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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1 (화)

[매경이 만난 사람] 文정부 혁신자문 이정동 경제과학특별보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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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이정동 대통령 경제과학특별보좌관이 지난 11일 오후 인터뷰를 하기 위해 서울대 공과대에 있는 자신의 연구실로 들어가고 있다. [김호영 기자]


"개념설계 중요성을 인지하고 혁신을 하지 않으면 우리 사회는 죽은 호수처럼 갇혀 있는 위험에 빠집니다. 제도가 현상을 따라가지 못하는 '제도의 지체 현상'을 줄이는 것이 절실한 과제입니다."

지난달 23일 대통령 경제과학특별보좌관으로 임명된 이정동 서울대 산업공학과 교수(52)에게 '규제 샌드박스' 필요성에 대해 묻자 한 말이다. 이 특보를 만난 지난 11일 정부는 1차 산업융합 규제특례심의회를 열고, 국회 수소차 충전소 설치, 유전자 검사를 통한 질병진단 서비스 등 규제 샌드박스 적용 사업 4건을 승인했다. 그는 "기존 규제 개선 노력들은 대부분 규제 완화가 아니라 또 다른 규제를 만들어내는 데 그쳤다"며 "규제개혁은 이해관계자의 망에서 변화를 일으키자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대통령 경제과학특별보좌관은 과거에 없던 자리다. 문재인 대통령과 청와대는 그에게 자문을 받고자 특보 자리를 신설했다. '착각에서 축적으로 전환'을 강조하는 그는 '축적의 시간' '축적의 길'이라는 저서를 통해 우리나라가 재도약할 수 있는 전략으로 개념설계 역량 구축을 강조했다. 이 특보는 실행은 '어떻게' 하면 되는지가 관심사지만 개념설계에서는 '왜' 하는지를 파악하지 않으면 독창적인 밑그림을 그릴 수 없다고 설명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특보로서 어떤 활동을 하게 되나.

▷(청와대에) 외부의 목소리를 가능한 한 많이 전달하는 것이 내 역할일 것 같다. 내가 알고 있는 혁신과 관련한 현장 분위기를 많이 전달하려고 한다. 비상근으로 근무하기 때문에 사안이 있을 때마다 의견을 전달하려고 한다.

―지난달 30일 문 대통령과의 첫 오찬에서 어떤 이야기를 나눴나.

▷우리 사회 전반적으로 무엇인가에 도전해보자는 분위기가 필요하다는 말씀을 드렸다. 문 대통령도 작년 하반기부터 패러다임이 바뀔 때가 됐다는 말씀을 많이 했다. 이런 기조가 계속 이어질 필요가 있다는 말씀을 드렸다.

―정권마다 규제혁파를 내세웠지만 성과가 부진했다는 평가가 많은데.

▷규제개혁이라는 것은 이해관계자의 망에서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다. 이해관계자의 망에만 매몰돼 있다 보면 현상 유지에 그치게 된다. 규제개혁 필요성은 수차례 언급돼 왔지만 이렇다 할 변화가 없었다. 패러다임 전환은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하지 않으면 죽는 상황이라고 인식해야 한다. 이것은 생존의 문제다. 변화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다. 이해관계자의 망이 있지만 장기적 성장을 위해 비전과 공감대를 갖고 이해관계자들을 좀 더 다른 각도에서 설득하려는 노력을 했어야 한다. 폄하하는 것은 아니지만 기존 규제 완화 노력이 또 다른 규제를 만들었다. 기존 노력은 정태적 이해관계 조합에 그치면서 맴돌기만 한 것 같다.

―이번 규제 샌드박스 도입의 의의는.

▷규제 샌드박스는 기존 제도에 가로막혀 시도해보지 못한 것을 시범적으로 허용해주는 취지다. 이런 일 자체가 우리 사회에서 처음 시도하는 것이다. 기업이 휴대폰을 만들거나 자동차를 만들면서 하는 실험을 정부도 시작한 것이다. 정부도 사회 전체와 함께 거대한 실험에 들어간다. 첫 회의를 통해 모든 게 풀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11일 실무적인 실천 방안까지 제시되기 시작했다. 이번에 심의를 통해 허용된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주도면밀하게 과정을 관찰하고 시행착오를 봐야 한다. 허용하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다음 개정(revision)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개선하는 과정 자체를 우리가 해본 적이 없었다. 지금부터 실험을 하려면 과정을 따라가면서 개선하는 과정까지 효과적으로 체크해야 한다.

