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5.12 (일)

월남전과 쌀국수를 하나로 이어준 박항서 베트남에 관한 ‘알쓸신잡’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인기 여행지로, 또는 SNS 인증샷에 목마른 젊은 세대들에 의해, 베트남의 매력은 서울로 직송되었다. 값싼 물가, 친절한 국민성, 남쪽 호찌민과 북쪽 하노이의 색다른 문화와 기후, 음식 등이 ‘베트남 여행 한 번 다녀오는 것이 인싸되기’의 필요조건이 되기도 했다. 최근엔 박항서 감독이 대표팀을 맡은 축구팀 때문에 베트남에 대한 뉴스가 미디어에 많이 등장했다.

시티라이프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베트남은 우리에게 ‘월남’이고 ‘전쟁터’였다

베트남을 기억하는 이미지는 크게 두 가지다. ‘월남전’과 ‘쌀국수’. 이는 시간의 흐름이자 세대를 구분한다. 월남전이 기억난다면 적어도 1970년 전에 태어났고, 첫 번째로 접한 베트남의 이미지가 쌀국수라면 1980년대 혹은 1988년 이후에 태어난 세대일 것이다. 1965년부터 1973년까지 베트남은 우리에게 ‘월남’이고 ‘전쟁터’였다. 그때 기억의 편린들은 지금도 우리 아버지와 선배 세대에게 박제되어 남아 있다. 사이공, 월맹, 베트콩, 주월 한국군, 귀신 잡는 해병, 맹호부대, 아오자이, 고엽제, 네이팜탄, M16, 보트피플, 호찌민 등. 모두 전쟁이 생산하고 그것에서 파생된 것들이다. 월남 전쟁은 북베트남(우리나라와 미국에서는 국가로 인정치 않아 ‘베트남 독립 동맹’, 즉 ‘월맹’으로 부른다)과 미국과 한국 등이 인정한 합법 정부인 남베트남, 즉 ‘월남’ 간의 전쟁이었다. 하지만 이 전쟁의 주역은 미국이었다. 미국은 월남이라는 늪에 빠졌고 자유 진영 국가들의 참전이 필요했다. 마치 한국 전쟁에서 16개국이 유엔군으로 참전한 것처럼. 이 전쟁에 한국군도 파견되었다. 당시 미국의 원조에 절대적으로 의존했던 우리로서는 달리 선택지가 없었다. 있었다면, 파월의 대가로 경제와 군사 원조를 더 많이 받아 내고 주한 미군의 전력을 강화시키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당시 미군 이외는 유럽과 일본에도 없던 최신예 전투기 F4팬텀을 한국 공군이 보유할 수 있었다. 월남 파병은 우리 군대를 풍부한 실전 경험의 강군으로 만드는 데 일조했다. 또한 경제적 이득을 주었다. 물론 그 대가는 있었다. 많은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월남의 정글에서 목숨을 내놓아야 했다. 그 당시 사이공 정부의 월남은 한국에게 미국 다음가는 맹방이었다. 피를 나눈 전우니 당연했다. 월남 전쟁은 1975년 북베트남 주도 통일로 마무리되었다. 미국은 파리 협정을 통해 철수를 결정했지만 어찌 보면 미국의 패배일 수도 있었다. 그렇게 월남은 우리의 기억에서 지워졌다. 총성과 파월 군대는 사라졌지만 그 후유증은 고엽제의 상처처럼 꽤 오래 한국 사회를 지배했다.

시티라이프

박항서 베트남축구대표팀 감독 사진(위키미디어©DangTungDuong at Vietnamese)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베트남 축구’, 월남전과 쌀국수를 하나로

