 말한다”고 했다.

독일 작가 카롤린 엠케는 ‘혐오사회’에서 “증오하는 자들이 그 대상에게 해를 입힐 수 있는 여지를 주지 않는 것은 문명사회 구성원으로서 우리 모두의 책임”이라고 강조한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차별을 감지해내는 일, 사회적 공간이나 담론의 공간에서 추방된 이들에게 그 공간들을 열어주는 것과 같은 작은 일들”이라고 했다. 새겨들어야 할 말이다. 우리가 혐오표현에 맞서 싸워야 한다. 공론장을 바로 세우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더는 미룰 수 없는 일이다. 혐오표현을 방치하다간 우리 사회가 산산조각 날 판이다.

박완규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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