―규제 샌드박스로 임시 허가와 실증특례를 받은 기업이 경쟁자들을 가로막을 수 있다는 우려도 있는데.

▷제도 자체에 대한 오해라고 본다. 규제 샌드박스 심의는 개별 기업이 추구하는 구체적인 비즈니스 모델 자체에 대한 허가가 아니다. 해당 기업이 추구하는 모델들이 기존 규제에 비춰 장애가 있는지 없는지 확인해주는 것이다. 그런 모델과 관련해 규제장벽이 있으면 허용해준다는 것이다. 이후 해당 모델에 대한 권리 보호는 전혀 다른 문제다. 심의 과정을 거쳐 실험 결과가 확인되면 그와 유사한 모델을 추구할 수 있게 된다. 다른 사람이 대신 애써준 것이다. 그 변경에 가도 안 죽는다는 것을 남이 대신 확인해준 것이다. 일종의 사회적 실험이다. 늪인지, 마른 땅인지 확인해주면 독점적 허용권을 받는 것이 아니라 기업들의 활동 범위가 전반적으로 확대되는 것이다. 시행착오를 한 사람의 경험으로 남기는 게 아니라 사회 전체가 공유하게 된다. 이런 시행착오 경험은 사회적으로 과소 공급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 사회를 대신해 늪과 마른 땅을 구분해준 것에 대해서는 지원을 해줘야 한다.

―제도가 혁신을 따라가기에는 한계가 있는데.

▷제도도 인간이 만들어낸 창작물이다. 우리 사회는 제도를 만들어본 습관이 부족하다. 이제 추격자 시대에 갖지 못했던 습관이 필요하다. 우리만의 아이디어로 제도를 뒷받침해나가야 한다. 사회 속에서 기술이 발현할 때 제도라는 틀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제도라는 틀 자체를 없애달라고 하면 기술도 존립 기반이 없어진다. 제도가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빨리 맞춰 나갈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제도 지체 현상을 어떻게 빨리 줄여나갈 것인가가 중요하다.

―기업들이 서로 경험을 공유하는 문화가 약한데.

▷트랩, 함정이라고 본다. 우리가 나빠서가 아니라 효과적으로 빨리 성장하면서 나타난 현상이라고 본다. 기업들이 오픈 네트워크를 안 한 것이라기보다는 할 시간이 없었다. 빨리 발전하는 과정에서 우리 나름대로 체화된 습관이다. 그래서 패러다임을 전환하려면 모두 같이 움직여야 한다. 기업뿐 아니라 정부도 다 같이 움직여야 한다. 이제 후발국이 다 한국을 쫓아왔다. 시행착오를 혼자서 1000번 할 수 없다. 돈도 시간도 없다. 실패한 것을 서로 공유해야 한다. 그러면 한 기업이 200번씩만 시행착오를 해도 된다. 인수·합병(M&A)이 됐든 조인트벤처가 됐든 밑그림 단계에서 시행착오 총량을 줄이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개방형 혁신이다.

―위험공유 사회(축적 지향의 사회 시스템), 축적 지향 리더십(축적 지향의 문화)의 필요성은.

▷우리 상태를 평가하면 1인당 소득이 3만달러를 넘으며 몸이 커져 겉보기에는 성인처럼 보이지만 호르몬이 완전히 바뀌지 않은 상태다. 자연스러운 성장 과정이다. 제조업 혁신은 제조업을 없애자는 것이 아니다. 힘을 더 강하게 하자는 것이다. 그 속에서 신기술들이 착근하고 나름대로 실험하는 모판이 될 것이다.

―사이버 세계에서 시행착오를 최소화해 물리적 세계에 적용하는 '디지털 트윈'도 중요해지고 있다.

