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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일)

[이수연 PD의 방송 이야기] 연말 시상식, 무대 뒤는 전쟁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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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이수연 TV조선 시사제작부 PD


"내 옷! 내 옷!"

연말 연예대상 시상식 뒷이야기를 다룬 프로그램에서 출연자들이 다급하게 외친 말이다. 시상식 2부 첫 무대를 꾸며야 할 연예인들이 광고가 나갈 동안 의상을 갈아입어야 하는데 준비가 안 된 것이다. 생방송이 10분도 채 안 남았으니 무대 뒤가 얼마나 아수라장이 됐을지 짐작이 갔다.

필자에게도 이런 경험이 있다. 오래전 일이지만 타 방송국에서 작가로 한국방송대상 시상식에 참여할 때였다. 2시간 생방송이라 시상자부터 축하 공연 가수 섭외, 수상자 연락까지 몇 주 전부터 준비를 철저히 했는데, 막상 방송 당일이 되니 무대 뒤 여기저기서 일이 터지기 시작했다.

먼저 포문을 연 것은 속칭 '출연자 펑크'였다. 시상자인 한 인기 여배우가 연락 두절이 된 것이다. 담당 매니저도 행방을 모른다니 속수무책이었다. 당장 무대 뒤 차가운 바닥에 주저앉아 다른 여배우들에게 전화를 돌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드레스부터 메이크업까지 준비할 것이 한두 개가 아니니 흔쾌히 오겠다는 여배우가 없었다. 절망감에 눈물이 떨어지려던 순간, 좀 전에 거절했던 한 여배우가 사정이 딱했던지 해주겠노라 다시 전화를 줬다. 몇 번을 고맙다고, 내 얼굴이 안 보이는데도 이마가 땅에 닿도록 인사를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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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밖에도 어떤 출연자는 "지금 제주도"라며 "비행기표가 없으면 못 올 수도 있다"고 살 떨리는 예고를 하고, 방송 때 사용할 피아노가 도착하지 않는 등 크고 작은 일들이 계속 벌어졌다.

그런데 진짜 위기는 생방송 때 찾아왔다. 수상자 수십 명을 무대 뒤에서 준비시켰다가 순서에 맞게 등장시켜야 했는데, 긴장이 된다며 화장실에 가거나 연예인과 사진을 찍겠다고 사라지는 등 이탈자가 속출했다. 이러다간 방송 사고 나겠다 싶어 결국 이들이 다른 데 못 가도록 생방송 내내 몇 번이고 관등 성명을 체크하며 지켜봐야만 했다.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생방송은 끝이 났고, 내 속사정은 모르겠다는 듯 미련 없이 철거되는 무대를 바라보며 공허함이 들었던 기억이 있다. 그래도 이 전쟁 같은 하루가 기억에 남는 것은 방송인으로서 기억할 만한 행사를 해냈다는 무대 뒤의 추억이 있기 때문이다.

[이수연 TV조선 시사제작부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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