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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제주를 닮은 장필순의 목소리… “당신들을 보낸 뒤 난 훌쩍 자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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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요조·오은의 요즘은/ 가수 장필순

90년대·2000년대 베스트 앨범 1위

대중 상대하는 일 많아지며

껍데기만 남았다고 느꼈을 때

피해 온 제주에서 14년째 생활

대학생 때 음악 시작한 뒤

음악의 보금자리 된 ‘하나음악’

조동진·동익, 하덕규, 김현식 등

한국 대표 뮤지션들과 작업

노래하고 여행하며 충만했던 시절

“음악 언제든 그만두고 싶을 때

그만둘 수도 있지만

이젠 후배 음악가들에게 책임 느껴

그래서 음악과 나는 일치돼야”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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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가로서 누릴 수 있는 여러 행운 가운데 내가 생각하는 최고의 행운은, 자신의 우상이 동시대 음악가로 활동하고 있는 경우 함께 한 무대에 서는 일이 어쩌다 일어난다는 것이다. 자신의 우상과 함께 한 무대에 선다는 것은 자신의 우상과 함께 대기실을 쓰면서 거기서 함께 도시락을 까먹을 수 있고, 머리를 매만지고 무대에 오르기 전 숨을 고르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데다가, 운이 좋으면 연락처를 교환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나는 장필순이라는 음악가와 그렇게 했다.

그녀와 함께 무대에 섰으며 그녀와 함께 대기실을 썼다. 그녀와 함께 도시락을 먹으며 그녀의 메이크업을 봐주었고, 그리고 연락처도 교환했다. 나는 아직도 필순 언니에게 문자가 오면 반사적으로 약간 비현실적인 기분이 든다. 너무나 반복해서 들으며 살아온 나머지 내 신체의 일부가 되어버린 것 같은 어떤 노래를 부른 사람이, 그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러준다는 게 여전히 잘 믿기지 않는 것이다.

고백하건대 나는 그동안 필순 언니 앞에서 ‘어떤 연기’를 해오고 있었다. 그것은 최대한 팬으로 보이지 않으려는 연기였다. 내가 당신의 음악을 섭취하며 이만큼 자랐다고, 그래서 당신의 음악이 지금도 혈구처럼 내 안을 흐르고 있다고, 꼭 당신과 같은, 아니 조금이라도 닮은 음악가가 되고 싶어 애가 탄다고 말하고 싶은 것을 매번 꾹꾹 참았다. 나는 다만 언니에게 밥은 먹었는지, 앨범 작업은 잘되어가는지, 공연은 잘 마쳤는지, 동료 뮤지션이 안부차 물을 법한 것들만 물어보면서 내 목소리가 긴장으로 떨리지 않도록 조심했다.

팬이라는 것을 들키고 싶지 않았던 이유는, 정말로 가까워지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는 언니와 가까워지고 싶었다. 만약 내가 팬이라는 것이 들통난다면 언니는 나를 불편해할 것이다.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언제나 좋은 모습만을 보여주려 할 것이다. 언제나 예쁜 모습만 보여주고 싶을 것이다. 요조씨, 요조씨 하면서 끝까지 존댓말을 쓸 것이다. 그래서 우리 사이엔 어쩔 수 없는 거리감이 늘 존재하게 될 것이다. 싫었다. 내 앞에서 좋은 모습뿐만 아니라 안 좋은 모습도, 강함뿐만 아니라 약함도 맘대로 펼쳐 보이는 장필순을 보고 싶었다.

우리는 지난 8일 언니가 살고 있는 제주 서쪽 애월의 한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 커다란 섬에서 동쪽 성산밖에 모르던 나는 언니의 고요한 서쪽에 한발 한발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번에야말로 정말 묻고 싶었던 것들을 물을 것이다. 당신의 음악 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는지, 당신의 하루는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나는 어떻게 하면 당신과 더 가까운 음악가가 될 수 있는지. 지나치게 좋아하는 마음을 꽁꽁 숨겨왔던 것이 비로소 이 인터뷰로 들통날 것이다.

‘피해서’ 정착한 제주도

―제주도에서 지내신 지 이제 몇년째죠?

“2005년 7월에 왔으니까 벌써 14년째 되는 건가. 오래됐네.”

