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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9 (목)

십자포화 맞은 KB국민은행 노조는 왜 싸움을 계속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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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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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년 만의 파업이었다. 지난 1월 8일 전국금융산업노동조합 KB국민은행지부(KB국민은행 노조)가 총파업을 벌였다. 파업 구호를 외치기도 전에 KB국민은행 노조는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보수언론은 ‘평균 연봉 9100만원 귀족 노동자들이 벌이는 배부른 투정’이라며 비판을 쏟아냈다. 여론도 싸늘했다. 서민의 빚으로 이자놀이를 하고 성과급 잔치를 벌인 직원들이 무슨 파업이냐는 지적이 이어졌다. 당초 노조도 은행 영업의 특성상 파업에 대한 시민들의 불만이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하지만 비난여론은 노조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노조도 투쟁은 여론의 지지를 받지 못했고 파업 이후 되레 동력을 잃었다. 그럼에도 노조는 투쟁의 뜻을 굽히지 않고 있다. 노사교섭이 결렬되면서 노조는 14일 중앙노동위원회(중노위)에 사후조정을 신청했다. 16일에는 KB국민은행과 허인 은행장을 단체협약 위반과 부당노동행위 혐의로 고소했다. ‘돈’ 잘버는 노동자들은 왜 손가락질을 받아가며 회사와 싸움을 벌이는 것일까.

실적압박 속에 목숨 잃는 은행원들

KB국민은행은 지난해 3분기까지 2조793억원의 누적순이익을 기록했다. 지난해 전체 순이익은 3조원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불경기에도 불구하고 사상 최대 실적을 낸 것이다. KB국민은행이 사상 최대 실적 행진을 하는 동안 노사관계는 악화일로를 걸었다. 성과주의를 지향하는 현 경영진의 실적압박 속에 노사 간 충돌이 잇따랐다.

지난해 5월에는 KB국민은행 중부지역영업그룹 소속 노동자 ㄱ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ㄱ씨는 은행장 표창을 세 번이나 받을 정도로 업무능력이 뛰어난 직원이었다. 노조는 ㄱ씨가 극단적인 선택을 한 원인으로 사측의 살인적인 노동 강요와 과도한 실적압박을 꼽았다. 실제로 ㄱ씨는 숨지기 전 메모를 통해 “기업금융을 제대로 해본 적 없는 제가 이 자리에서 업체를 개발하고 영업점과 협업하는 것이 너무 큰 압박”이라며 “이 일을 수행할 자신이 없다”고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박홍배 KB국민은행 노조위원장은 지난해 7월 열린 기자회견에서 “사측이 실적 쪽지를 보내 영업업체에 수차례 실적 확인 전화를 하는 등 고인에게 과도한 압박을 줬다”며 “이번 사건의 원인은 사용자 측의 실적 지상주의”라고 밝혔다. 당시 KB국민은행 측은 “매우 안타깝다”며 “규정상 허용된 범위 내에서 유족들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원론적인 입장만 되풀이했다.

KB국민은행 노조에 따르면 지난해 재직 중 숨진 KB국민은행 노동자는 10명에 달한다. 대부분 과로와 스트레스로 인한 심혈관질환과 돌연사, 자살로 숨졌는데 사측의 실적압박이 원인이라는 게 노조의 설명이다. 실적압박에 대한 성토가 이어질 때마다 사측은 직원들에게 “최고의 실적에 걸맞은 최고의 보상을 하겠다”며 “의심하지 마라”고 했다. 성과급으로 불만을 잠재우는 전략을 택한 셈이다. 하지만 지난해 10월부터 파업 전야제 전날인 1월 6일까지 성과급에 대한 합의는 이뤄지지 않았다.

노조가 투쟁을 포기할 수 없는 또 다른 이유는 사측의 빈번한 부당노동행위에 있다. 노조는 이번 투쟁과정에서 파업 방해 등 사측의 극심한 부당노동행위에 시달렸다고 주장한다. 노조가 일차적으로 확인한 부당노동행위만 8건이 넘는다. 노조에 따르면 파업 전날인 1월 7일, 부산의 한 KB국민은행 지점에서는 업무시간 이후 지점장이 출입문을 잠갔다. 직원들이 파업 참여를 하지 못하도록 훼방을 놓은 것이다. 부산지역 내 또 다른 지점장은 조합원을 싣고 파업 현장으로 가는 버스를 따라가 조합원 한 명을 데리고 복귀하기도 했다.

