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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칼럼] 부총리가 무서워 보고를 못 한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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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비즈


신재민 전 기획재정부 사무관이 1월 2일 청와대 청원게시판에 ‘나는 왜 기획재정부를 그만두었는가-신재민’이란 제목의 글을 올렸다. 200자 원고지로 157장 분량이다.

장문의 글은 정부가 KT&G 2대 주주인 기업은행을 통해 사장 인선에 개입하려 했다는 의혹, 2017년말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채무비율을 높이기 위해 청와대가 적자국채 발행을 압박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신 전 사무관은 유튜브로도 같은 내용을 폭로해 큰 파장을 일으켰다. 청와대와 기재부는 신 전 사무관의 주장이 사실과 다르다고 반박했다.

신 전 사무관의 글에서 폭로 내용 외에 눈길을 끌었던 것은 기재부 차관보가 부총리를 무서워 해 최소 보름 이상 보고를 못했다는 대목이었다. 공무원 조직의 상명하복 문화가 공직기강이라는 이름으로 미화되고 있지만, 대다수 국민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정책이 치열한 토론 끝에 나오는 게 아니라 윗사람의 지시에 따라 하루 아침에 내용이 정반대로 달라질 수 있다는 부끄러운 모습이 만천하에 공개됐다.

글을 보면 국고(國庫)를 관리·운영하고 국채정책을 수립·총괄하는 국고국과 담당 보고라인은 2017년 10월 ‘2017년 세금이 당초 예상보다 15조원 정도 더 걷힐 것으로 예상돼 적자국채 발행을 줄이겠다’는 내용을 부총리에게 보고하려고 했었다. 가계로 따지면 예상치 못한 보너스를 받게 됐으니 원래 받기로 했던 대출을 줄이겠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조세정책을 총괄하는 세제실에서 이미 2017년 초과 세입 규모를 10조원으로 보고해 일정이 꼬이기 시작했다.

국고국 입장에서는 자신들보다 전문성이 있는 세제실의 보고 내용과 다르다보니 "왜 세제실 보고와 다르냐"는 부총리의 예상 질문에 대한 답이 필요했다. 신 전 사무관에 따르면 세제실도 초과 세입을 15조원 규모로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직속상관인 세제실장에 보고하기 전이라 세부 내용을 국고국 쪽에 전해주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재정 담당 차관보는 예정보다 최소 보름이상 지난 2017년 11월 14일에야 부총리에게 관련 내용을 보고할 수 있었다.

11월 14일은 정부가 2주전에 발표했던 1조원 규모의 국채 조기상환(바이백 ·Buyback) 계획을 갑자기 철회한 날이다. 정부는 다음날인 11월 15일 국채 1조원을 조기상환하기로 했으나 차관보의 보고를 받은 김동연 전 부총리가 "그 자리까지 올라갔으면 정무적 판단을 해야 하는 것 아니야? 1급까지 올라가 놓고도 뭐가 중요한지 판단을 못해? 왜 추가로 발행할 수 있는 적자성 국채가 8조7000억원이 안되는거야, 설명해봐. 발행할 수 있는 물량 최대로 확보해"라고 ‘박살’을 내자 적자성 국채 발행 가능 규모를 최대한 확보하기 위해 갑자기 취소한 것이다. 원래를 적자국채 발행을 줄일 계획이었는데, 오히려 더 늘려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정부가 사상 처음으로 조기상환 계획을 하루 전에 갑자기 취소하자 채권시장은 크게 흔들렸다. 당시 국고채 금리 가격이 급등, 급락하면서 일부 운용사는 수십억원의 손해를 본 것으로 알려졌다. 만약 차관보가 부총리에게 제때 보고를 하고 불가피하게 조기상환 계획을 철회하더라도 미리 시장과 소통했다면 채권시장의 혼란은 없었을 것이다. 정부의 잘못으로 누군가가 큰 손해를 입었음에도 책임지는 사람은 없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7년 8월 22일 부처 업무보고를 받을 때 "공직자는 국민과 함께 깨어있는 존재가 되어야지, 정권 뜻에 맞추는 영혼 없는 공직자가 돼서는 안된다"고 했다. 취임 때부터 ‘영혼없는 공무원’ 논란이 있었던 김동연 전 부총리도 2017년 6월 15일 취임식에서 "(직원들이) 소신껏 일할 수 있도록 최대한 뒷받침하겠다"고 했었다. 그러나 상사가 무서워 시장에 혼란이 있을줄 알면서도 보름 넘게 보고도 못 하는게 지금 기재부의 모습이라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전재호 경제부장(jeon@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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