―진짜 오래되었네요. 저는 이제 3년차.

“그때가 딱 고비라고들 하더라. 재밌는 건 대충 다 봤고 좀 지루하기도 하고 그럴 때지.”

―제주 왔다가 다시 떠나는 시점도 3년째가 가장 많다더라고요.

“응, 그렇다더라. 그래서 넌 어떤데?”

―저는 뭐, 책방 때문에 빼도 박도 못하는 처지죠.

“나도 그랬어. 서울에도 집이 있으면서 제주도 내려와서 ‘한번 살아보고 아니면 다시 올라가자’ 이런 마음이었다면 나도 못 참고 올라갔을지도 모르지. 근데 나도 내 딴에는 정말 큰 결심을 하고 그냥 딱 산속 집을 사가지고 들어가버린 거라서, 내 경우에도 약간 돌이킬 수 없는 상황 같은 것이 있었어.(웃음) 그게 한해 두해 지나다 보니까 이젠 여기가 정말 집처럼 되었네.”

1989년에 ‘어느새’라는 곡으로 데뷔한 필순 언니. ‘어느새’ ‘나의 외로움이 널 부를 때’ ‘너에게 하고 싶은 얘기’ ‘풍선’ 등이 대표곡이지만, 대표곡으로 묶이지 않은 수많은 노래도 여전히 반짝이며 외로운 사람들의 밤을 지켜주고 있다. 특히 언니의 5집과 6집 앨범은 ‘1990년대 베스트 앨범 100’과 ‘2000년대 베스트 앨범 100’에서 1위로 선정될 만큼 명반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가 집”이라는 언니의 대답을 듣고 보니 필순 언니의 목소리는 정말이지 제주도를 닮았다. 바람 불고 외로운 섬 같은 목소리.

―터전을 훌쩍 옮기는 일은 분명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 제주에 처음 왔을 때의 마음가짐이 어땠는지 궁금해요. 새로운 곳을 찾아간다는 느낌이었는지, 아니면 어딘가로부터 도망친다는 느낌이었는지.

“도망친다는 표현보다는… 피한다? 도망치는 거랑 피하는 거랑 같아? 잘 모르겠네.”

―비슷하지만 미묘한 차이가 있는 것 같네요.

“그때 내가 좀 지쳤던 것 같아, 음악가로 사는 것에 대해서. 돈을 못 벌어서 지쳤다기보다는, 물론 그런 것도 없진 않았지만, 그냥 좀 재미도 보람도 없었고 껍데기만 남은 그런 기분이 자꾸 드는 거야. 빛 좋은 개살구가 된 것 같고. 제주에 내려온 연유가 딱 그거 하나는 아니었지만 그중 가장 컸던 게 지친 내 마음이 아니었나 싶어. 그 와중에 제주를 좋아하기도 했었고.”

―혹시 모두 포기하려는 마음이었던 거예요?

“그때는 포기한다 안 한다는 마음조차 없었어. 아주 무기력했었지.”

―피하는 느낌으로 제주까지 내려온 계기가 있으셨나요?

“특별한 사건이 있었다기보다 오랫동안 그런 감정들이 누적되어왔었어. 내가 처음 노래를 시작했을 때는 정말 너무 좋고 행복했어. 음악 하는 사람들과 같이 지내는 것 자체가 말이야. 요조는 잘 알겠지만 음악 하는 사람들이 대체로 괴팍해도 순수하잖아. 그런 다듬어지지 않고 세상적이지 못한 사람들과 마냥 공연하고 노래하는 삶이 난 참 좋았는데, 내 음악들이 세상에 발표가 되고 점점 대중을 상대해야 하면서 내가 이 양쪽 생활을 병행하는 것이 힘에 부쳤어. 삐그덕대기 시작하더라고. 내가 아마도 잘 적응하지 못했던 부분도 있었겠지? 그러다 내 한계에 다다랐던 거지. 사실 그때 내 음악을 들어주는 사람도 많았어. 음악 하는 후배들도 나를 많이 아껴주었고. 그런데 그때는 그런 것들이 다 형식적으로 다가오더라고. 나한테 그냥 예의 차리는 기분?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게 아니라 다 가식처럼 느껴지고. 내 음악에 대한 내 만족도 중요하지만 타인에게 인정받을 때 오는 기쁨이란 게 있잖아. 그런데 그런 행동들이 다 마음에 없는 리액션처럼 여겨지는 거야. 이런 복잡한 마음들이 계속 쌓여오다가 어느 순간 훅 하고 움직이게 된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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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음악’과 충만했던 시절

