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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4 (금)

[신년기획]다·만·세 100년, 만세시민이 쏘아올리고 촛불시민이 되살린 ‘공화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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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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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1운동을 코앞에 둔 2월 말. 보성사(인쇄소) 직원인 인종익은 직접 인쇄한 기미독립선언서 수백장을 지방을 돌며 배포했다. 그는 3월2일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무수한 고문과 구타가 이어졌다. 3월5일 청주경찰서 취조실, 일경이 물었다. “그대들이 독립을 선언하면 황제 등 수뇌는 누구로 하여금 시킬 것인가.” 인종익은 이렇게 대답했다. “지금의 세계를 보건대 모두 민주공화정체다. 물론 민주공화정체를 하려고 했을 것이다.”

1919년 4월11일 중국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된 직후인 4월23일 경성에서 국민대회가 열렸다. 일단의 학생들이 깃발을 들고 만세를 부르다가 일경에 체포됐다. 그들의 깃발에는 ‘공화만세’라고 쓰여 있었다.

그리고 10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2016년과 2017년 서울 광화문광장.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을 촉구하는 수백만 시민의 촛불집회가 이어졌다. 시민들은 어깨를 겯고 헌법 1조 1항을 노래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민주공화국 대한민국’ 100년. 3·1운동 이후 수립된 임시정부가 마련한 임시헌장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었다. 대한민국이란 공동체는 처음부터 ‘민주’와 함께 ‘공화(共和)’라는 토대 위에서 출발했다.

공화의 정신은 일제강점기 임시정부 헌법들과 해방 후 제헌헌법을 관통하며 흘렀다. 1987년 개정된 지금의 헌법 1조 1항도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이다. 그러나 독재정권들은 반공과 억압의 이데올로기로 공화를 전유했고, 그 결과 민주공화국에서 반쪽이 사라졌다. 공화는 때론 민주와 대립되는 것으로까지 비쳤다.

공화를 부활시킨 것은 지난 100년의 역사를 일궈온 평범한 시민들이었다. 공공의식과 애국심으로 촛불을 든 시민들은 “이게 나라냐”고 외치며 위기에 처한 국가공동체를 구했다.

여전히 ‘독재의 후예들’은 공화주의를 민주주의를 흠집 내는 용도로 활용하며 공화를 오염시키고 있다. 그러나 극단적 사회 갈등과 공공성 붕괴를 목도하고 있는 지금, 공생과 공존의 이념이자 가치인 공화주의는 오히려 절실하다.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국가이자, 공화국이다.

■ ‘민주공화국’의 사라진 반쪽, 100년 만에 시민들이 소환했다

<2부> 다시 100년의 꿈 … 공존과 평화로 ② 공화의 부활

■ 공화, 대한민국의 출발

1919년 3·1운동 나선 시민들

이미 민주공화정에 열망 가져

임시헌장과 제헌헌법 1조부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 명시


100년 전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으로 출발했다. 임시헌장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었다. 민주공화국이란 표현은 당시 주변국인 중국·일본의 수많은 헌법문서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독창적이었다. 유럽에서도 1920년대 초 체코슬로바키아 헌법과 오스트리아 연방헌법에서 민주공화국이란 표현이 최초 등장했다.

민주공화국은 일제강점기 임시정부의 5차 개헌에도 불구하고 제1조의 자리를 지켰다. 그만큼 3·1운동을 통해 새로운 국가 건설을 꿈꿨던 시민들의 강렬한 여망이 민주공화국에 담겼기 때문이다. 1948년 대한민국 제헌헌법 제1조도 당연히 민주공화국이었다.

그렇다면 당시 공화제 혹은 공화주의는 어떤 의미를 가졌을까. 현대적 의미의 공화주의란 시민이 주인인 ‘정체’, 그리고 공공성과 공존, 균형을 추구하는 ‘이념’을 동시에 가리킨다. 일단 당시 공화제는 ‘왕이 없는 체제’라는 국체나 정체로 받아들여졌다. 이는 두 가지 차원에서 ‘혁명적’이었다. 하나는 복벽주의(군주제 회복)의 거부이다. 독립 후 왕정이나 군주제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의지가 담겼다. 다른 하나는 일제의 정점인 천황제에 대한 저항이다. 공화주의는 독립 후 왕이 없는 국가뿐만 아니라 지금 왕이 있는 일제를 겨냥한 폭발력을 가졌다.

