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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현미경] 국경장벽 예산 확 깎이자… '국가비상사태' 카드 꺼낸 트럼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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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회 안거치고 장벽자금 조달 시도

'이민 문제가 비상사태냐' 논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반(反)이민 정책의 상징인 국경 장벽 건설 공약을 관철하기 위해 '국가비상사태'라는 초강수를 꺼내들었다. 연방 의회가 대폭 축소된 장벽 예산안을 통과시키자 이 예산안을 승인 서명하되 국가비상사태를 선포, 의회의 승인을 받지 않고 대통령 직권으로 다른 예산을 전용(轉用)하는 식으로 비용을 충당하겠다는 것이다. 야당은 즉각 의회의 비상사태 선포 해제권과 위헌 소송 등을 통해 대통령의 권력 남용을 저지하겠다며 반발했다.

상·하원 의회는 14일(현지 시각) 트럼프 대통령이 요구했던 장벽 건설 예산 57억달러 중 4분의 1에도 못 미치는 13억7500만달러 예산안을 압도적 찬성으로 통과시켰다. 통과 직후 백악관은 트럼프 대통령이 15일쯤 예산안 서명과 함께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ABC·뉴욕타임스에선 의회 승인 예산에 더해 비상사태 선포 이후 조달할 수 있는 장벽 건설 자금이 총 80억달러(약 9조원) 규모가 될 것이라는 보도가 나오고 있다. 국방부의 군시설 건설 예산(35억달러), 마약 차단 프로그램 예산(25억달러), 재무부 몰수 기금(6억달러)이 전용 대상이다. 이 돈으로 남부 국경 지대 인근의 사유지를 매입하고 정부 소유 땅을 국방부 소유로 이전한 뒤 군 사업으로 장벽을 쌓겠다는 것이다.

문제는 현재 미국의 불법 이민자 유입 문제가 '국가비상사태'에 해당되느냐는 것이다. 미 헌법은 천재지변이나 전쟁 위기 등 국가적 비상시에 대통령이 의회나 사법적 제약을 받지 않고 정부를 효율적으로 통제·운영할 수 있도록 한다. 트럼프는 국경을 넘어오는 중남미 난민들의 상당수가 무슬림 테러리스트와 마약·성폭행 등 강력 범죄자라며 국가 안보 위기 라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2000년 무렵 160만명에 달했던 미 불법 이민자 수는 2017년 40만명 선으로 떨어졌으며, 이민과 범죄율 증가의 상관관계도 입증되지 않았다.

뉴욕대 로스쿨 연구에 따르면 미 역사상 이처럼 인과관계가 불명확하고 만성적인 국내 사회 문제, 더구나 의회가 이미 결론을 내린 동일한 사안에 대해 국가비상사태가 선포된 전례가 없다. 그간 비상사태는 1933년 전국적 철강노조 파업, 1950년 한국전 참전, 2001년 9·11 테러, 2009년 조류독감처럼 대통령 권한 확대에 이론의 여지가 없는 사태에 한해 발동됐다. 2019년 현재까지 선포된 비상사태 58건 중 아직 유효한 것은 31건인데, 대부분 독재 국가 제재나 무기 확산 금지, 전략 물품 수출 금지 등을 규정한 지극히 상식적인 내용들이다.

상궤를 벗어난 트럼프의 비상사태 위협에 민주당은 14일 "독재자의 정신 나간 권력 남용"이라고 반발하며 "가능한 모든 법적 수단을 동원해 저지하겠다"고 밝혔다. 이는 의회의 비상사태선포권 무력화 권한, 다른 하나는 위헌 소송 두 가지 트랙을 뜻한다. 위헌 소송 시 현재 대법원이 '보수 법관 5명 대 진보 4명'의 구도이긴 하지만, 전통적으로 의회와 대통령의 권한 다툼에선 의회의 손을 들어준 적이 많다고 뉴욕타임스는 전했다.

의회에서도 트럼프의 승산은 높지 않은 분위기다. 1976년 제정된 국가비상사태법은 의회에 대통령의 비상사태 선포를 해제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그러나 40여 년간 의회가 이 권능을 사용한 적은 없다. 역대 대통령이 정치 논란이 불거진 비상사태 선포를 시도한 적이 없다는 뜻이다.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 재해 당시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정부 용역 근로자 임금을 축소해 구호비를 늘리는 내용을 담은 비상사태 선포안을 내놨는데, 민주당 하원의원 한 명이 이에 대한 비토안을 준비하자 부시가 하원 표결 직전 이 조항을 자진 철회한 적이 있다.

의회의 비상사태 선포 무력화 표결 시 현재 민주당이 과반 이상인 하원에서의 통과는 확실하다. 공화당이 6석 많은 상원에서도 수전 콜린스·마크 루비오·랜드 폴 등 최소 6~7명의 여당 의원이 비상사태 선포 반대를 표명했다. 다만 의회의 반대안에 트럼프가 거부권을 행사할 경우, 의회는 다시 의원 3분의 2 이상이 뭉쳐야 대통령을 꺾을 수 있다. 최근 CNN·폭스·퀴니팩대 등 각종 여론조사에 따르면, 장벽 건설용 비상사태 선포에 국민 3분의 2(66~76%) 정도가 반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공화당이 야당과 여론을 무시하고 대통령을 지지할지가 변수인 셈이다.

[정시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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