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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6 (월)

[김선영의 드라마토피아]‘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의 아쉬운 실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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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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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글로벌 스트리밍 업체 넷플릭스가 공개한 <블랙 미러: 밴더스내치>가 온라인상에서 큰 화제였다. ‘디지털시대의 환상특급’이라 불리며 마니아층을 형성하고 있는 SF 시리즈 <블랙 미러>의 특별판이다. 새 에피소드가 공개될 때마다 주목받는 이 시리즈에서 이번 특별판이 특히 더 이목을 끈 데에는 우선 형식 실험 덕이 컸다. 시청자들이 직접 이야기 전개를 선택하는 인터랙티브 형식을 도입했다. 책이나 게임에서 이미 오래전부터 활용된 장치로 그리 신선할 것 없다는 비판도 있지만, 호평의 핵심은 그 형식을 어떻게 활용했는가다. 여러 선택지를 주어 실컷 미로를 탐험하게 만들고,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다’는 내용과의 유기적 결합으로 그러한 선택이 조작된 환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그리고 이마저 디스토피아 장르의 흔한 스토리 아니냐는 인식에 이를 무렵, 공식 결말 외에 또 다른 해석들을 끊임없이 내놓는 팬들을 보면서 결국 이 같은 탐험의 쾌감 자체가 이 작품의 궁극적 목적임을 깨닫게 된다. 말하자면 <블랙 미러: 밴더스내치>는 형식 실험을 통해 더 풍부한 이야기를 이끌어냄으로써 단순한 드라마 시청을 능동적 체험의 영역으로 확장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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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국드라마 중에도 이와 유사한 체험의 즐거움을 안겨준 작품이 있다. tvN 토일 드라마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이다. 물론 단서를 달아야 한다. 적어도 중반까지는 그랬다.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은 한국 판타지 드라마의 개척자 송재정 작가의 신작이다. 송 작가는 tvN <인현왕후의 남자>와 <나인: 아홉 번의 시간여행>을 통해 타임슬립 판타지의 유행을 선도했고, MBC <W>에서는 가상세계와 현실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이야기로 주목받았다. 그리고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은 그동안 주로 가상 및 초현실 세계를 기반으로 했던 한국 판타지 드라마에 증강현실이라는 영역을 끌어들여 판타지 서사의 지평을 한 차원 확대했다.

줄거리는 투자회사 대표 유진우(현빈)가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이라는 혁신적 증강현실 게임의 판권을 구입하기 위해 스페인 그라나다에 갔다가 신비한 사건에 휘말리는 이야기다. 만나기로 한 게임 개발자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현실의 인물이 게임 속 캐릭터가 되는가 하면, 게임 속 상황이 현실에 영향을 미친다. 가상과 현실의 경계가 무너지면서, 게임에 갇힌 진우는 그 속이 얼마나 깊은지조차 알 수 없는 미로를 탐색하며 스스로 출구를 찾아 나가야 한다. 이 과정에서 시청자들은 주인공과 함께 적극적으로 게임의 퍼즐을 맞춰나가며 기존 드라마 시청법의 관성을 깨는 체험의 쾌감을 느꼈다.

하지만 이러한 미로 탐색은 중반 즈음부터 같은 자리를 빙빙 맴돈다. 수많은 방향으로 열려 있던 도입부가 어느 순간 진우가 게임 레벨 업을 해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이야기로 단순하게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진우와 다양한 관계를 형성했던 주변 인물들은 이야기 전개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모조리 배경으로 물러났다. 가장 심각한 건 이야기의 또 다른 축을 형성하리라 여겨진 여주인공 정희주(박신혜)의 활용이다. 게임 개발자 정세주(찬열)의 누나인 정희주는 온 가족과 함께 스페인에 유학을 왔다가 부모가 사망하는 바람에 가장이 된 인물이다. 세주가 게임을 개발한 덕에 진우로부터 100억원대의 계약금을 받지만, 그 정확한 맥락을 전혀 알지 못한다. 주 역할은 진우가 아플 때 간호하고, 진우를 찾아 헤매고, 걱정하고, 연락을 기다리는 일이다. 진우가 최첨단 기술을 사용해 가상과 게임을 넘나드는 모험을 즐기고 있을 때, 희주는 생계형 캔디에서 신데렐라가 되는 구시대적 서사에 머물러 있다.

돌이켜보면 이는 송재정 작가의 전작에서도 반복되어온 한계였다. 형식적 실험의 진화는 대개 남주인공의 몫이다. 남주인공들이 시간과 차원을 넘나들며 미스터리를 해결하는 능동적인 액션 캐릭터로 활약할 때, 여주인공의 역할은 지극히 제한적이다. 이러한 서사의 간극은 가장 실험적인 형식을 선보인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에 와서 더 벌어졌다. 정희주를 게임 속으로 끌어들이지 못해서 그녀를 모델로 한 엠마 캐릭터를 등장시켰음에도 이조차 잘 활용하지 않는다. 게임 개발자 최양주(조현철)가 엠마를 ‘최애캐’라 부르며 사무실 한쪽에 관상용 캐릭터처럼 전시하는 장면이 이 캐릭터의 본질을 말해주는 단적인 사례다.

이 작품의 여성 캐릭터 활용의 한계는 정희주만의 문제도 아니다. 유진우는 두 번이나 결혼에 실패한 인물로 등장하는데 두 전처 캐릭터의 서사 모두 너무나 구태의연하다. 첫 번째 아내 이수진(이시원)은 진우의 친구이자 라이벌인 차형석(박훈)과의 관계에서 뺏고 뺏기는 전리품처럼 묘사된다. 두 번째 아내 고유라(한보름)는 진우의 재산을 노리고 이혼소송을 통해 계속해서 괴롭히며 희주를 견제한다. 정희주 등 진우와 가장 밀접한 관계를 맺는 세 여성 캐릭터의 활용을 보면, 이 드라마가 최첨단 기술 배경의 작품인지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게임처럼 중세 배경의 작품인지 헷갈릴 지경이다.

초반의 형식 실험은 분명 신선했다. 그러나 <블랙 미러: 밴더스내치>가 단순한 형식 실험이 아니라 주제, 내용과 유기적으로 결합하며 호평받은 것과 달리,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의 실험은 결국 남주인공 캐릭터의 매력을 돋보이게 하고 활약을 극대화하기 위한 장치로만 귀결됐다. 형식은 21세기를 지향했는데 여성 캐릭터 활용은 ‘쌍팔년도’ 과거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 이 작품의 비극이다.

김선영 TV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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