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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8 (토)

[정민의 世說新語] [502] 선담후농 (先淡後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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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명나라 당지계(唐志契)가 ‘회사미언(繪事微言)’의 ‘적묵(積墨)’ 조에서 먹 쓰는 법을 이렇게 설명했다.

"화가는 먹물을 포갤 줄 알아야 한다. 먹물을 진하게도 묽게도 쓴다. 어떤 경우는 처음엔 묽게 쓰고 뒤로 가면서 진하게 한다(先淡後濃). 어떤 때는 먼저 진하게 쓰고 나서 나중에 묽게 쓴다. 비단이나 종이 또는 부채에 그림을 그릴 때 먹색은 옅은 것에서 진한 것으로 들어가야 한다[由淺入濃]. 두세 차례 붓을 써서 먹물을 쌓아 나무와 바위를 그려야 좋은 그림이 된다. 단번에 완성한 것은 마르고 팍팍하고 얕고 엷다. 송나라와 원나라 사람의 화법은 모두 먹물을 쌓아서 그렸다. 지금 송·원대의 그림을 보면 착색을 오히려 7~8번씩 해서 깊고 얕음이 화폭 위로 드러난다.

지금 사람은 붓을 떨궈 그 자리에서 나무와 바위를 완성하려고 혹 마른 먹으로 그린 뒤 단지 한 차례 엷은 먹으로 칠하고 만다. 심한 경우 먹물을 포개야 할 곳에도 그저 마른 붓으로 문지르고 마니 참 우습다."

선담후농, 유천입농! 그림은 여러 차례 붓질로 농담(濃淡)이 쌓여야 깊이가 생긴다. 일필휘지로 그린 그림에는 그늘이 없다. 사람의 교유도 다르지 않다. '필주(筆疇)'에서는 이 말을 벗 사귀는 도리로 설명했다.

"처음엔 담백하다가 나중에 진해지고, 처음엔 데면데면하다가 뒤에 친해지며, 먼저는 조금 거리를 두다가 후에 가까워지는 것이 벗을 사귀는 방법이다. 세상 사람들은 눈앞만 기뻐하여 뒷날에 대해서는 염려하지 않는다. 한 마디에 기분 맞으면 어린 양을 삶고 훌륭한 술을 차려 처자를 나오게 해서 간담을 내어줄 듯이 한다. 그러다가 한 마디만 마음에 맞지 않거나 한 차례 이익을 고르게 나누지 않고, 또 한 번의 이자만 주지 않아도 성내는 마음이 생겨나, 각자 서로 미워한다.

군자의 사귐은 담담하기가 물과 같고, 소인의 사귐은 농밀하기가 단술과 같다. 물은 비록 담백하나 오래되어도 그 맛이 길게 가고, 단술은 비록 진해도 오래되면 원망이 일어난다."

소뿔도 단김에 빼야 직성이 풀리고, 뭐든 화끈한 것만 좋아한다. 차곡차곡 쌓아 켜를 앉힌 것이라야 깊이가 생겨 오래간다. 그림도 그렇고 사람도 그렇다.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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