공화의 이념도 임시정부 헌법이나 제헌헌법에 투영됐다. 대표적으로 임시헌장과 제헌헌법 기초자인 조소앙의 삼균주의이다. 균형, 균등, 공공을 중시하는 삼균주의는 공공성과 시민연대를 강조하는 공화주의의 다름 아니다. 조소앙의 이념은 임시정부 헌법들의 이념적 기초가 되었고, 제헌헌법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제헌헌법의 각종 경제조항은 무제한적 시장 자유가 아니라 균등, 균평, 공공성에 초점을 두고 있다. 박찬승 한양대 교수(사학)는 “제헌헌법은 공공의 복리, 공공의 이익을 기준으로 자유와 평등을 절충하려고 했는데 공공의 이익, 공공의 선을 중시하는 이념이 공화주의”라며 “대한민국의 건국정신은 바로 공화주의였다고 말할 수도 있다”고 평가했다.

당시 독립운동가들의 공화에 대한 이해도 유사했다. 1932년 일경에 붙잡힌 독립운동가 조용하는 임정의 공화에 대해 “경제, 정치의 평등을 기본으로 하는 진정한 민주공화국을 건설”해 “안으로 국민 각자의 균등한 생활을 확보하고 밖으로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의 평등을 실현함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구가 1935년 설립한 한국국민당은 창당선언문에서 “전민적(全民的) 정치, 경제, 교육 균등의 3대 원칙 확립에 의한 완전한 민주공화국 건설”이라고 밝혔다.

■ 변질, 독재의 암흑기

독재 정권이 정당성 강조 위해

공화 이데올로기 심각한 왜곡

균등·공공성 중시한 헌법도 후퇴

시민들, ‘공화’에 부정적 인식


그러나 대한민국 출발의 한 축이었던 공화는 독재정권 시절 변질된다. 이승만·박정희·전두환 정부를 지나면서 공화주의는 심각하게 왜곡됐다. 그들이 독재정부의 정당성을 위한 이데올로기로 전용했기 때문이다. 이에 시민들은 민주주의란 기치를 들고 저항했다. 한짝으로 시작한 민주와 공화는 ‘분리’됐다. 1954년 사사오입 개헌과 1962년 군정하 개헌을 거치면서 균등과 공공성을 중시하는 헌법 조항도 크게 후퇴했다. 독재정부 시절은 ‘가짜 공화주의’가 횡행하는 공화주의의 암흑기였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냉전진영론에 입각해 공화를 전유했다. 그는 ‘반공주의적 공화론’을 펼쳤다. 그의 공화에 대한 시각은 1955년 3월26일 ‘제80회 탄신 경축식전에서의 인사’에서 명징하게 드러난다. “세계 모든 나라의 자유를 위해서 반공하는 십자군을 지지하는 남녀들이 한국을 인류의 자유와 공화주의의 선봉으로 보는 바입니다.”

이 전 대통령은 야당을 비판하는 무기로도 공화를 동원했다. 그는 1952년 야당의 내각제 개헌 요구에 대해 “남의 나라 공화주의를 모방하려는 중 (중략) 가장 좋지 못한 것을 먼저 모방”한다고 비난했다. 또 1954년 한국민주당이 민주국민당으로 발전해 야당 역할을 수행하자 “민주당을 개조해서 보통평민들과 소위 하등민중이라는 사람들을 많이 포함해서 공화제도를 만들기 전에는 내가 그 정당에 가입을 원치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당시 공화는 독재정부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이승만 정부의 3·15부정선거에 맞서 일어난 4·19혁명 당시 시민들은 공화를 저항담론으로 썼다. 단적인 예로 거리시위에 나선 서울 대광고 학생들은 “3·1정신은 결코 죽지 않았다. 우리 조국은 어디까지나 민주공화국이다”라고 외쳤다.

