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100년해에… 생존 23명뿐
28일 숨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복동 할머니가 생전인 2014년 4월 15일 경기 성남시청 광장에 세워진 ‘평화의 소녀상’ 얼굴을 어루만지는 모습. 성남=뉴시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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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늙은이들 다 죽기 전에 하루 빨리사죄하라! 알겠는가 (일본) 대사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1000번째 수요집회가 열린 2011년 12월 14일 서울 종로구 주한 일본대사관 앞. 김복동 할머니는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이렇게 촉구했다. 또 “우리가 나이가 들어서 오늘내일이 바쁘다”며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를 요구했다.
하지만 김 할머니는 끝내 사과를 받지 못한 채 28일 오후 10시 41분 숨을 거뒀다. 향년 93세. 위안부 피해자의 상징이었던 그는 눈을 감기 다섯 시간 전쯤 “끝까지 싸워 달라”는 말을 남겼다고 윤미향 정의기억연대 대표가 전했다.
앞서 같은 날 오전 또 다른 위안부 피해자 이모 할머니가 향년 94세로 별세했다. 29일 현재 정부 등록 위안부 피해자 240명 중 생존자는 23명뿐이다. 김 할머니의 빈소가 차려진 서울 서대문구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을 찾아 조문한 문재인 대통령은 “한 분 한 분 떠나가고 계신다.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채 떠나보내게 돼 마음이 아프다”며 안타까워했다.
1926년 경남 양산에서 태어난 김 할머니는 14세이던 1940년 일본군 위안부로 강제 동원됐다. 이후 8년 동안 중국과 홍콩,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등으로 끌려 다니며 고초를 겪었다. 1992년 위안부 피해 사실을 처음 공개한 김 할머니는 1993년 위안부 피해자 중 최초로 유엔 인권위원회에서 성 노예 피해를 증언했다.
구특교 기자 koot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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