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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0 (금)

核 대신 도이머이…베트남 쯔엉찐의 결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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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더가 바꾼 北·베트남 운명 ① ◆

매일경제

2차 미·북 정상회담을 일주일여 앞둔 베트남 수도 하노이의 관문 노이바이(Noi Bai) 국제공항. 세계 45개 항공사가 취항해 365일 24시간 불을 밝히는 이곳은 매년 1000만명에 가까운 이용객들이 드나든다. 공항 당국은 노이바이 공항과 통하는 비행편을 늘리고 싶다는 각국 항공사들 요청이 빗발쳐도 '항공기 슬롯이 없다'는 이유로 손사래를 치고 있다. 공항 앞 도로는 언제나 택시들로 장사진을 이룬다. 이처럼 사람과 자본이 몰려드는 베트남은 1986년 단행한 개혁·개방 정책인 '도이머이(Doi Moi·쇄신)'가 성공하면서 세계의 공장이자 투자처로 각광받기 시작했다.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 자료에 따르면 도이머이 초기인 1986~1990년 3370만달러에 불과했던 연평균 외국인직접투자(FDI)가 2009~2016년에는 92억4840만달러로 폭증했다. 1990년대 중반 미국과 관계 개선에 성공하고 동남아시아국가연합(아세안)에 가입한 베트남은 도이머이를 바탕으로 성장 가도를 달렸다.

2019년 2월 베트남과 북한 사이에 놓인 '30년 차이'를 만든 핵심적인 요인은 지도자의 결단이었다. 핵심은 과감한 개혁·개방과 대미(對美) 관계 정상화였다. 개혁·개방이 변화를 위한 지향점이었다면 미·베트남 수교는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필수요건이었다.

국부(國父)인 호찌민 주석과 더불어 '공산당 5인방'인 쯔엉찐 전 공산당 서기장은 1975년 종전 이후 사회주의 통일을 완성한 베트남이 극심한 식량 부족과 재정 적자 등으로 몸살을 앓자 1980년대 초반 실용주의 개혁 노선인 도이머이를 주창했다. 김종욱 청운대 베트남학과 교수는 "쯔엉찐은 경제난에 봉착하자 새로운 방식을 고민하게 됐고 과감히 변화를 선택했다"며 "친중(親中)파로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을 참고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쯔엉찐은 1986년 12월 당 대회에서 '도이머이 시대'를 선언하며 시장경제 토대를 세웠다. 도이머이 이후 베트남 경제는 6~7%에 이르는 고성장세를 기록하고 있다.

반면 '혁명의 수도' 평양의 대문 격인 순안국제공항은 그야말로 정적에 휩싸여 있다. 북한은 1989년 프랑스 상업위성이 영변 비밀 핵시설을 촬영·공개하며 북핵 문제가 불거진 이후 미국과 30년간 핵을 두고 밀고 당기기를 거듭하는 동안 세계에서 고립됐다. 이어 북한은 잇따른 핵·미사일 도발로 유엔과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에 겹겹이 싸이고 주요 국가의 여행금지국 리스트에 올랐다.

[특별취재팀 = 김성훈 기자 / 안정훈 기자 / 하노이 = 홍장원 특파원 / 아시아 = 임영신 순회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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