하지만 세상은 변하는 것이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친구가 된다. 세상이 몇 번 변해도 절대로 손 잡을 것 같지 않던 미국과 베트남이 수교를 하고 왕래를 시작했다. 그때부터 베트남은 월남 대신 베트남으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국경을 넘어 제일 선봉에 선 것은 당연히 기업. 한국의 기업들이 베트남에 진출했다. 베트남은 중국과 함께 새로운 생산 기지이며 소비지 1순위였다. 베트남은 어느 순간 우리에게 ‘쌀국수’로 다가왔다. 특별식처럼, 때론 다이어트 음식으로 다른 동남아시아 음식들인 양꿍, 니시고랭 등과 함께 말이다. 값싼 물가, 친절한 국민성, 남쪽 호찌민과 북쪽 하노이의 색다른 문화와 기후, 음식 등으로 ‘베트남 여행 한 번 다녀오는 것이 인싸되기’의 필요조건이 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베트남은 우리에게 월남전과 쌀국수의 이분법으로 여전히 남아 있었다. 월남전 세대들에게 베트남은 ‘내 청춘을 바친 전쟁터’, ‘내 전우가 죽은 곳’ 혹은 중동 붐이 일기 전 유일한 외화 벌이 장소였기 때문이다. 혹여라도 그들의 이런 기억을 꼰대스럽다고 단정 짓지 말자. 기억을 소스 코드로 프로그래밍된 생각과 이미지의 회로는 쉽게 다른 소스 코드를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런데 이 월남전과 쌀국수를 한데 모아 소통과 화합의 장을 마련한 특별한 사건이 바로 베트남 축구, 즉 ‘박항서’이다. 2002년 한일월드컵 당시 히딩크 감독 대표팀의 코치였던 박항서. 개막전인 폴란드전에서 황선홍이 첫 골을 넣고 그를 안으려는 선수들을 손가락으로 제어하며 달려가 가슴으로 안은 큰형님 같은 박항서. 그 뒤로 박항서 감독은 축구팬이 아니라면 기억하지 못하는 집안 장식장에 놓인 ‘영광의 훈장’ 같은 존재였다. 감독으로 꾸준히 활동했지만 한국 사회는 1등과 주연만 기억했고, 성적이라는 핫한 이슈를 만들지 않은 ‘성실한 그’를 기억하기에는 너무나 역동적인 사회였기 때문이다.

박항서 감독은 3부 리그 감독까지 하강하며 점차 축구계에서 역할이 축소되었다. 2017년 그가 베트남 축구 대표팀 감독으로 간다는 뉴스도 그저 인물 동정란에 실리는 정도였다.

박항서는 그곳에서 기적을 만들었다. 동남아시아에서 태국, 말레이시아와 치열하게 승패를 겨루며 패전을 밥 먹듯 했던 베트남 대표팀이 그의 리더십으로 ‘원팀’이 되어 기적의 기록, 승리의 기록을 쌓아나간 것이다. U23 청소년 대표팀의 준우승, 아시안게임 4강, 동남아시아의 월드컵이라는 스즈키컵 우승 그리고 아시안컵에서 보여 준 베트남 축구 대표팀의 행보는 불과 1년 만에 ‘어떻게 팀이 저렇게 변할 수 있지?’라는 궁금증을 자아낼 정도였다. 그의 리더십에 ‘형님 리더십’, ‘소통 리더십’, ‘파파 리더십’ 등의 수식어가 붙으면서 박항서 감독은 검색어 상시 순위에 오르는 인물이 되었다. 베트남은 그에게 훈장을 주었고, 총리가 그를 얼싸안고 기뻐했으며, 베트남 기업들이 그에게 거액의 포상금을 주었고, 베트남 국민들은 그를 우상으로 여긴다는 보도가 쏟아졌다. 또 그를 통해 국내에선 베트남 국가 대표팀 경기를 밤늦게 시청하는 진풍경이 벌어지고, 베트남 국가 대표팀이 승리하면 마치 우리나라 팀이 승리한 것처럼 뿌듯해했다. 혹자는 우리가 베트남에 열광하는 이유를 50대를 훌쩍 넘기고 타국에서 제2의 인생 역전을 이룬 박항서라는 한 인간에게 보내는 박수라고 말한다. 또 누구는 한국인만의 강한 연대감이라고 말한다. 박찬호, 류현진의 LA다저스, 박지성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손홍민의 토트넘을 밤새워 응원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한편에서 우리가 박항서를 통해 베트남 국가 대표팀을 응원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베트남에 갖고 있는 부채 의식’이라는 의견도 있다. 그것은 월남전에 참전해 그들과 총을 들고 싸워야 했던 우리 선배 세대들이 갖는 심리적 기저에서 나왔을 것이다. 참전의 명분은 분명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자본주의 민주국가 진영에게 소련과 중국을 축으로 한 공산주의의 범람을 막아야 할 의무가 있었다. 특히 한반도와 월남이 그랬다. 중국의 장제스 정부가 대만으로 쫓겨 가고 마오쩌둥이 주도한 공산화가 이루어지자 그 경계심은 더욱 예민해졌다. 더구나 우리에게는 국제 사회에 갚아야 할 빚이 있었다. 한국 전쟁에서의 미국에게 또 유엔이란 기치 아래 모인 16개국 젊은 군인들이다. 그야말로 이름도 성도 모르는 먼 나라에서 죽어 간 수많은 세계의 젊은이들에게 말이다. 물론 박항서와 베트남 축구를 응원한다고 누군가가 갖고 있는 이 부채 의식이 깨끗이 청산되는 것은 아니다. 혹자는 이런 관점 역시 역동적으로 변하는 국제 관계에서 괜한 ‘우리의 기우’라고도 말한다. 정답은 없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베트남은 이제 ‘친구’처럼 가까운 존재라는 것이다. 어쩌면 젊은 세대들에게 이런 관점은 그야말로 관심 밖의 일이다. 그 세대의 특성상 과거보다 현재의 관계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를 진취적이고 발전적 혹은 미래 지향적이라 말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현상을 바라보는 편리함이 앞서는 감정이다. 일테면 미국 조지아주의 한 도시에 사는 톰이라는 고등학생에게 한국 전쟁에서의 역사적 사실 관계는 중요치 않다. 그에게 한국은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혹은 게임과 K팝의 나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베트남을 ‘월남 전쟁’이 아닌 ‘쌀국수’로 베트남을 기억하는 지금의 우리와 같다.