괴팍하지만 속물적이지 않은 사람들과 함께 노래하던 삶. 나는 바로 음악 공동체 ‘하나음악’ 사람들을 떠올렸다. 지금은 ‘푸른곰팡이’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뮤지션이라면 누구나 우러러보게 되는 곳, 뮤지션들의 뮤지션들이 모여 있는 곳, 하나음악. 필순 언니는 대학생일 때 음악을 시작하면서 하나음악의 핵심 멤버인 조동진·조동익 형제를 알게 되었다고 했다. 이뿐 아니라 그룹 ‘들국화’의 공연 게스트를 하면서 하덕규, 김광민, 정원영, 박용준, 함춘호, 김현식, 유재하 같은 뮤지션들과도 가깝게 교류하게 된다. 누군가는 솔로로, 누군가는 ‘시인과 촌장’이나 ‘어떤날’ ‘더클래식’ 같은 밴드로 훗날 대한민국에 없어서는 안 될 뮤지션이 될 그들과 어울리며 필순 언니가 느꼈을 행복은 정말로 충만하였을 것 같다.

하나음악 사람들은 그 시절 공연을 마치면 항상 다 같이 여행을 갔다고 했다. 공연을 하는 동안 스태프들은 미리 차에 술과 안주를 넉넉히 실어놓았고 공연이 끝나면 멤버들, 쫑파티에 온 사람들을 가리지 않고 원하는 이들을 모두 데리고 무작정 떠났다는 것이다. 설악산에도 가고 경기도 양평, 충북 단양에도 갔다고 했다. “밤에 공연을 마치고 출발하는 거니까 도착하면 새벽이지.” 언니는 꿈꾸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 “아무 펜션이나 잡아서 그때부터 술 마시고, 그날 공연한 애들은 흥분이 가시지 않은 채로 다시 노래를 부르고, 밖에서 농구도 하고, 개울가나 바닷가에 가면 물놀이도 하고 그렇게 밤이 새도록 놀았어. 아침이 되면 우르르 다 같이 밥을 먹고 한잠 푹 잤지. 그리고 다시 서울로 올라오는 거야. 그래서 하나음악이 하나로 뭉칠 수 있었던 것 같아. 쓸데없는 일같이 보였을지 몰라도 동진이 형이 우리에게 정말 귀중한 추억을 만들어준 거지.”

1979년 ‘행복한 사람’으로 대중음악계에 데뷔하여 ‘제비꽃’ ‘나뭇잎 사이로’ ‘작은 배’ 등을 부르며 많은 사랑을 받은 조동진은 2017년 8월(향년 69) 방광암으로 안타깝게도 세상을 떠났다. 필순 언니는 조동진을 음악뿐 아니라 그 밖의 다른 면에서도 어른 같은, 가족보다도 더 오랜 시간 함께했던 아버지 같은 사람이라고 기억한다. 동생 조동익은 음악적·정신적 동료로서 지금도 필순 언니 곁에서 함께 지내고 있다.

젊은 시절 그들과 함께 공연을 마치고 어디로든 떠나버리고 언제든 돌아올 수 있었던 튼튼한 자유가 대중의 인기와 주목을 얻으며 점점 허약해지는 일, 그 가운데 돈을 벌려면 어쩔 수 없다고 자기 자신을 애써 타이르는 일, 자기가 자기를 믿는 일이 힘들어진 나머지 주변의 인정과 칭찬도 끊임없이 의심하는 일. 언니는 그런 불행의 연쇄작용에서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피했다’고 했다. 생각해보니 그 표현이 맞았다. 언니는 잘못한 게 없었으므로 도망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지금은 그때랑 마음이 좀 달라진 것 같으세요?

“지금은 그때처럼 그런 일들에 예민하지 않아. 내가 많이 변했지. 일단 관심이 없어졌어.(웃음) 제주 내려와서 지내면서 가장 많이 변한 점 같아.”

