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27 (토)

베네수엘라 ‘두 대통령’ 사태… 미국 “과이도 임시대통령 인정”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대규모 시위대 앞 과이도 임시대통령 선언… 마두로 “美와 단교”

석유회사 요직에 軍 장성… 마두로 대통령과 결탁 군부가 변수
한국일보

23일 베네수엘라에서 열린 대규모 반정부 시위에서 후안 과이도 국회의장이 임시 대통령을 스스로 선언했다. 카라카스=로이터 연합뉴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인가? 베네수엘라! 우리가 원하는 것은? 자유!”

사람들이 끝도 없이 쏟아져 나왔다.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의 거리 곳곳은 23일(현지시간) 국기를 흔들고, 호루라기를 불며 “마두로 퇴진”을 외치는 이들로 가득했다. 반(反)마두로 진영의 선봉에 선 후안 과이도 국회의장이 수천명 앞에서 헌법 책자를 꺼내 들고는, 스스로를 ‘임시 대통령’으로 선언하자 시위대의 환호는 정점으로 치달았다.

◇61년전 봉기 시도하는 베네수엘라 민중

베네수엘라의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열리면서 현지 정국이 흔들리고 있다. 야당 대표인 과이도 의장이 임시 대통령을 자처하자, 국제사회는 미국과 중국ㆍ러시아 진영으로 갈라섰다. 미국 진영은 ‘임시 대통령 과이도’를, 중국ㆍ러시아 진영은 ‘현 대통령 마두로’ 편에 섰다. 국가 안팎으로 반마두로 기세가 거세지면서 새 임기를 시작한 지 13일 만에 마두로 대통령이 최대 위기에 직면했지만, 군이 마두로의 뒤를 지키는 한 정권 교체는 쉽지 않을 전망이다.
한국일보

마르코스 페레스 히메네스 독재정권 종식 61주년인 23일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열렸다. 카라카스=AP 연합뉴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마두로 퇴진 시위가 열린 23일 베네수엘라에서 매우 특별한 날이다. 1958년 이날 당시 군사 독재자 마르코스 페레스 히메네스 정권을 민중 봉기로 끌어내렸다. 과의도 의장을 주축으로 한 야당이 몇 주 전부터 이날에 맞춰 시위를 준비한 것도 그 때문이다.

이날 카라카스 시위 현장에서 과이도 의장은 자신을 ‘임시 대통령’으로 선언하고 재선거를 요구했다. 그러자 미국을 포함한 10개국 이상이 그를 임시 대통령으로 인정했고, 마두로 정부는 미국과 단교를 선언하고 외교관들에게 72시간 내 출국을 명령했다.

마두로의 조치에 미국은 강경 대응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베네수엘라의 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위해 미국의 경제력과 외교력을 총동원하겠다”고 밝혔다. 군사 개입이 수반될 수 있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도 “아직 결정된 건 없지만, 모든 옵션은 테이블에 있다”며 으름장을 놓았다.
한국일보

후안 과이도 국회의장이 ‘임시 대통령’을 선언하고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이를 공인하자 직후 마두로 대통령은 대통령궁 연설에서 미국과의 단교를 선언했다. 카라카스=AP 연합뉴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갈라진 국제사회ㆍ민중에 맞서는 마두로

마두로 역시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양키들을 믿지 말라”며 “미국에게는 동료도, 충성심도 없다. 그들은 오직 베네수엘라의 석유와 가스, 금을 가져갈 이해관계와 배짱, 그리고 야심만 가지고 있을 뿐”이라고 외쳤다.

과이도 의장의 선언으로 ‘한 나라, 두 대통령 체제’가 되자 국제 사회도 양분되고 있다. 미국과 유럽연합, 중남미 우파 정부들은 과이도 의장을 지지하고 있다. 반면 쿠바와 볼리비아 등 중남미 좌파 정부들은 마두로 지키기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베네수엘라의 최대 동맹국인 러시아 의회도 마두로를 지지하고, 사태의 배후로 미국을 지목했다. ‘미-러’를 주축으로 하는 국제 갈등 상황으로 번질 가능성도 우려된다.

