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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6 (월)

[김지석의 화·들·짝] 시대의 담론② 개혁과 왕국의 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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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혁명은 비록 실패했지만 이전 모든 담론의 본모습을 비춰볼 수 있는 거울이 된다. 위정척사파와 개화파는 물론 조정의 한계가 분명히 드러나고 외세의 실체가 만천하에 공개된다. 다수 민중의 힘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이런 위기 상황을 극복할 수 없다는 점도 명확해진다.

광무개혁은 황제권을 강화한 점에서는 반동적 성격을 띤다. 정부가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강제 해산한 것은 민중보다 외세의 편을 들어준 한계를 보여준다. 이는 민족과 민주보다 문명화를 앞세우는 개혁이 빠지기 쉬운 한계이며, 이런 현상은 이후 역사에서도 되풀이된다.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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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시대의 담론기’는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1894년부터 대한제국이 광무개혁을 추진하고 독립협회를 해산한 1898년 사이에 나타난다. 이때 일제강점기와 그 뒤까지 이어지는 정치세력의 큰 흐름이 만들어진다는 점에서 우리 역사에서 중요하다. 이 시기 담론 또한 크게 넷으로 나뉜다.

■ 첫째는 1894년 1월부터 11월까지 계속된 동학농민혁명과 관련된다. 이 혁명은 사망자만도 수십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민중이 주도한 이 혁명의 열쇳말은 반제·반봉건이다. 초기 봉기는 민란 쪽에 가까웠으나 6월 전주화약 이후의 봉기는 명확한 지향점과 함께 혁명의 성격을 갖는다. 애초 집권세력은 농민군의 주장에 일부 공감하면서도 기존 체제가 무너질까 봐 두려워한다. 그래서 청국에 파병을 요청하며, 이는 톈진조약을 근거로 한 일본 쪽의 파병을 부른다. 농민군은 청·일 군대가 나설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정부와 전주화약을 맺고 호남지방을 중심으로 개혁 정책을 추진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하지만 일본은 한반도에 무력 진출할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결국 우리 땅에서 청과 전쟁을 벌인다.

내부 개혁으로 풀어야 하는 사태를 국제화해 오히려 주도력을 떨어뜨린 집권세력의 잘못은 크다. 이런 태도는 개화를 둘러싸고 정부 안팎에서 이뤄져온 담론이 민중의 삶과는 동떨어져 있었음을 보여준다. 개화에 반대하는 위정척사파의 주역이던 유림 또한 대체로 동학농민혁명에 적대적이었다.

농민혁명은 비록 실패했지만 이전 모든 담론의 본모습을 비춰볼 수 있는 거울이 된다. 위정척사파와 개화파는 물론 조정의 한계가 분명히 드러나고 외세의 실체가 만천하에 공개된다. 다수 민중의 힘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이런 위기 상황을 극복할 수 없다는 점도 명확해진다. 또한 이 혁명은 이후 모든 담론에 자양분을 공급하는 저수지 구실을 한다.

■ 둘째는 동학농민혁명이 진행되는 도중인 1894년 7월에 시작돼 1896년 2월까지 세차례에 걸쳐 추진된 갑오개혁이다. 갑오개혁은 신분제를 폐지하고 정부 업무를 왕실과 분리해 정비하는 등 근대국가 수립에 필요한 조처를 골고루 시도한다.

왕권 제약을 통해 사실상 입헌군주제를 지향한 것으로도 평가된다. 내용만으로 보면 갑신정변과 동학농민혁명의 요구를 상당 부분 수용한 ‘부르주아 혁명’의 성격을 띤다. 개혁의 필요성과 방향에 대해 주도 세력 사이에 일정한 합의가 이뤄진 셈이다. 중요한 것은 개혁 내용을 실현할 수 있는 여건이다. 개혁을 주도한 세력이 정치 상황과 외세의 개입에 따라 여러차례 바뀐 모습을 보면 그 한계가 잘 드러난다. 1차 개혁은 온건개화파가 일본과 상당히 거리를 두고 추진한다. 그러자 일본은 갑신정변 때 일본으로 망명한 급진개화파인 박영효와 서광범을 귀국시켜 온건개화파와 연립 내각을 출범시킨다. 이들이 2차 개혁을 추진하던 중 온건개화파의 중심인물인 김홍집이 실각해 박영효에게 힘이 실린다. 이때 고종은 개혁의 기본 방향과 조선이 자주독립국임을 나라 안팎에 밝히는 홍범 14조를 반포한다.

민씨 세력은 이에 맞서 러시아에 접근한다. 내란 음모 사건을 빌미로 박영효를 축출한 뒤 친러파 인사들을 내각에 끌어들여 다시 김홍집 내각을 출범시킨다.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일본은 민씨 세력의 핵심인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킨다. 직후 친일 관료 중심의 새 김홍집 내각이 수립돼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하는데, 이것이 3차 개혁이다. 이때 상투를 자르라는 단발령이 시행되고, 이런 개혁에 맞서는 유생과 백성의 의병 투쟁이 처음으로 일어난다.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있던 고종이 1896년 2월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기자(아관파천) 내각이 붕괴하고 개혁은 중단된다.

