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5.23 (목)

신사동 新沙洞-공존이 아름다운 동네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강남구 신사동은 ‘가로수 길’을 잉태한 곳이다. 가로수 길은 단순한 길이 아니다. 도시의 발달 과정을 그대로 간직한 곳이다. 정착하고, 변형되고, 번창하고 그리고 재탄생하는 것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피, 땀, 눈물’은 필연이겠지만 그래서 신사동은 50년 강남 개발의 이력서인 셈이다.

시티라이프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이름이 같은 사람을 우리는 ‘동명이인’이라 부른다. 흔한 이름이나 유난히 듣기 좋은 이름일수록 동명이인이 많다. 이름에 점잖고 멋진 ‘신사’ 자가 들어가는 동네가 서울에만 무려 세 곳이 있다. 바로 신사동이다. 독자들은 바로 강남구 신사동, 은평구 신사동을 떠올리겠지만 하나 더 있다. 바로 관악구 신사동이다. 관악구 신사동은 본래 신림4동이었는데 신사동으로 바뀌었다. 신림사거리 ‘문화의 거리’ 일대를 지칭한다. 물론 이들 세 신사동은 한자음으로 구분된다. 이 중에서 강남구 신사동을 들여다보자. 신사동 일대는 ‘새말’이라 불리는 모래밭이었다. 한강 이북 한남동 새말나루터에서 배를 타고 건너던 곳이다. 이 한자음을 따 ‘신’을, 그리고 모래 동네라는 ‘사평리’에서 한 음을 따 ‘신사동’이 되었다. 강남구 신사동은 강남으로 들어서는 관문이다. 제3한강교, 경부고속도로, 강남대로로 이어지며 강남이 개발되기 시작했다. 신사동은 사방으로 압구정동, 논현동, 잠원동과 접하지만 공교로운 것은 신사동보다 인근 동네가 주거지로 그리고 본격적인 강남 문화의 원류로 발전했다. 이에는 다 이유가 있다. 신사동에 맨 처음 자리한 것은 유흥업소다. 1970년대 중반부터 강북의 각종 유흥업소들이 신사동사거리를 중심으로 몰려들었다. 그러면서 이 유흥업소를 찾는 유입 인구가 늘어났고 자연히 일대가 개발되기 시작했다. 물론 강남을 상징하는 아파트 단지는 신사동에 들어서지 않았다. 대신 작은 빌라, 연립 주택, 재래시장, 조그마한 가게들이 신사동의 주류를 차지했다. 신사동사거리에서 왼편 도산대로로 연결되어 압구정동 도산공원까지 이어지는 라인이다. 당시 신사동의 옆 동네 압구정동은 한남대교를 기점으로 미성, 현대, 한양아파트 단지가 조성되고 현대백화점이 들어서면서 강남의 중심이 된다. 이른바 ‘오렌지 문화’를 만들었던 로데오가 조성된 것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신사동은 왕복 2차선의 조그마한 가로수 길이 있었지만 그저 가로수만 자라는 동네에 불과했다. 이 신사동에 새 바람이 분 계기는 한 화랑이 문을 열면서부터다. 1978년 인사동의 터줏대감 예화랑이 현대아파트 맞은편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야말로 문화 불모지에 처음 깃발을 꽂은 것. 인사동의 여러 화랑들이 신사동으로 이전하기 시작했고 신사동은 일약 ‘강남 고급 문화의 중심’이 된다. 그러면서 1990년대 전후 에스모드, 서울모드 등의 패션 스쿨이 신사동에 자리 잡았다. 동네에는 활기가 일기 시작했다. 젊은 디자이너들이 드나들자 이들을 수용한 갤러리, 패션, 액세서리, 카페들이 속속 자리 잡았다. 물론 신사동 전성시대, 즉 가로수 길이 유명세를 탄 계기는 압구정 로데오가 활기를 잃어 가면서다. 신사동은 압구정의 에너지를 그대로 흡수해 가로수 길의 번영을 이루었다.

젠트리피케이션의 폐해를 낳기도 했지만 신사동에는 그 동네만의 독특한 문화가 있다. 그것은 공존이다. 대형 브랜드 숍, 레스토랑, 프랜차이즈 커피숍들이 가로수 길의 양쪽을 차지했지만 가로수 길의 가지 길 격인 세로수 길이 번성하고 그 뒤로는 40년 전 신사동 정착 당시의 낡은 건물들이 개축을 통해 존재한다. 그래서 신사동에 가면 강남의 이력서를 들여다볼 수 있다.

[글 장진혁 사진 위키피디아]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667호 (19.02.26) 기사입니다]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