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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7 (금)

25년전 일기·100쪽 메모… '미투' 결정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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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인가 치기인가 오기인가… 고 선생의 술자리 난장판"

중3 때부터 일기 써온 최영미, 고은 성추행 목격담 기록

조선일보

고은


"일기장이 거목(巨木) 쓰러뜨렸다."

고은 시인이 최근 본인을 성추행범으로 지목한 최영미 시인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지자 법조계에선 이런 반응들이 나왔다. 법원은 지난 15일 이 판결에서 고 시인의 성추행 의혹 중 일부를 사실로 인정했는데, 여기에서 최 시인의 과거 일기장이 결정적 증거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최 시인은 고 시인의 과거 성추행 행적을 언론에 폭로한 인물이다. 최 시인은 한 일간지를 통해 '고 시인이 1992~ 1994년쯤 술집에서 바지 지퍼를 열고 신체 특정 부위를 만져 달라고 했다'고 했었다. 이에 고 시인은 지난 3월 "나 자신과 아내에게 부끄러울 일은 하지 않았다"며 최씨 등을 상대로 소송을 냈다.

소송 초반은 최 시인에게 불리하게 흘러갔다. 20년도 지난 일이라 이 사건을 제대로 기억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문화계 인사들은 "고 시인의 영향력을 의식해 법정에 증인으로 서려고 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던 걸로 안다"고 했다.

그런데 최 시인이 25년 전 그의 일기장을 제출하면서 재판은 반전을 맞았다. 그는 중3 때부터 일기를 써왔다고 한다. 그는 일기장을 뒤지던 중 1994년 6월 2일 최 시인 사건에 대한 자기 심경을 쓴 구절을 발견했다. 일기장에는 '광기인가 치기인가 아니면 그도 저도 아닌 오기인가. 고 선생의 대(對) 술자리 난장판을 생각하며'라고 적혀 있었다.

법원은 이 부분을 최씨 주장이 사실이라는 걸 입증하는 증거로 채택했다. 재판부는 "이 일기가 조작됐다고 볼 증거가 없다. 고 시인의 비정상적 행동을 (최 시인이) 목격했음을 짐작하게 한다"고 했다. 최씨 일기장이 수십 년에 걸쳐 일자별로 기록돼 있어 해당 날짜 일기만 허위로 작성됐을 가능성이 없다는 것이다.

판사 출신인 이현곤 변호사는 "소송 당사자가 직접 작성한 서면은 기본적으로 일방적 주장이라고 보지만 일기장은 성격이 다르다"며 "일기장은 작성 시기가 명확하고 연속적으로 기록돼 있기 때문에 중요 증거가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했다.

조선일보

최영미, 심석희


'최영미 일기장'처럼 자기가 남긴 과거 기록이 재판이나 수사에서 결정적 변수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 경찰은 지난 7일 쇼트트랙 국가대표 심석희 선수를 성폭행한 혐의를 받고 있는 조재범 전 코치를 기소 의견으로 사건을 검찰로 송치했다. 심씨가 남긴 100쪽 분량 메모가 결정타였다. 심씨는 2014~2017년 성폭행 피해가 있을 때마다 자기 심경을 메모로 써놨었다. 2018년 일본 신혼여행 중 아내를 니코틴 원액으로 살인한 20대 남성도 살인 계획을 적은 일기장 때문에 발목이 잡혔다.

대형 사건에서도 마찬가지다. 안종범 전 청와대 수석과 이규진 전 부장판사의 업무수첩도 박근혜 전 대통령과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직권남용은 물론 본인의 가담 사실을 뒷받침하는 '자승자박'의 물증이 됐다.

다만 일기장과 메모에 조작 흔적이 엿보일 경우엔 증거로 인정되지 않는다. 한쪽짜리 메모도 작성 시점을 특정하기 어려워 증거로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신빙성이 의심될 경우 법원은 전문가에게 필적·재질 감정을 의뢰하기도 한다. 컴퓨터로 쓴 메모 파일의 경우엔 최종 수정 시점 등을 따진다.




[김은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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