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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7 (금)

[신년기획]다·만·세 100년, 대립 개념 오해 받지만 ‘민주’ 옆엔 ‘공화’가 단짝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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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평중·김호기 교수의 ‘공화주의’ 이야기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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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성 붕괴되고 극단적 분열된 한국사회의 현실이 공화주의 불러내

‘갑질’ 문제 등 자의적 지배가 일어나지 않게끔 법을 만드는 게 출발점

‘다수결’ 민주주의, 소수자 보호하는 공화주의와 결합해야 더 나아져

통일대한민국의 헌법적 가치, 보편 인권 강조하는 ‘민주공화국’이어야


‘공화주의’가 주목받고 있다.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부터 2016년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촛불까지 주권자들이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헌법 1조 1항의 정신을 우리 사회 전면에 불러내면서다. 정치권과 학계는 대안적 이념이나 정치체제로서 공화주의의 가능성을 주목하고 있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민주공화제’를 내세운 이후 100년 만에 부활하고 있는 ‘공화(共和)’의 비전은 무엇인가.

경향신문은 공화주의에 천착해온 윤평중 한신대 교수(철학)와 김호기 연세대 교수(사회학)의 대담을 마련했다. 두 교수는 공공성이 붕괴되고 극단적으로 분열된 한국 사회 현실이 공화주의를 불러내고 있다고 진단했다. 윤 교수는 공화주의에 대해 “나라다운 나라에 대한 비전”, 김 교수는 “국민 모두가 더불어 사는 나라”라고 정의했다. 공화주의는 무엇이고, 왜 필요한가. 대담은 지난 12일 경향신문사에서 두 시간가량 진행됐다.

- 공화주의가 주목받고 있다.

윤평중 교수(이하 윤) = 왜 이 시점에서 공화주의가 화두가 됐는지 상징적인 예를 들어보겠다. 대담 전 대한민국이라는 정치공동체를 상징하는 거리인 광화문광장을 지나왔다. 거기에 세종대왕상과 이순신장군상이 있다. 현대 민주공화정을 상징하는 인물 동상이 시민들의 공감대하에서 배치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에 대해 합의된 인식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화폐도 마찬가지다. 모두 조선시대 인물만 나와 있다. 그분들하고 민주공화국으로서의 대한민국이 무슨 직접적인 상관이 있나. 지금 광화문광장에 이승만이나 김구를 세울 수 있겠나. 차선책으로 두 분을 다 세우자고 하지만 극도의 분열과 혼란만 일으킬 것이 명약관화하다. 이것이 2019년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 그렇다면 공화주의란 무엇인가.

김호기 교수(이하 김) = 공화국이란 말의 기원은 라틴어인 ‘레스 퍼블리카(res publica·공적인 것)’로 로마시대 사상가 키케로가 사용했다. 키케로에 따르면 공동의 법과 이익에 의해 결속된 공동체, 그것이 곧 공화국이다. 공동체가 제대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시민들이 공공선을 위해 노력하는 시민적 덕성(virtue)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이것이 통상적인 공화국 개념의 역사적 기원이다. 키케로가 얘기하려고 했던 것은 시민 모두가 주인이 되는 나라, 이것이 공화국이라는 것이다.

윤 = 부연하자면 모든 시민이 주인이 되는 정치공동체라고 하면 민주정과 공화정이 구분 안되는 문제가 발생한다. 민주정은 다수 민중의 지배이다. 공화제란 모든 종류의 정당하지 않은 지배 자체를 극복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공화정은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들이 공공선을 지향하는 나라이다. 공공선(the public and common good)은 영어로 옮기면 뜻이 분명해진다. 공공성은 공적인 것(public)과 공동성(common)의 변증법적 종합이다. 공화주의 혹은 공화정은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들이 스스로 동의한 법질서를 통해 공공선과 공공성을 육화해가는 성숙한 정치공동체이다.

- 공화주의의 핵심 가치는 무엇인가.

김 = 현대적 공화주의는 세 가지가 핵심 요소이다. ‘시민적 덕성’과 ‘법의 지배’, 그리고 ‘비지배적 자유’가 그것이다. 시민적 덕성과 법의 지배는 전통적 공화주의에서도 강조돼왔던 사항이다. 공화주의는 자유주의와 비교할 때 의미가 선명해진다. 자유주의가 타자의 간섭으로부터의 ‘소극적 자유’를 중시한다면, 공화주의는 스스로를 지배할 때 진정 자유로운 ‘적극적 자유’와 사회 구성원으로 동등한 권리를 누리는 ‘비지배적 자유’를 부각시킨다.

- 공화주의는 민주주의와 다른가.