▷산업의 발전 역사는 시행착오를 효과적으로 줄이는 발견의 과정이었다. 이런 흐름이 있었는데 최근 큰 변화가 오고 있다. 변이를 미리 예측해 실험 디자인을 갖고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빅데이터와 인공지능을 통해 패턴을 거꾸로 읽어내는 시대가 열렸기 때문이다. 사전 디자인이 필요 없어지고 있다. GE와 지멘스 등이 전 세계에 망을 깔고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모아 인공지능을 적용해 중요한 인자를 발견해나가고 있다. 사고방식에서 큰 전환이 이뤄지고 있다. 계산 능력이 미약했을 때는 빅데이터가 의미가 없었지만 이제 크리티컬 매스(바람직한 결과를 얻기 위한 충분한 양)를 넘어섰다. 이렇게 사이버 세계에서 획기적으로 시행착오를 줄여 실제 세계에 들여오는 사고방식의 전환에 주목해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 사회가 패러다임을 전환하는 데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야 한다.

―블록체인이 가져올 변화는 어떻게 예상하는가.

▷이 문제를 생각하기에 앞서 규제 샌드박스 제도의 근본 정신을 잘 새겨볼 필요가 있다. 이는 금기에 도전하는 것이고 패러다임 전환의 첫걸음이다. 무조건적인 허용이 아니라 안전, 개인정보 보호 등 상식적인 문제를 고려할 것이다. 규제 샌드박스는 정당한 고민을 분산적으로 하기보다 위원회 등을 통해서 공론화하자는 것이다. 절차적 의미를 충실히 지킬 필요가 있다. 이런 자세로 새로운 산업 변화에 접근할 필요가 있다.

■ 이정동 특보는 누구
'축적의 길' 감명받은 文이 발탁…文에 "혁신은 조용필처럼" 조언

매일경제

"개인적으로 가수 조용필을 좋아한다. 조용필이 지난해 50주년 콘서트를 했는데, 놀라운 것은 항상 새로운 시도를 한다는 거다. 어떤 가수는 주구장창 같은 노래만 부르는데 조용필은 끊임없이 한 발씩 내딛는다. 나는 그게 혁신이라고 본다."

이정동 대통령 경제과학특별보좌관이 지난달 30일 청와대에서 문재인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한 말이다.

이 특보를 만나 이야기하다 보면 '지혜의 주머니'를 뜻하는 '지낭(智囊)'이 떠오른다. 고대 중국인들의 생활 속 지혜를 이야기식으로 담은 책이다.

이 특보가 저술한 '축적의 길' '축적의 시간'은 한국판 지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 대통령은 지난 대통령선거 때 한참 바쁜 일정 속에서도 '축적의 길'을 정독하고 감명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설 연휴 직전에는 전 청와대 직원들에게 '축적의 길'을 선사했다. 문 대통령은 "나의 실패를 우리 모두의 경험으로 만들면 나의 성공이 우리 모두의 행복이 될 수 있다"는 본인의 메시지까지 별도로 책에 넣어 돌렸다.

이 특보는 "책을 저술하면서 원형탈모가 생길 뻔했다"고 실토했다. 이 특보는 이 책은 많은 기업인과 현장에서 소통해 나온 결과물이라고 소개했다. 이 특보는 "우리 사회에서 내생적 혁신 엔진에 불이 안 붙는 것이 가장 안타까웠다"고 말했다. 그는 "축적이라는 관점에서 거꾸로 되짚어 보니까 우리 사회 곳곳에 축적이 부족했음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착각에서 축적으로 전환'이 절실하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고 한다.

그는 공학교수지만 적절한 비유를 통해 사안을 이해하기 쉽게 전달하는 탁월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 저명한 기술혁신 분야 국제학술지인 '과학과 공공정책(Science and Public Policy)'의 공동편집장을 맡고 있는 등 국내외에서 손꼽히는 기술경제·혁신정책 분야 전문가다.

▶▶ He is…

△1967년 대구 △대구 계성고 △서울대 자원공학과 학사·석사·박사 △서울대 산업공학과 교수 △한국공학한림원 정회원 △한국기업경영학회 회장 △한국생산성학회 회장

[대담 = 채수환 매일경제 정치부장 / 정리 = 박용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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