갑오개혁은 민중의 지지 기반이 없었다. 이는 개혁의 중심인물이었던 김홍집 등 일부 각료가 민중에게 살해된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민중의 최대 관심사인 토지개혁도 빠졌다. 개혁은 자주적 형태를 띠었으나 실제로는 일본의 힘에 크게 의존했다. 이전까지 실용주의 성격이 강했던 개화세력의 상당수는 갑오개혁 이후 노골적인 친일파로 나아간다.

■ 셋째는 1896년 봄부터 1898년 12월까지 이어진 독립협회·독립신문·만민공동회 운동이다. 이 운동의 중심지는 서울이지만 사실상 당시의 모든 개화운동과 자주독립운동 세력이 참여하거나 공감한 점에서 전국적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독립협회는 ‘나라의 독립자주권’ ‘인민의 자유와 평등권’ ‘내정 혁신과 부국자강한 나라’라는 세가지 운동 방향을 내세운다. 이는 당시의 시대적 과제인 자주독립, 민주·민권 확장, 문명화(근대화)를 통한 부국 건설을 잘 집약하고 있다. 이전 한 세대에 걸친 고민이 비로소 명확한 강령적 목표로 정립된 점에서 의미가 있다. 첫 한글 신문인 <독립신문>을 통해 민중과의 결합을 시도한 것도 이전과 다르다.

독립협회 활동에 대해 고종도 초기에는 대체로 동의하고 지원한다. 갑오개혁이 시도되는 동안에는 정부 주요 인사들도 독립협회의 논의에 참여한다. 독립협회도 외세의 침탈을 고려해 왕권 강화를 이해하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독립협회가 민권운동으로 활동 폭을 넓히고 정부 관리의 부패와 실정을 거세게 비판하면서 정부와의 관계가 틀어진다. 외국에 이권을 매각해 재정을 확충하려는 대한제국의 움직임도 독립협회의 비판 대상이 된다. 나아가 의회설립 운동까지 시도되자 정부는 독립협회와의 관계를 청산하는 쪽으로 가게 된다. 일본 등 외세가 양쪽의 갈등을 반긴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 넷째는 고종이 1897년 10월 러시아 공사관에서 나와 대한제국 황제로 취임한 뒤 추진한 광무개혁이다.

광무개혁은 대체로 갑오개혁을 이어받고 있다. 동도서기론을 주장하는 온건개화파가 주도한 광무개혁 가운데 비교적 적극적으로 추진된 분야는 상공업 진흥정책이다. 개혁 주도 세력의 주된 관심이 문명화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대한’이라는 나라 이름이 처음 쓰인 것도 이때다.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도 이 이름을 이어받는다. 일제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조선’이라는 말을 계속 사용한다.

광무개혁은 황제권을 강화한 점에서는 반동적 성격을 띤다. 그것이 제일 큰 문제다. 정부가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강제 해산한 것은 결국 민중보다 외세의 편을 들어준 광무개혁의 한계를 보여준다. 이는 민족과 민주보다 문명화를 앞세우는 개혁이 빠지기 쉬운 결정적 한계이며, 이런 현상은 이후 역사에서도 되풀이된다.

■ 이 시기 담론의 공통된 주제는 개혁이다.

1880~84년 담론기에 개화가 열쇳말이었던 데 비해 변화에 대한 의지가 훨씬 커졌음을 알 수 있다. 개혁 내용도 폭과 깊이가 확대된다.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는 쪽으로 생각이 모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왕·왕권·왕국이라는 현실적인 권력을 어떻게 할지에 대한 논의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 동학농민혁명의 참가자들은 근왕의 모습을 보이며, 갑오개혁 역시 왕권 유지를 전제로 한다. 광무개혁은 나아가 황제권 강화를 지향한다.

이 시기를 거치면서 저항적 민중세력, 실용주의 개화세력, 반민중적 보수세력이라는 우리나라 근현대 정치세력의 뼈대가 형성된다. 이들 세력은 이후 일제의 침탈이 거세지는 3·1혁명(3·1운동) 때까지 새로운 모습으로 진화한다. 저항적 민중세력은 의병과 독립군 등 무장투쟁 세력으로 발전한다. 이전의 위정척사파는 무장투쟁, 애국계몽운동, 친일파 등으로 다양하게 분화한다. 친일파가 된 이들을 뺀 실용주의 개화세력은 1900년대에 활발하게 진행된 애국계몽운동의 주축이 돼 교육·언론·종교 활동 등을 활발하게 벌인다. 이들은 한-일 강제병합 이후 무장투쟁 세력, 외교론자를 비롯한 민족운동 세력, 자발적·비자발적 친일파 등으로 분화한다. 반민중적 보수세력은 대부분 친일파로 변신하지만 일부 자본가와 지식인은 민족운동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는다.

대기자 j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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