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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2 (일)

'황제'라 불린 남자, 그를 잃고 '패션의 심장'이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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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넬의 名匠' 카를 라거펠트, 전세계서 추모

"그는 쇼가 끝나자마자 '이제 다음'을 외쳐" 사르코지 부부·베컴·엘턴 존 등 애도

"파리를 전 세계 패션 수도로 격상시킨 내 소중한 친구의 죽음에 무한한 슬픔을 느낀다."(베르나르 아르노 LVMH 회장)

"그는 늘 쇼가 끝나자마자 '이제 다음'이라 외쳤다. 결코 과거로 돌아가거나 스스로를 복제하지 않는 그의 집념을 존경한다."(세르주 브륀슈위그 펜디 회장)

'위대함'이라는 단어를 생명체로 구현한다면, 그건 바로 디자이너 카를 라거펠트일 것이다. 디자이너를 넘어 '황제(kaiser)'라 불렸던 사내, 카를 라거펠트(86)의 죽음은 21세기 패션계 사전을 통째로 도려내는 듯했다. 짙은 색 선글라스에 꽁지머리, 손가락을 내놓는 장갑 차림의 그는 패션 디자이너이자 사진작가, 가구 디자이너이자 출판인으로 시대를 풍미한 아이콘이었다. 단순히 옷을 짓는 데 그치지 않고, 시대상을 위트 있게 반영한 쇼 무대를 창조하며 패션을 몰라도 그의 작품을 즐기게 만든 예술 감독이었다.

프랑스 샤넬과 이탈리아 펜디, 또 자신의 이름을 딴 카를 라거펠트 브랜드의 총괄 예술 감독으로 한시도 일을 놓지 않았던 그의 '소멸'은 패션계의 심장을 뒤흔들었다. 21일 밀라노에서 열릴 펜디 패션쇼와 다음 달 5일 파리에서 열릴 샤넬 쇼를 준비했던 그였기에 패션계는 충격에 빠졌다. "라거펠트가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는 수퍼모델 클라우디아 시퍼를 비롯해 마크 제이컵스, 빅토리아 베컴, 도나텔라 베르사체 등 패션계 동료는 물론 가수 엘턴 존, 니콜라 사르코지 전 프랑스 대통령과 부인 카를라 브루니 등의 추모도 이어졌다. 사망 소식이 전해진 당일 '밀라노 패션 위크'의 문을 연 베네통 총괄 디자이너 카스텔바작은 쇼가 열리기 직전 육성으로 "라거펠트에게 무한한 감사를 드린다"고 외쳤다.

조선일보

짙은 색 선글라스, 백발의 꽁지머리, 검은색 슈트에 손가락을 내놓는 장갑이 트레이드 마크였던 카를 라거펠트(왼쪽 큰 사진). 카를 라거펠트가 2014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샤넬 패션쇼를 마치고 모델들과 런웨이를 걷는 모습. 피켓을 들고 페미니즘 시위를 하는 모습을 연출했다(위 작은사진 왼쪽). 라거펠트를 ‘칼 할아버지’라 불렀던 가수 지드래곤과 라거펠트(중간). 지난 19일 그의 사망 후 파리 샤넬 사옥 앞에서 추모의 꽃을 헌화하는 여성(오른쪽). 아래 사진은 2016년 라거펠트가 그린 청사초롱과 애묘 슈페트. 한글로 감사인사도 전했다. /연합뉴스·인스타그램 @modernweeklystyle·인스타그램 @karllagerfe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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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독일 함부르크에서 태어난 라거펠트는 어린 시절 장난감 대신 종이와 연필, 책을 친구 삼았다. 1949년 음악가인 어머니와 함께 참석한 파리 디오르 쇼의 무대에 반해 디자이너가 되기로 결심한다. 21세에 국제 양모 디자인 콘테스트 코트 부문 우승을 하며 세계 무대에 이름을 알렸다. 당시 드레스 부문 1위가 이브 생 로랑이었다. 이름난 쿠튀리에(couturier·고급 맞춤 의상 디자이너)였던 라거펠트는 펜디, 클로에, 샤넬 등을 맡으며 브랜드에 새 생명을 불어넣었다.

"변화는 나를 숨 쉬게 하는 것. 멈추는 순간 죽는다"고 강조했던 그는 샤넬의 C 로고와 펜디의 F 로고를 현대화하며 브랜드 가치를 극대화했다. 1925년 첫선을 보인 샤넬의 트위드 슈트를 재해석해 드레스와 코트 등으로 변용하며 미학적 감각을 더했다. 배우 키라 나이틀리가 입어 유명해진 2014/15 시즌 전등 갓 스타일(lampshade) 의상과 릴리 로즈 뎁이 2017년 쇼에서 입은 분홍색 러플 드레스는 기립 박수를 받았다. 지치지 않는 창의력에 대해 그는 "과거에 연연하는 건 부실한 미래를 알리는 것이다. 빈티지 옷은 좋아도 빈티지 인간은 별로"라고 말한 바 있다.

쇼 무대도 매번 화제였다. 2017년 봄엔 우주 시대를 이야기하며 35m 크기의 로켓 모형을 무대 위 10m 상공에 띄웠고, 그해 가을엔 6개의 폭포수가 흐르는 높이 15m의 인공 암벽을 그랑 팔레 안에 설치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2015년엔 한복과 한글에서 영감받은 크루즈쇼 의상을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선보였다. 가체를 쓴 모델들이 보자기, 자수, 치마저고리 등에서 영감받은 알록달록한 드레스를 입고 런웨이를 누볐다. 라거펠트는 당시 "나는 한글을 사랑한다. 일종의 큐비즘 같다"고 밝혔다. 2016년 '카를 라거펠트' 브랜드 서울 론칭을 앞두고는 '나는 한국을 사랑합니다'라는 한글과 함께 청사초롱을 들고 그의 고양이 슈페트를 안은 스케치를 인스타그램에 올리기도 했다. 그와 막역한 가수 지드래곤은 "칼 할아버지"라고 불렀다.

라거펠트는 영감의 원천이 책에서 나온다고 밝혔다. 자신의 책 '금기의 어록'엔 이렇게 적었다. "책은 마약 같다. 과다 복용의 위험이 전혀 없는 마약. 독서는 내 인생의 럭셔리다."

[밀라노=최보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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