―이제 연연하지 않으시는군요.

“그렇지. 음악도 언제든지 내가 그만두고 싶을 때 그만둘 수 있다고 정말 편하게 생각해. 그때는 음악을 그만둔다는 것이 굉장히 대단하게 느껴졌거든.”

―당연히 대단한 일이죠. 특히 자신한테는 무엇보다 중요하고 대단한 일일 거예요.

“근데 지금은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아. 대신 그것과는 별개로 ‘책임감’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가끔 생각하게 돼. 그때는 책임감보다는 내가 더 중요했었던 것 같아. 지금은 나도 중요하지만 ‘책임감’이 더 중요하게 여겨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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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로 와서 알아차린 생명들
지금 그를 둘러싼 식구들은
한마리씩 키우기 시작한 유기견
SNS 등으로 유기견 보호활동
공연 열어 임시보호자 지원도

앨범 첫곡 녹음 뒤 자궁적출 수술
그의 수술 이튿날 쓰러져
며칠 만에 숨진 조동진 부인
이후 음악에 슬픔 배어들어

“내 두려움은 노래할 수 없는 것
음악 동지들이 아픈 것도 두려워
내 노래가 더는 위로되지 않을 때
나와 같이 소멸되는 것이 내 바람”

“나를 표현하는 음악”

―책임감에 대해서 이야기를 더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언니는 음악가 장필순과 인간 장필순이 같이 가는 것 같으세요? 음악가로서의 본인과 인간으로서의 본인이 일치하지 않는 음악가들도 있잖아요.

“음… 점점 같이 가고 있는 것 같아. 처음 음악을 시작했을 때는 나 혼자 시작한 게 아니었잖아. 반은 나였지만 반은 누군가 나를 만들어주는 존재가 있었지. 지금은 점점 나를 표현하는 방법으로 음악이 되는 것 같아. 예전에는 ‘음악을 표현하는 나’였다면 지금은 ‘나를 표현하는 음악’이 되었다고 할까. 그리고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래야 한다….

“그게 맞는 것 같아. 나는 물건이 아니잖아. 내 음악하고 나는 같아야 한다고 믿어. 모든 음악가에게 내가 선배가 될 수는 없을 거야. 그렇지만 누군가 나를 선배로 보고 나에게서 무언가를 배우고 싶다고 느껴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내가 책임감을 느껴야 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해. 그들에게 조금도 부끄럽지 않은 음악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렇기 때문에 음악과 나는 일치되어야 한다고 보는 거지.”

―언니가 방금 ‘나는 물건이 아니다’라고 표현하셨지만 ‘나는 물건이다’라는 태도에 가까운 음악가들도 있는 것 같아요. 본인 안에서부터 시작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대중이 원하는 이야기를 정확하게 캐치해서 그것을 노래로 만들어내고, 그것이 그의 음악적 역량이라고 인정도 받잖아요.

“응, 맞아. 어느 쪽만 옳다고 할 수 없는 문제겠지. 요즘 음악들을 들으면 실력들이 무척 뛰어나고 개성도 강하더라. 좀 웃기는 말이지만 다들 너무 개성이 강하다 보니까 개성이 강하다는 점에서 몰개성적으로 느껴질 정도야.”

―언니는 꾸준하게 조동익 선생님하고만 작업을 해오셨는데 다른 사람과 작업해보실 생각은 없으세요?

“동익이 형만큼 나의 음악 성향이나 내가 낼 수 있는 색깔을 잘 아는 사람이 없을 것 같아. 게다가 재미있는 게 25년, 30년을 같이하고 있는데도 아직도 그 사람이 모르는 내가 존재해. ‘너한테 이런 면이 있었어?’라는 말을 듣는단다. 다른 사람과 하면 테크닉 면에서 신선할지도 모르겠어. 다만 나는 그보다 영혼이 맞는 파트너와 만들 수 있는 음악의 성숙도에 더 치중하고 싶은 거야. 요조도 잘 알겠지만 중요한 건 실력이 아니잖아.”

―정말 그래요. 실력이 아니라 얼마나 서로 많이 닿아 있는 파트너인가가 밴드 할 때도 그렇고 프로듀서와 작업할 때도 그렇고, 그게 다인 것 같아요.