시티라이프

베트남을 탈출하는 보트피플(위키미디어©PH2 Phil Eggman), 베트남전쟁 다낭공군기지 근처(위키미디어©US Marine Corps _PFC G. Durbin)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20세기 ‘제국들의 무덤’ 베트남

베트남 북부 지역에는 남월南越이 존재했다. 중국 남부에 있던 백월이 베트남 북부로 이주해 남월을 세운 것이다. 이것이 ‘월남’으로 변한 것은 청나라 때다. 청나라는 중국 남부에 강력한 통일 왕조가 등장하는 것이 불편했고 더구나 남월이라는 국호는 진, 한나라 시대 때의 남월을 떠오르게 한다고 반대했다. 유연한 베트남 왕조는 청나라의 제안을 받아들여 남월을 월남으로 바꾸었고 이를 베트남 언어로 ‘비엣남’이라 불렀다. 베트남은 중국이 일시 점령을 할 수 있지만 지배할 수는 없는 국가였다. 베트남의 역사서를 보면 그들의 기원이 중국의 삼황오제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만큼 베트남에서의 왕조, 국가의 존재는 유구하다. 베트남인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킨족을 볼 때 우리는 묘한 선입견을 갖는다. 여타의 동남아시아 민족처럼 작은 피지컬이다. 하지만 이 마른 몸속에서는 수천 년을 이어 온 강한 자존심의 피가 흐르고 있다. 역대 중국 왕조에게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은 한반도, 몽골 그리고 남쪽의 베트남이었다. 강력한 통일 왕조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이 세 지역의 평정이 선결 과제였다. 물론 이 과정에서 중국은 큰 창피를 당하기도 했다. 수나라, 당나라의 고구려 침공, 흉노에게 굴욕적인 평화협정을 체결한 한 고조, 몽골의 원나라, 만주족의 청나라에게 대륙을 내어 주기도 했고 베트남 또한 마찬가지다.

중국 최초로 통일 왕조를 건설한 진시황제는 베트남 북부 지역을 점령했지만 베트남의 어우비엣족에게 참패를 당하고 철수했다. 진을 이은 유방의 한나라에게도 베트남은 녹록지 않았다. 한나라의 베트남 경영은 제5대 황제인 한 무제 때 완성되었다. 이 무렵 베트남은 중국의 한자와 유교 문화를 받아들이며 범중국권 국가가 되었다. 하지만 베트남은 10세기경 중국이 5대10국의 혼란기에 접어들자 독립적인 국가로서 행보를 시작했다. 이후 명나라 영락제의 지배를 받았지만 중국의 직접적인 통치와는 그 결이 달랐다. 베트남과 중국의 가장 큰 대결은 청나라 때다. 18세기 베트남 완혜가 칭제를 선언하자 청나라의 건륭제는 무려 20만 대군을 보내 베트남을 침공했다. 개전 초기 청나라는 승리하는 듯했지만 베트남의 반격에 휘말려 20만 공격군이 거의 전멸 당하는 치욕을 맛보았다. 자존심이 상한 건륭제는 다시 대군을 일으켜 베트남을 침공했다. 이때 베트남 국왕 완혜는 유연한 외교전으로 건륭제를 만족시켰다. 자신이 직접 베이징으로 가 건륭제를 알현한다는 약속을 한 것.

하지만 완혜는 자신과 닮은 가짜를 보냈다. 물론 건륭제도 이를 알았지만 짐짓 못이기는 척 베트남의 머리 숙임을 받아들였다. 이처럼 베트남 역사 천 년은 중국과의 대결이었다. 베트남은 전쟁으로 때로는 유연한 외교로 위기를 벗어나며 자존감을 지켰다.