러시아와 일부 남미 국가의 응원에도 불구, 마두로 대통령은 당분간 정권 유지를 위해 부심해야 할 판이다. 주요 지지층이었던 노동자와 서민 계층마저 23일 시위에 나섰기 때문이다. 주요 외신들은 100만%를 넘는 살인적 물가상승률과, 식량ㆍ의료난을 견디다 못한 이들이 반정부로 돌아서면서, 1998년 우고 차베스 전 대통령 때부터 이어진 베네수엘라 좌파 정부가 종식 위기에 내몰렸다고 전했다. 전날 밤 시위 현장에선 반정부 시위대와 친정부 지지자들의 충돌로 13명이 숨지기도 했다. 차경미 부산외대 중남미지역원 연구교수는 “2016년 유가 하락에 따른 경제 붕괴로 몰려든 베네수엘라 난민 때문에 이웃 중남미 국가들이 마두로 정부에 압박을 가하는 데다가, 미국의 경제 제재도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라고 설명했다.
한국일보

마두로 대통령 퇴진을 촉구하는 일부 군인들의 반란 동영상이 소셜미디어로 유포된 가운데 21일 카라카스 인근 방위군 초소에서 반정부 시위가 벌어졌다. 카라카스=로이터 연합뉴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베네수엘라 운명, 군부에 달렸다.

그러나 대내외적인 압력에도 불구하고, 정권 교체 가능성은 베네수엘라 군의 선택에 달렸다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AP통신은 “이 나라의 역사적 전례를 볼 때 혼란한 정국 속에 베네수엘라 군에 이목이 쏠리고 있다”고 전했다. 그 때문에 마두로 정권과 야당 진영 모두 군에 호소하고 있다.

과이도 의장은 21일 소규모 봉기가 일어나자 “우리는 (군대가) 국민의 편에서 헌법을 수호하고 찬탈자(마두로)에 맞서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베네수엘라 야권 지도자 호세 마누엘 볼리바르는 유로뉴스에 “23일 열린 시위는 군에게 헌법과 민주주의의 길로 돌아오라는 호소”라며 “마두로 정부의 마지막 남은 권력은 ‘무력’이지만, 이미 이탈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지난 21일 있었던 하급 군 장병 27명의 소규모 군 봉기를 가리킨 것이다.

반면 마두로 대통령은 23일 군에게 “통합과 기강을 유지하라”라고 명령했다. 이는 군에 대한 마두로 대통령의 영향력이 여전하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콜롬비아 로사리오국립대 베네수엘라 연구소의 로날 로드리게스는 “마두로 대통령이 국가 주요 기관에 대한 통제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정권이 유지되고 비참하고 위태로운 상황은 악화될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봤다. 하상섭 한국외대 중남미연구소 교수 역시 “극심한 물가상승률, 난민 급증으로 ‘이게 국가인가’라는 비판이 나오는 지경이지만, 이미 베네수엘라의 삼권분립은 붕괴된 상태다. 실질 정치의 면에서 3부와 군부에 대한 마두로 대통령의 장악력이 유지되는 한 쉽게 현 정부가 무너지지는 못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로이터 통신에 따르면 마두로 대통령은 군 주요 장성들에게 국영 석유회사(PDVSA)의 요직을 맡김으로서 군 지지 기반으로 만든 상태다. 블라디미르 파드리노 로페즈 국방장관으로부터 “우리 군은 마두로 대통령을 위해 죽을 준비가 되어있다”는 공언을 받기도 했다. 아래로부터의 혁명은 계속해서 끓어오르고 있지만, 마두로 대통령이 군부를 장악하는 한 정권 교체가 쉽지 않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최나실 기자 verite@hankookilbo.com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