“열명이 무대에 올라서 연주해도 오랫동안 같이한 세명 못 이길걸.(웃음) 내가 음악 하면서 받은 복이라고는 그거 하나인 것 같아. 그래서 그걸 놓지 않고 싶은 욕심 같은 게 있어, 계속 음악을 하는 한은.”

하나음악 동료들에게 둘러싸여 살고 웃으며 노래했던 필순 언니는 이제 제주도 애월 소길리에서 유기견들에게 둘러싸여 살고 웃는다. 불쌍한 아이들 한두마리 키우기 시작한 것이 이제 여덟마리다. 아니, 언니는 인스타그램에 매일매일 전국의 유기견 사진을 올리고 이런저런 행사에 참여하면서 보이지 않는 유기견들까지도 돌보고 있으니 언니가 키우는 아이들의 수는 정확히 세기 어려울 것 같다.

“원래부터 관심은 많았는데, 제주도 와서 더 열심히 이 일에 집중하게 된 것 같아. 뭔가 제주도가 그런 것들을 보게 해주는 곳일지도 몰라.”

―정말 그런가 봐요. 저만 해도 개도 고양이도 원래부터 좋아했지만 제주도 와서는 그냥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이 애들도 인간처럼 독립적이고 다르지 않은 생명이라는 감각이 더 분명하게 오는 것 같아요.

조금씩 후원금도 내고 인스타그램으로 공유도 하면서 언니는 많이 놀랐다고 했다.

“내가 움직이니까 사람들이 움직이더라고. 정말 한번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거든. ‘장필순씨, 저도 도울게요’ 하면서 연락이 오고, 지난번에 인스타그램에 올려주신 덕에 보호소 강아지가 다행히 입양을 가게 되었다는 감사 인사도 오고. 너무 행복하고 뿌듯한 거야. 작년에는 유기견을 위한 콘서트를 열어서 제주도의 임보(임시보호)자들 중에 어려운 사람을 도와줬어. 그 사람들은 자기 양말 하나 안 사면서 강아지들을 임시보호하며 사시거든. 공연 때 오셔서 하나같이 얘기하다 우시더라고. 늘 어디 가서 우리 다음 세대 아이들에게 더 좋은 세상을 주고 싶다고 말하지만 솔직한 심정으로는 나, 내가 살아 있는 동안만이라도 세상이 더 이상 나빠지지 않도록 뭐라도 하고 싶어.”

―평소 하루 일과도 거의 개들과 함께하시겠어요.

“아침에 일어나면 티브이 틀어서 뉴스나 홈쇼핑 아무거나 대충 틀어놓고 애들 소변 패드 갈아놓고 전날 밤에 야식 먹은 걸 설거지하지. 마당에 있는 애들한테 간식 하나 쥐여주고, 집 안에 있는 애들 아침 주고 내보내고, 부엌에서 주스도 갈고 그러다 보면 시간이 훌쩍 가. 마당에서 두어시간 애들하고 놀아주고 밥 주고 응가 치우고 마당에서 다른 일도 하다가 집으로 돌아와 밥 한끼 먹지. 전화기는 거의 안 보는 편이라 핸드폰은 보통 밤에 한번에 몰아보는 편이고. 아, 낮에 공책 가지고 많이 놀아. 가사 같은 것도 써보고. 오늘의 할 일 같은 것도 적어. 장 봐야 하면 오후에 장도 보고. 어둑어둑해지면 애들 저녁 주고. 이것저것 반찬도 저녁에 만들어두는 편이고. 그렇게 하루 가는 거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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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길화>가 품은 이야기

우리가 인터뷰한 카페와의 인연도 유기견 때문이라고 했다. 어쩐지 인터뷰하는 내내 길고양이와 강아지들이 제집처럼 드나들었다. 마침 어떤 손님이 까만 강아지를 안고 들어왔다. 카페 주인과 필순 언니가 모두 반갑게 알은체했다. 인터뷰는 한동안 중단되었다. “너무 예쁘다”며 언니는 그 까만 강아지를 연신 만지고 뽀뽀했다. 나도 옆에서 같이 손을 대었다. 아이는 순순히 내 손을 받고 친절히 핥아주었다. 족히 30분이 흘렀다. 언니가 작년 여름 발표한 8집 <소길화>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소길화>라는 앨범은 어떻게 만드셨어요?