박정희 정부하에서 공화는 완전히 변질됐다. 박정희 군부는 ‘반공화적인’ 쿠데타 명분으로 공화국을 언급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61년 5·16쿠데타 직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신분으로 “진정한 민주공화국 재건”을 주장했다. 그해 미 외교협회 연설에서도 “새롭고 진정한 민주공화국의 굳건한 토대를 이룩하기 위하여 헌신적으로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1963년 전역식 연설에서도 “민주공화의 낙토” 건설을 쿠데타 명분으로 내세웠다. 박 전 대통령이 1963년 창당한 집권당 당명이 민주공화당인 것도 박정희 정부 시절 왜곡된 공화주의의 상징적 사례다. 공화당의 또 다른 설계자인 김종필 전 총리가 당명을 프랑스 혁명의 공화주의에서 차용했다고 밝힌 것도 아이러니다. 박정희 정부는 헌법에서 민주공화국을 삭제하지 못했지만 유신독재 체제를 구축함으로써 실제로는 공화국을 말살했다.

12·12쿠데타와 5·17내란으로 헌정질서를 유린한 전두환 전 대통령도 공화를 즐겨 사용했다. 그는 1982년 제헌절 경축사에서 “우리 모두 헌법을 제정하고 민주공화국을 창건하던 당시의 감격과 기본정신을 다시 한번 가슴 깊이 되새겨 민주, 정의, 복지가 구현된 통일국가를 달성하는 데 매진할 것을 다 같이 다짐하자”고 연설했다. 그는 1984년 3·1절 기념사에서는 “세습왕조가 아닌 민주공화의 나라로서 영원한 자유와 독립을 향유해야 하며, 평화의 창조에 공헌해야 한다는 것이 3·1운동이 우리 민족 모두에게 제시한 목표”라고 주장했다. 이렇게 독재정부가 공화를 전유하면서 시민들은 공화에 대해 부정적 인식을 갖게 됐다. 독재정권에 대항해 시민들은 민주주의를 부르짖었다. 이로써 ‘독재 대 민주’라는 구도가 형성됐다. 저항담론에서 ‘공화’는 거의 표출되지 않았다.

■ 부활, 촛불시민들이 쏘아올린 공화

6월항쟁·수평적 정권교체 이후

형식적 민주주의는 진전됐지만

공공성과 공존의 문제 제기되며

한국사회서 공화주의가 재조명


1987년 6월항쟁과 대통령 직선제 개헌, 1997년 수평적 정권교체로 형식적으로나마 민주주의는 진전됐다. 그러나 1997년 외환위기는 민주주의만으로 해결될 수 없는 공공성과 공존의 문제를 제기했다. 이때를 전후해 한국 사회에서 공화주의가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미국산 쇠고기 반대 촛불집회와

박근혜 탄핵 촉구 촛불집회 거쳐

공동체성을 자각한 시민들이

진정한 공화정 위한 실천에 나서


공화주의에 대한 본격적인 관심은 2008년 미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로 촉발됐다. 수개월간 지속된 촛불집회에서 시민들은 헌법 1조 1항을 외쳤다. 일방적 정책을 밀어붙이는 이명박 정부에 대한 반대를 넘어 안전한 국가공동체를 바라는 시민들의 공적 열망이 담겼다는 분석이 나왔다. 당시 안병진 경희대 교수(정치학)는 “시민공동체의 안전한 삶 자체가 곧 국가라는 공화주의의 핵심 이념과 국가를 일부 특권의 사유물인 양 이해하는 반공화주의적 이명박 정부의 대립이 극적으로 표출된 장”이라고 진단했다.

공화주의는 2016년과 2017년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촉구 촛불집회에서 부활했다는 의견이 많다. 촛불집회는 시민들이 공공성을 발휘해 국가공동체를 정상화시키려는 공화정신의 발현이라는 시각이다. 시민들은 또다시 헌법 1조 1항을 노래했다. “이게 나라냐”는 전 국민의 구호가 됐다.