경북지역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경북의 한 지점 소속 ㄴ차장은 개인차량을 이용해 파업 참가버스를 120㎞가량 쫓아갔다. 그는 버스가 휴게소에 정차한 틈에 조합원 2명을 회유해 다시 영업지점까지 데리고 갔다. ㄴ차장은 노조 측에 “직속상관인 본부장으로부터 지시를 받고 버스를 따라 이동했을 뿐 파업을 회유한 적은 없다”고 해명했다.

이밖에 서울의 한 지점에서는 파업 전 주말에 팀장이 전 직원을 상대로 회유 전화를 걸었고, 파업 전날 오후 7시쯤에는 본부장이 직접 전 직원을 불러 모아 “(파업에 참가할지) 의사를 밝히라”고 강요했다. 이 같은 파업 참여 사전조사는 간부 개인의 차원에서 이뤄진 게 아니다. 노조가 입수한 사측의 ‘총파업 관련 복무 유의사항 통지’에 따르면 경영지원그룹 대표는 파업을 앞두고 총파업에 참여하는 직원에게 인사시스템 근태관리에 ‘파업 참가’를 기입하도록 지시했다. 노조 측은 “이전에는 결근 사유를 명시하도록 하지 않았다”며 “파업 참가 여부를 등록하라는 것은 인사상 불이익을 주겠다는 의미”라고 밝혔다.

노조는 해당 사안과 관련해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제기할 예정이다. 한편 KB국민은행 측은 사측의 부당노동행위 의혹을 포함, 노조의 활동 일체에 대해서 공식적인 입장을 내지 않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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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업을 하루 앞둔 7일 머리에 총파업 띠를 두른 KB국민은행 노조원들이 서울 여의도 KB국민은행 본점에 들어서고 있다./이석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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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진 ‘성과 지상주의’에 대한 반발

알려진 바와 달리 성과급은 이번 파업의 주요 사안이 아니다. 이미 파업 전에 노사 간 이견이 좁혀졌기 때문이다. 노조가 사측과의 협상에서 다루는 핵심 쟁점은 성과연봉제의 일환인 호봉상한제(페이밴드) 폐지와 저임금직군 경력 추가 인정, 임금피크제 도입 시기 조정이다. 특히 2014년 KB국민은행이 박근혜 정부의 성과주의 확대 방침에 맞춰 도입한 페이밴드는 연차가 높아져도 승진을 하지 못하면 임금이 올라가지 않도록 하는 제도다. 노조는 페이밴드가 직원 간 과도한 실적 경쟁과 차별을 조장하는 대표적인 제도로 보고 협상 테이블의 주요 안건으로 꺼내놨다.

업계에서는 노조의 투쟁이 그동안 성과 지상주의를 추진해 온 KB국민은행 경영진에 대한 불신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고 있다. KB금융지주 회장의 연임 논란과 노조선거 개입, 채용비리 등 이른바 ‘금융적폐’ 척결에 대한 의지가 노조원들을 파업으로 이끌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노조가 ‘합법적’인 절차를 밟아 벌인 경고성 파업은 엉뚱하게도 노사 간 조정이 끝난 ‘300% 성과급’ 이슈에 묻혔다. 여기에 다수의 보수·경제 매체가 노조에 씌운 ‘귀족노조’ 프레임은 노조를 옴짝달싹 못하도록 묶어버렸다.

김종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부소장은 “KB국민은행 투쟁이 흐지부지 끝나게 된다면 앞으로 다른 노조의 합법적인 투쟁이 움츠러들 수 있다”며 “노조의 투쟁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국민들의 지지가 절대적이기 때문에 지금이라도 노조가 싸우는 이유를 제대로 알려야 한다”고 말했다.

반기웅 기자 ba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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