“내가 처음 제주에 와서 정착한 곳이 소길이야. 이곳에서 나만 알고 느끼는 제주를 만들어가고 있으니 나에게 소길은 참 각별한 곳이지. 그래서 ‘소길’이라는 이름을 앨범 소제목으로 하게 되었어. 그런데 한곡 한곡 작업하다 보니 마치 꽃이 피어나는 느낌이 들더라고. 그래서 <소길화>야.”

디지털 싱글로 야금야금 노래를 발표하는 일이 진즉에 정착된 요즘의 음반 시장인데도 언니는 늘 그래왔듯이 열곡 넘는 노래를 정규앨범으로 한번에 발표하는 ‘옛날 방식’을 고집했다고 한다.

“이규호, 이적 등 주변의 젊은 음악가들이 많이 도와준 덕에 내가 어떤 고집을 꺾을 수 있었지. 내 음악에는 여전히 자신이 있었지만 음악이 전달되는 ‘방식’에 대해서는 잘 생각해보지 못했던 것 같아.”

그렇게 2015년부터 몇달에 한곡씩 꾸준히 디지털 싱글로 노래들을 선보이다가 2018년 여름 충분히 모인 노래 열곡에 두곡을 더 보태서 <소길화>라는 이름으로 묶었다. 언니는 3년간 소길 시리즈를 진행하면서 많은 일이 있었다고 했다.

“처음으로 작업한 곡은 ‘고사리장마’라는 곡이었어. 그 곡의 녹음을 마치고 모니터링을 할 때쯤 좀 많이 아팠어. 자궁적출 수술을 받았는데 수술 다음날 건강하셨던 동진이 형 형수님이 갑자기 쓰러지셔서 며칠 만에 돌아가신 거야. 수술 당일에도 수술 잘하라고, 못 가봐서 미안하다고 전화까지 주시고서…. 형수님이 쓰러지셨다는 소식을 듣고 동익 형의 부축을 받으면서 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올라갔어. 그 정도로 그분은 소중한 사람이었어, 우리에게.”

“어느새 소리 없이 솟아올라온 고사리들/ 당신을 보내고 난 뒤 이렇게 훌쩍 자랐네/ 당신이 떠나간 뒤/ 모든 게 변해버렸네.”(‘고사리장마’ 중)

“정말로 그 노래는 형수님을 추억하는 노래가 되고 말았어”라고 언니는 말했다.

“그 후로 동익 형과 함께 작업은 계속해나갔지만 음악 속에 나도 형도 슬픔이 배어들기 시작하고, 그 뒤에 동진 형도 돌아가시고 말았고. 정말 앨범이 완성되기까지 어떻게 했는지… 참 긴 시간이었어. 앨범을 다 완성했는데 그걸 동진 형에게 전해드릴 수 없다는 게 너무 이상하게 느껴져.”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는 한마디 말에 이토록 무거운 이야기들이 담겨 있어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언니는 초창기 음악에 대한 생각도 이제는 달라졌다고 한다.

“예전에는 ‘어느새’를 잘 안 부르려고 했어. 사람들이 아무리 좋다 좋다 해도, 그 노래가 내 노래 같지가 않았거든. 그저 김현철이 아주 훌륭하게 잘 만들어준 작품이었을 뿐이지 내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어. 그래서 공연 때도 그 노래를 잘 부르려 하지 않았고. 그런데 이제는 그게 다 과정이었다는 걸, 그 시절이 없었다면 그다음의 나도 없었다는 걸 알게 됐어. 오히려 이젠 공연 때 그 노래를 자주 불러. 그 애도 내 자식이었던 거야.”

―언니의 두려움은 무엇인지 알고 싶어요.