임채원 경희대 교수(행정학)는 “한 공동체의 구성원이 하나의 공동체임을 깨닫지 못하다가 어떤 사건을 계기로 자각하는 시점이 있다”며 “우리나라 역사에는 촛불집회가 이 사건에 해당한다”고 분석했다. 또 “대한민국은 그간 의례적 국호이자 하나의 구호에 그쳤으나 촛불집회라는 시민적 자각을 통해 민주공화국이라는 진정한 의미를 되찾았다”면서 “지난 30년간 우리 사회를 지배한 신자유주의적 흐름에 대해 시민들이 근본적 반성을 요구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윤평중 한신대 교수(철학)는 “촛불혁명은 진정한 공화정을 구현하려는 한국 시민의 공공적 실천”이라며 “공민의식과 애국심으로 무장한 자유시민이 수호하는 국가, 바로 그것이 촛불혁명이 지향하는 바”라고 진단했다.

■ 소환, 현실이 불러내는 공화

지금도 공화를 왜곡해 전유하는 정치세력이 있다. 일부 보수세력은 공화주의를 문재인 정부를 흠집내는 준거로 이용한다. 예를 들어 자유한국당 김무성 의원은 지난해 8월 말 공화주의 토론회를 개최한 자리에서 “정의와 공공의 선을 추구하는 공화주의를 새로운 시대정신으로 삼아야 한다”면서 “문재인 정부 행태를 보면 우리만 옳고 우리만 선하다는 선민의식을 갖고 국가경제를 굉장히 힘들게 하는 좌파 사회주의 포퓰리즘으로 일관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일부는 공화주의를 민주주의 대척점에 놓고 민주주의를 비판하는 무기로 사용하기도 한다. 김주성 전 한국교원대 총장은 같은 토론회에서 “공화주의를 살펴보려는 까닭은 최근 우리의 정치의식이 너무 민주주의에 경도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최저임금, 탈원전, ‘노영방송화’ 등을 언급한 후 “민주주의는 자기 파괴의 생리적 시한폭탄을 장착하고 있다”며 공화주의를 대안이라고 내세운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민주주의와 공화주의의 결합체인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과 함께 출발한 공화의 정신은 여전히 유효하다. 공공성의 파괴, 경제적 양극화, 사회 갈등 심화라는 지금의 현실이 ‘진짜’ 공화주의를 불러내고 있다.

채진원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는 “산업화와 민주화의 성과를 지금 국민 모두가 아니라 일부만 공유하게 됐다”며 “그 결과 경제 양극화, 이념 대결, 좌우 진영정치 등이 나타나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개인과 국가가 서로 같이 잘 사는 게 공화주의”라며 “적과 동지라는 이분법보다 국민을 중심에 놓고 국민의 이익인 민생, 권리, 자유를 해결하기 위해 서로 경쟁과 협력을 하는 것이 지금 필요한 공화주의”라고 말했다.

김경희 이화여대 교수(정치학)는 “지금 가장 큰 문제가 경제와 권력의 불균등, 그리고 ‘갑질’이라고 할 수 있다”면서 “민주주의 시대라고 하지만 헌법 제1조 1항인 민주공화국을 제대로 실현할 것인가는 공화에 더 명확하게 표현돼 있다”고 분석했다. 그는 “공화주의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것이 연대인데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들이 서로 배려하며 같이 잘 사는 나라를 만들자는 것”이라며 “다름을 인정하면서 공존, 공생, 공영의 길을 찾아나가자는 것이 공화주의”라고 말했다.

※참고 : 김경희 <공화주의>, 박찬승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안병진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와 보수주의 위기의 뿌리>, 오제연 ‘이승만 정권기 공화 이해와 정치적 전유’, 윤평중 <국가의 철학>, 이영록 ‘한국에서의 민주공화국의 개념사’, 임채원 ‘마키아벨리적 모멘트로서의 시민적 공화주의’, 정상호 ‘한국에서 공화 개념의 발전 과정에 대한 연구’ 등


강병한·박광연 기자 silverma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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