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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8 (토)

[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하이볼’이 싱거운 오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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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최근에 일본의 술집 여행 책을 한 권 냈다. 한 기자와 출간 인터뷰를 했다. 책의 주제는 일본에 가면 싸게 파는 술집 밥집이 많다. 뭐 이런 거였다. 기자가 “일본은 자기 점포에서, 그것도 국가연금을 받는 부부가 음식을 싸게 파는 집들이 많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값이 싼 것이 아닌가?” 하고 물었다. 좀 해설을 달자면, 자기 점포이니 월세도 없겠다, 연금도 받으니 생활 걱정도 없겠다, 나이 든 부부는 음식을 싸게 판다는 것이다. 즉, 이런 가게들이 있어서 일본의 음식 가격이 낮게 유지될 수 있는 것 아니냐는 비판적 질문이었다. 그렇다. 일본의 술과 밥 가격은 1990년대 거품 경기 시대에 멈춰 있다. 그때 우동과 메밀국수, 돈가스 가격이 20여년 동안 별로 오르지 않았다. ‘자가 소유 점포, 연금, 부부 공동 노동’이 상징하는 저가 유지 가게가 영향을 주었다. 일본은 완전경쟁 사회다. 빈틈이 없다. 패를 다 내놓고 치는 화투다. 이문을 내려면, 저 노인 부부처럼 특별한 조건이 있거나 아니면 쥐어짜듯 남겨야 한다. 일본에서 술값이 싸기로 유명한 오사카에서는 위스키를 탄 칵테일의 일종인 ‘하이볼’이 싱겁기로 유명하다. 위스키를 최대한 적게 넣기 때문이다. 칵테일 한 잔에 300엔짜리도 있으니, 위스키라도 아껴 넣어야 코딱지만큼이라도 남을 것이다.

경향신문

우리는 완전경쟁과 먼 나라였다. 가게의 수준차가 컸다. 조금만 잘하면 먹고살 수 있었다. 그래서 레드오션이라고 하는 요식업에 여전히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요즘은 레드오션이라는 영어를 슬쩍 비틀어서 ‘피바다’라고 불러야 할 것 같다. 누군가 수없이 ‘죽어나간다(망해서 가게를 접는다)’는 그림이 눈앞에 선하다. 우리도 어느덧 완전경쟁 상태에 들어온 것이다. 여전히 인스타그램 같은 집객력 강한 미디어에 투자하고, 바이럴 마케팅을 펼치면 사람이 모이기는 하지만 돈 쓴 만큼 효과도 없다. 음식과 서비스에서 ‘가성비’를 충족시켜 주지 않으면 고객들은 언제든 다른 곳으로 떠난다. 충성고객은 요즘 천연기념물이 됐다. 액면대로 비교해서 뭔가 나은 점도 없는데, 충성스럽게 와주고 팔아주던 고객이 없어진다는 뜻이다. 새롭게 뜬 가게에 몰려가고, 다시 새로운 동네로 간다. 과잉 공급에 완전경쟁에, 이른바 바이럴 마케팅 세게 하는 자본력 있는 가게의 공세에 이제 작은 독립 점포들은 미래를 가늠하기 어렵다.

문제는 이게 다가 아니라는 것이다. 진짜 문제는 젠트리피케이션과 그 후유증이다. 무슨 무슨 길이 뜨면 그 길에서 장사하던 일반 자영업자들이 서리를 맞는다. 전파사나 지물포, 동네 호프집과 백반집이 오르는 월세를 감당하지 못해 가게를 내줘야 한다. 그러나 정작 그렇게 ‘뜬’ 골목이 오래 번듯하게 장사하느냐면 그것도 아니다. 경리단길을 보라. 원래 동네 장사하던 많은 가게들이 오르는 월세에 치여 가게를 접었다. 정작 그 길의 새 입주자들은 요즘 골목의 힘이 빠지면서 예전만 못하다는 탄식이 나온다. “도대체 이 길이 인기를 얻어서 이익을 본 자는 누구야?” 하는 질문이 나온다. 이문이 박해진 완전경쟁, 쏟아지는 자영업자, 특정 지역의 집중적인 성장과 빠른 몰락, 그 와중에 경험 없는 창업자들을 등치는 엉터리 창업 컨설턴트들까지. 한국 식당 동네는 지금 난맥이다.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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