윤 = 민주주의는 민중의 지배를 말한다. 반면 공화주의는 지배를 거부하는 것이다. 다수 민중의 지배는 소수자의 권리 침해로 이어질 수도 있다. 공화정은 다수 민중의 결정을 존중하면서도 소수와의 공존을 추구한다. 이 부분이 민주주의와 공화주의가 갈라지는 지점이다.

김 = 민주주의의 핵심은 인민주권과 다수결 원리이다. 인민주권은 다원민주주의가 극단화되면서 무정부주의로 이어질 수 있다. 다수결 지배는 소수자 인권 보호라는 문제에 직면한다. 여기서 공화주의적 상상력이 중요하다. 공화주의가 갖고 있는 시민적 덕성은 다원민주주의의 한계를 보완할 수 있다. 자기제한성과 관용의 정신이 시민적 덕성의 핵심인데 다원민주주의가 가져올지 모르는 무정부주의에 대한 제동장치가 될 수 있다. 소수자를 보호하는 것은 법인데 공화주의는 법의 지배를 강조한다. 이런 점에서 ‘민주주의’만 쓰는 게 아니라 ‘민주공화주의’ ‘민주공화정’이라고 쓰는 게 더 바람직하다. 민주주의는 훌륭한 정치 이상이지만 공화주의와 결합할 때 훨씬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문제의식이다.

- 지금 공화주의가 필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김 = 우리 사회의 현실에 있다. 하나는 공공성 붕괴이다. 모든 것들이 만인 대 만인의 투쟁 상태에 있다. 두 번째는 극단적인 이분법 사회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모두가 공유하는 공공의 가치와 이익을 발견하고 뿌리내리려고 시도해야 한다. 이것을 사상적으로나 정책적으로 가장 잘 지지해줄 수 있는 것이 공화주의다.

- 공화주의 필요성의 사례가 있나.

김 = 현대적 공화주의자들이 이야기하는 비지배적 자유, 이것의 핵심은 자의적 지배가 일어나지 않게끔 법을 제정하는 것이다. 현재 가장 큰 문제인 ‘갑질’을 보자. 갑질은 동등한 인격을 가진 타인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다. 이런 자의적 지배가 일어나지 않게끔 각종 입법을 하는 것이 공화주의의 출발점이다. 공화주의적 정책의 사례라고 생각한다.

경향신문

윤평중 한신대 교수(왼쪽)와 김호기 연세대 교수가 지난 12일 서울 정동 경향신문사에서 공화주의를 놓고 대담하고 있다. 이석우 기자 foto0307@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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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치만능론으로 들린다.

윤 = 정치공동체가 원활히 재생산되기 위해서는 법치주의와 함께 그 법에 대해 시민들이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동의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알렉시 토크빌은 이를 ‘마음의 습관’이라 불렀다. 우리 공동체가 생사의 위기에 직면하게 되면 홉스(Thomas Hobbes)적인 무정부주의 상태가 재연될 수 있다는 두려움을 한국 시민들은 마음속에 갖고 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시민들 사이 연대는 법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법치주의가 법만능주의로 왜소화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도 법의 공정성을 받쳐주는 마음의 습관이 있어야 한다. 촛불을 지나온 2019년 대한민국 사회는 과연 그런 마음의 습관과 공감대가 있다고 자신할 수 있는지 자문해야 한다. 공화주의의 비전은 공공성을 중시하면서 마음의 습관을 기를 수 있는 훈련이나 실천, 공통 감각의 공유를 지향한다. 대한민국이란 정치공동체가 한 단계 더 나아가려면 생활세계에서 공화주의적 상상력을 무한확장하는 훈련과 시민교육이 이뤄져야 한다.

- 공화주의는 왜 한국 사회에선 외면받아왔나.

윤 = 공화주의 용어 자체가 일종의 주홍글씨가 돼 있다. 요새 자유한국당 쪽에서 공화주의 담론을 들고나와 문재인 촛불정부를 비판하는데 매우 생뚱맞다. 여기에는 역사적 뿌리가 있다. 공화주의 담론은 수구적 성격이 강한 기득권층에 의해 전유돼왔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박정희 시대의 ‘민주공화당’이었다. 이것을 줄여 민주당이나 민공당이라 부르지 않고 ‘공화당’이라 불렀다. 그게 결정적 영향이다. 한국 수구가 공화주의 담론을 악용한 것 때문에 공화라는 말이 부정적으로 각인돼 있다. 그래서 공화의 반대편에는 민주가 있는 것처럼 개념 규정이 됐다. 공화주의하고 가장 거리가 먼 한국당에서 공화주의를 들고나오는 이율배반적 상황이 공화주의 담론이 왜곡된 현실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김 = 여기에 더해 공화주의를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알린 건 미국 공화당이다. 이 정당은 세계를 대표하는 보수당이다. 그러다보니 공화주의에는 별 근거 없이 보수적인 정치사상 아니냐는 오해가 덧씌워진 면도 있다. 현대 공화주의자들은 그 다수가 진보적 정치사상가들이다. 사상사적으로 공화주의는 진보주의에 가까운데 대중적 시각에서 파악하는 공화당은 상당히 보수적인 내적 긴장이 있는 셈이다.