“음악을 하는 뮤지션으로서의 두려움이라면… 내 목소리가 되게 탁성이잖아. 처음엔 내 목소리를 참 사랑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사랑하거든. 이 소리로 내가 노래할 수 있었으니까. 그동안 ‘내가 노래를 못 하게 된다면 어떨까’ 생각할 때마다 ‘못 하면 못 하는 거지 뭐’ 했었는데 어느 날 정말 잠깐 동안 못 하게 된 적이 있었어. 내가 조심하지 않으면 목이 잘 상하거든. 잠깐이었지만 노래를 못 하게 되니까 정말로 많이 슬프더라고. 아주 살짝 그 공포를 경험해본 셈이지. 그런데 나는 기본적으로 겁이 많아. 다 두려워. 오빠(조동익)가 아프다는 것도 나에게는 엄청난 두려움이야. 나는 새로운 누군가와 뭘 해본 일 없이 20년간 한 팀과 해왔잖아. 그들 중 누군가 한명이 없다는 것도 나에게는 두려움이지.”

―얼마 전 ‘봄여름가을겨울’의 전태관님께서 하늘로 떠나셨을 때에도 많이 슬프셨겠어요.

“안 그래도 부고를 듣기 바로 얼마 전에 서울에서 종진이 형(김종진)을 봤었는데….(긴 침묵) 광석이(김광석), 현식이 오빠(김현식), 재하 오빠(유재하), 동진이 형, 태관이 오빠…. 내 주변에서 벌써 참 많이도 떠났다 그치?(침묵) 세상의 모든 게 다 두려움투성이야. 그런데 생각 안 하려고, 잊어버리려고 해. 피해 가고 싶어도 피해 갈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계속 두려워하면 내 손해다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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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에 묻는 안부

―제가 인터뷰에서 질문을 받는 입장일 때는 대부분 마지막 질문이 이랬어요. ‘나중에 어떤 뮤지션으로 기억되고 싶으세요?’ 그런데 언니를 인터뷰하려고 준비하다 보니까 언니보다도 언니 노래들의 안부가 더 궁금해지더라고요.

“그렇지. 우리가 죽으면 남는 건 노래뿐일 텐데.”

―언니가 부른 노래들은 어떻게 되면 좋을까요?

“내 노래는 내가 부르고 내가 내 생각을 말하는, 말하자면 보이지 않는 나라고 생각하거든. 그것들이 여전히 누군가의 마음에 닿고 위로해주고 있다면 다행이지만,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그땐 그냥 나처럼 사라졌으면 해.”

―언니 노래를 아무도 찾지 않는 날 같은 건 오지 않을 거예요. 그건 정말 말도 안 돼요.

“요조는 말도 안 된다고 하지만 그럴 수도 있는 거야. 내 음악이 전혀 쓸모가 없는 세상이 언젠가 될 수도 있어. 그렇게 된다면 내 노래들은 그냥 여기서 이리저리 떠도는 것보다 나랑 같이 소멸하는 게 나아. 내 바람은 그래.”

인터뷰가 끝나고 우리는 여러차례 기념사진을 찍었다. 감히 팔짱 낄 생각도 못 하고 옆에 어정쩡 서 있는 나를 언니가 먼저 꼭 안아주었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나도 용기를 내서 언니를 안았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면 견딜 수 없이 스스로가 부끄러워질 거라고 인터뷰를 하기 전부터 나는 확신했었다. 예상대로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묵묵히 나를 따라오는 부끄러움을 나는 기쁜 마음으로 돌아보았다. 나를 부끄럽게 하는 나의 우상이 내가 사는 섬에 함께 살고 있어서 감사했다.

언젠가 새해 목표가 무엇이냐는 누군가의 질문에, 나는 앞으로 훌륭한 사람들을 열심히 따라 하고 흉내 내면서 살고 싶다고 대답했었다. 나는 이제 언니가 그리울 때마다, 내가 부끄러워질 때마다, 그때마다 가만히 창문을 열고 서쪽을 바라보겠다.

녹취 원영은

한겨레



요조 ▶ 노래를 만들고 가사를 쓴다. 그리고 책방 주인이다. 제주 서귀포 성산리에 나의 책방, 책방 무사가 있다. 팟캐스트 ‘책, 이게 뭐라고’와 네이버 오디오클립 ‘세상에 이런 책이’를 진행한다. <오늘도, 무사> <눈이 아닌 것으로도 읽은 기분> 등 몇권의 책을 썼다. 더 좋은 책을 쓰고 싶다. 오은과 함께 번갈아 누군가의 ‘요즘은’ 어떤지 물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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