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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장기불황 세대 자아의 ‘막다른 골목’ -일본 드라마 ‘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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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김선영의 드담드담

일본 드라마 <좀비가 왔으니까 인생을 되돌아보고>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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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살의 미즈호(이시바시 나쓰미)는 남편 고이케(다이토 스케)와 별거하면서 고향에 내려와 두 친구와 동거 중이다. 다른 여자가 있는 고이케는 이혼을 재촉하지만 집착이라곤 없는 성격의 미즈호도 왠지 이번만은 쉽게 물러서지 않는다. 기다리다 못한 고이케가 도쿄에서 그녀를 만나러 오기로 한 날, 미즈호는 편의점에 들렀다가 갑작스레 좀비들의 습격을 받는다. 때마침 좀비들에게 쫓기던 고이케도 편의점으로 피신해 온다. 미즈호는 그와 함께 있던 친구를 보고 남편의 외도 상대가 그녀였음을 알아챈다. 밖에서는 좀비들이 점점 늘어나는 가운데 편의점 안에는 또 다른 긴장감이 감돈다.

현재 일본 엔에이치케이에서 방영 중인 <좀비가 왔으니까 인생을 되돌아보고>는 꽤 기묘한 드라마다. 좀비 아포칼립스 장르에서 흔히 펼쳐지는 이야기 공식에는 큰 관심이 없다. 가령 떼로 몰려오는 좀비들과의 스펙터클한 사투나, 생존자들끼리 살아남기 위해 죽고 죽이는 처절한 서바이벌의 드라마 같은 건 이 작품에서 기대하면 안 된다. 최근작으로 올수록 좀비들의 이동 속도가 빨라지는 좀비물 트렌드와 달리 이 드라마 속 좀비들은 만취 상태의 인간과 헷갈릴 만큼 느리고 둔하다.

이 독특한 좀비물의 지향점은 주요 인물들의 특징에서 잘 드러난다. 꿈도 목표도 없는 주인공 미즈호는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살다가 언제 죽어도 상관없는’ 삶을 원한다. 그리하여 좀비가 그녀를 물어뜯기 위해 다가오는 순간, 미즈호가 택한 행동은 누운 자세로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그밖에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꿈을 유보하고 프리터족으로 사는 간다(와타나베 다이치), 모든 욕망을 억누르고 티브이 홈쇼핑 시청으로 대리만족하는 미즈호의 엄마, 수많은 남자에게 상처받은 뒤 단지 자기에게 ‘무해’하다는 이유만으로 전직 야쿠자와 사귀는 유즈키(쓰지무라 가호) 등 대부분이 욕망을 거세하고 최소한으로만 움직이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이미 방향을 잃고 비슷한 자리를 느리게 맴도는 좀비들과도 유사하다.

이런 인물들의 모습 뒤에는 시대적 배경이 자리잡고 있다. 드라마는 미즈호의 출생년도를 헤이세이 원년인 1989년으로 밝힌다. 일본 경제의 거품이 꺼지고 있다는 사실을 아직 알아채지 못하고 희망에 부푼 채 시작된 헤이세이 시대는 곧 장기 불황의 터널 안으로 진입하면서 수많은 사회적 문제를 낳았다. 이 시기의 청년들은 사토리 세대, 히키코모리, 니트족, 프리터족, 초식계, 절식계, 1마일족 등 수많은 이름으로 불렸다. 이 호칭은 모두 삶의 조건이 최소 단위로 축소된 불황 시대의 그늘을 보여준다.

<좀비가 왔으니까 인생을 되돌아보고>는 이 축소된 자아들이 막다른 삶의 임계점에서 새롭게 각성하는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가만히 누워 죽을 때를 기다리던 미즈호가 “최후의 최후, 그 아슬아슬한 곳”에 몰리자, 갑자기 삶에 치열하게 매달리게 된 것처럼. 그런 면에서 이 드라마는 현재 연호 변경을 앞둔 일본이 헤이세이 시대와의 결별과 새로운 정신무장을 기원하는 이야기로 읽히기도 한다.

김선영 티브이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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