베트남의 20세기는 격정의 시기다. 역사학자들은 ‘베트남은 제국의 무덤’이라고 기술한다. 19세기부터 20세기까지 당대 세계를 지배하던 강력한 제국들이 베트남이라는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패배 혹은 철수했다는 뜻이다. 19세기 베트남은 프랑스, 영국과 맞섰다. 하지만 베트남의 현안은 이웃인 태국, 크메르와의 전쟁이었다. 이 전쟁으로 베트남의 국력은 상실됐고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었다. 지금도 베트남에 남아 있는 프랑스의 흔적들이 당시 식민 시대에 뿌리 내린 것이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며 베트남 역시 전쟁에 휘말렸다. 일본은 대만을 비롯해 베트남 등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시티라이프

사이공 탈출 장면(위키미디어©USMA), 1966년 베트남전쟁 (위키미디어©James K. F. Dung), 1972년 라인베커2 작전(위미키디어©USAF)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천 년을 이어 온 강인한 자존심의 국가

하지만 1945년 연합군의 승리와 함께 베트남은 두 나라로 분리되었다. 그 시작은 연합군 수뇌부들의 일본 점령지 분할 전략이다. 북쪽에는 소련군이, 남쪽에는 미군이 진주했던 당시의 우리와 다르지 않았다. 베트남 북부에는 중국군이, 남쪽에는 영국군이 진주했다. 하지만 당시 장제스 정부는 마오쩌둥과의 내전에 휘말려 베트남 주둔에 시간을 허비했다. 이때 북부 베트남을 장악한 것은 베트남 공산주의 세력이었다. 이들은 호찌민 주도의 북베트남이었다. 이들의 남진을 저지한 것은 바로 영국군이었다. 영국군이 빠르게 남베트남을 장악해 공산주의 세력은 남진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당시 영국은 남베트남의 통치를 인도차이나 반도 식민 경영의 기득권이 있는 프랑스에게 넘겼다. 이때부터 베트남의 새로운 독립 전쟁이 시작되었다. 1946년부터 1954년까지 무려 9년 동안 베트남은 프랑스와 싸웠다. 전쟁은 1954년 디엔비엔푸에서 프랑스군이 참패를 당하면서 결론이 났다. 프랑스는 미국과 소련에게 중재를 부탁했다. 스위스 제네바 회담은 프랑스군이 베트남에서 철수할 명분을 주는 회담이었다.

하지만 베트남은 통일되지 못했다. 북베트남 즉 월맹과 남베트남 월남으로 나뉘었다. 베트남은 내전이자 외세와의 전쟁에 돌입했다. 그것도 세계 최강 미국이 상대였다. 이 전쟁은 지난했다. 1965년부터 1973년까지 무려 9년 동안 베트남에서 총성이 끊이지 않았다. 월맹은 미국의 상대가 되지 못하는 것이 당연했지만 전쟁은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다. 월맹 정규군, 베트콩의 전술에 미군은 고전했다. 전투기, 야포, 탱크, 헬리콥터, 각종 폭탄, 수십 만의 미군을 투입했지만 미군은 북베트남을 지배하지 못했다. 결국 1975년 북베트남 주도의 통일로 전쟁은 종결되었다. 이 20세기의 모든 전쟁을 이끈 이가 바로 호찌민이다. 그는 베트남의 오늘을 설계한 전략가다. 애초 세계 대전 종식과 함께 중국군과 영국-프랑스군이 주둔할 때 호찌민은 외세의 제1순위로 중국군을 선택했다. 그는 말했다. “중국은 1000년 동안 우리를 지배하려 했다. 만약 중국군이 베트남 지배의 기초를 마련한다면 그들은 영원히 베트남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시티라이프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적에게도 망신을 주지 않는 유연함