- 공화는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헌장 1조에서 시작됐다. 올해가 100주년이다.

김 = 임시헌장 제1조에 담긴 핵심적 의미는 제국(帝國)에서 민국(民國)으로의 전환이다. 1920년 임정 신년 축하회에서 도산 안창호가 “대한민국 국민 2000만 모두가 황제”라고 했다. 1조 외의 조항도 주목해야 하는데 3조는 평등, 4조는 자유를 말한다. 민주공화국을 지탱하는 양대 가치가 자유와 평등에 있었다는 것을 민주공화국 100년에 되새겨봐야 한다.

윤 = 임시헌장은 경이적 문건이다. 임시정부에서 다섯 차례, 대한민국에서 아홉 차례 개헌을 했지만 대한민국이라는 표현과 민주공화제의 이념이 빠진 적이 없다. 식민지 치하, 독재정권에 의한 헌법의 변질과 왜곡에도 불구하고 민국과 공화정이라는 규정은 한번도 사라진 적이 없다.

김 = 임시헌장 1조는 민주주의를 부정한 1972년 유신헌법, 전두환 세력의 5공 헌법에서도 바꾸지 못했다. 누가 ‘너희 나라는 어떤 나라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민주공화국이다’라고 답변할 수 있다.

- 또 다른 공화국 100년을 바라보며 ‘통일 대한민국’의 헌법적 가치는 무엇이 되어야 하나.

윤 = 당연히 민주공화국이다. 민주주의와 공화주의는 진보나 보수 이념으로 축소될 수 없는 장대한 이념이다. 다만 통일담론은 당분간 절제해야 한다. 통일담론을 한반도 정세 변화와 결부시켜 진지한 담론으로 얘기하려면 대한민국 헌법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을 절충하거나 이를 종합한 제3의 미래지향적 헌법이 도출될 수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김 = 통일 대한민국 헌법의 일차적 가치는 보편적 인권에 있다고 생각하고, 따라서 통일 헌법 제1조에는 미국과 독일에서처럼 보편적 인권이 들어가야 한다고 본다. 여기에 더해 3·1운동 이후 지난 100년의 민주공화국에서 강조돼온 민주주의와 공화주의라는 가치도 들어가야 한다.

윤 = 헌법에 대해 첨언을 하자면 문재인 정부에서 내놓은 개정안이 있다. ‘국민’을 ‘사람’으로 바꾸고, 기본권과 국민주권을 대폭 확대·강화한 방안인데 전체적으로 바른 방향이다.

- 독일 통일 사례를 참고할 수는 없나.

윤 = 독일과의 근본적 차이점을 엄정하게 봐야 한다. 동독과 서독은 전쟁을 경험하지 않았다. 서독 정부는 통일정책을 명시적으로 내세운 바 없다. 서독은 동독과의 평화 공존을 목표로 세웠다. 독일 통일은 동독 인민들의 자발적 합의에 의해 동독이 독일연방공화국(서독)에 가입해서 이뤄졌다. 한반도 상황에서 통일을 이야기하려면 이 부분을 짚어야 한다. 남북 헌정질서를 고차적으로 종합한 제3의 헌정질서를 우리가 과연 생각할 수 있느냐.

김 = 통일로 나아가는 데 중요한 것은 먼저 평화체제 구축이다. 평화를 통해 통일로 나아가야 함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평화가 우선이냐 통일이 우선이냐는 논쟁도 있었지만 둘 다 중요하다. 통일도 준비해야 한다. 통일이 예정대로 올지 아니면 갑자기 올지 아무도 모른다. 따라서 통일을 차분하게 착실히 준비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윤 = 통일담론과 평화담론은 모순 관계가 아니다. 다만 현실적 문제가 엄존하기 때문에 평화체제 수립에 전력을 기울여야 한다. 통일은 평화구조가 뿌리를 내리고 남북한이 서로 교류하면서 잘 나아가다가 후손들이 선택할 수 있도록 남겨두는 지혜가 필요하다.

■ 특별취재팀

강병한·유정인·심진용·박광연 기자


정리 | 강병한·박광연 기자 silverma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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