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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8 (토)

[일사일언] 벼룩시장에서 생긴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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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박종진 '만년필 탐심' 저자


일요일이면 서울 동묘역과 신설동역에 걸쳐 생기는 벼룩시장은 수많은 인파 때문에 발 디딜 틈 없이 북적인다. 여기저기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옷가지 하며 오래된 시계와 고장난 카메라 등, 새것은 아니지만 없는 것이 없다. 누구에겐 쓸모없어 버려진 물건, 하지만 누구에겐 꼭 필요한 물건을 단 돈 몇 천원에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강북에서 나고 자란 나는 이 벼룩시장을 중학교 때부터 다녔다. 당시엔 갖고 싶었던 만년필 때문에 오게 되었지만 라디오 같은 다른 잡동사니도 좋아하여 남들이 등산이나 낚시를 하는 것처럼 벼룩시장 다니는 게 내 취미였다. 그러던 중 작년부터 이 취미에 몇 명이 동참하게 되었다. 혼자에서 여럿이 되니 품목도 늘어났고 그만큼 더 재미있어졌다.

우리는 비가 올 때를 제외하고 매주 일요일이 되면 아침에 모여 벼룩시장을 함께 돌았다. 싸게, 더 싸게 사는 것이 우리의 목표였다. 너무 비싸거나 깎아주지 않으면 상인들과 싸웠고, 급기야 한 상인으로부터 "당신들한테는 팔지 않아"라는 말도 들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는 '필요한 물건이면 깎지 말고 사고, 비싸면 사지 말자'란 규칙을 만들고 예의를 갖춰 상인을 대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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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멤버들 사이에서 상인들이 너무 비싸게 부른다는 불만도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런 불만은 사라졌다. 자주 들르는 몇몇 상인들 사이에서 "저 사람들은 값을 깎지도 않고 매너도 좋아"라는 인식이 생겨 우리에겐 에누리 없는 값을 불렀기 때문이다. 이렇게 한 계절 두 계절이 지났다. 그리고 며칠 전 일요일 사람들이 바글바글 모여 있길래 그곳으로 갔다. 꽤 괜찮은 다이어리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얼마예요?" "5000원입니다." 지갑을 꺼내 돈을 내려는 순간, "아, 우리 단골손님 오셨네! 3000 원입니다." 이렇듯 진심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빨리 전달된다.





[박종진 '만년필 탐심'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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