통일 베트남의 등장이라는 중국의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물론 같은 사회주의 국가였지만 중국에게 베트남은 다루기 쉽지 않은 존재였다. 1978년 12월25일, 베트남은 친중국 정권인 크메르 루즈가 지배하던 캄보디아를 침공했다. 그리고 12일 만에 수도 프놈펜을 점령하고 무려 20만 명의 베트남 정규군이 캄보디아에 주둔했다. 이는 도전이었으므로 중국은 좌시할 수 없었다. 가뜩이나 하노이 정부는 친소련을 표방했고 화교의 재산을 몰수하고 그들을 중국으로 추방했다. 인도차이나에서 베트남의 맹주 역할을 놔둘 수가 없었다. 당시 중국 최고 지도자 덩샤오핑은 1979년 1월1일 미국을 방문했다. 그는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에게 넌지시 베트남 공격을 알렸다. “조그만 친구가 말을 잘 안 듣는다. 아무래도 엉덩이를 좀 때려줘야 겠다.” 2월17일 중국 인민해방군 20만 대군이 탱크 200여 대를 앞세워 베트남을 공격했다. 전쟁 초기 중국은 국경 지대 베트남 5개 도시를 점령하는 등 순조로운 출발을 보였다. 하지만 베트남의 반격은 매서웠다. 베트남의 주력 부대는 캄보디아에 있었지만 베트남은 10만 명의 지역 수비대와 민병대로 중국군과 맞섰다. 숫자는 중요치 않았다. 베트남군은 수십 년간 프랑스, 미국을 상대로 전투를 벌인 실전 군대였다. 더구나 그들은 베트남의 정글을 이용해 중국군을 괴롭혔다.

전쟁 발발 한 달 만인 3월16일, 중국은 돌연 ‘베트남을 혼내 주는 목표가 달성되었다’고 발표하며 베트남에서 철수했다. 세계는 의아해했다. ‘과연 이 전쟁의 승리자는 누구이고, 중국은 무엇을 얻었는가?’를 분석하기 바빴다. 학자들은 이 전쟁에서 중국은 그들이 베트남에게 주려는 ‘교훈’을 완성치 못했다고 결론을 내렸다. 사실 중국군은 발표된 숫자보다 훨씬 많은 군대를 동원했다. 20만 명이 아닌 60만 명이 참전했지만 베트남의 엉덩이를 때려 주는 데 실패한 것이다. 그 증거는 베트남이 캄보디아 주둔군을 철수시키지 않았고 계속 캄보디아를 지배했기 때문. 이 중국과 베트남의 짧지만 화끈한 조우는 세계를 혼란에 빠트렸다. 같은 사회주의권 국가의 전쟁으로 ‘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다’는 금언을 다시 상기시킨 것이다. 여기서 베트남의 유연성은 더욱 돋보였다. 베트남은 이 전쟁을 결코 자랑하지 않은 곳이다. 중국의 체면과 자존심을 상하게 하지 않았다. 중국과 베트남의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랑선에는 전사자 묘역이 있다. 이곳에 베트남은 이런 글귀를 새겼다. ‘잊지 말라. 강대국은 약소국에 끔직한 일을 저지른다. 이는 강대국은 스스로에게 약속을 저버릴 수 있는 권리를 주기 때문이다.’

베트남은 강인하고 유연하다. 용서는 하지만 잊지 않는다. 그들의 이런 인식과 전통은 지금도 베트남인의 가슴에 깊게 각인되어 있다.

박항서 감독이 U23 축구 대표팀이 결승에서 패하고 고개를 숙이자 “고개 숙이지 말라. 너희들은 자랑스럽게 그리고 열심히 했다”라며 그들의 자긍심을 일깨워 주었다. 그리고 ‘작고 약한 체격과 체력 때문에’라는 그들에게 ‘훈련으로 이를 극복’하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축구의 전술, 스타 플레이어, 축구 저변의 확대, 국가와 단체의 지원과 국민의 관심 등도 강한 축구 대표팀을 만드는 데 매우 중요한 요소다.

하지만 그것에 앞서는 것은 ‘때문에’를 ‘불구하고’로 바꿀 수 있는 리더십이다. 박항서 감독은 베트남인들의 저력, 즉 수천 년 동안 외세에 맞서 저항하고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힘을 밖으로 끄집어낸 것이다. 베트남의 국기는 붉은 바탕에 노란색 별 하나가 새겨진 ‘금성홍기’다. 본래 이 국기는 베트남의 독립을 위해 싸운 이들이 흘린 붉은 피와 베트남 민족을 상징하는 노란색 별이었다. 그리고 베트남 통일 이후 별은 베트남 공산당을, 붉은색은 인민 혁명을 상징한다고 한다. 우리에게 월남전과 쌀국수의 나라에서 이제 박항서라는 매개체를 통해 온전한 모습으로 다가온 베트남. 그 나라의 역사와 민족성 그리고 끈질긴 생명력을 알게 된다면 베트남은 더 가깝게 다가 올 것이다.

[글 김도준 사진 위키미디어, 픽사베이 참조 및 인용 『베트남과 그 이웃 중국』(유인선 지음 / 창작과 비평사 펴냄)]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667호 (19.02.26) 기사입니다]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