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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6 (월)

[빨간날]젊지도, 늙지도 않은…'마흔앓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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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니투데이 남형도 기자] [편집자주] 예로부터 어른들은 '아홉수를 조심하라'고 했다. 미완의 숫자 '아홉'(9)이 들어간 나이는 불길한 때라 여겨서다. 신빙성 없는 미신일 수 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아홉수'가 각 세대의 고민을 대변하는 나이라는 것. 스물, 서른, 마흔 등 아홉수의 해를 넘긴 이들. 미완의 시간을 거쳐 '완성'을 위한 걸음을 내딛고 있다.

[졸업, 아홉수!-③]부쩍 생각 많은 삶의 중턱, "살아온 삶 돌아보고, 살아갈 삶에 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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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임종철 디자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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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마흔이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한다."

김병진씨(40·가명)는 지난 12월 말, 이 말이 문득 생각났다. 링컨 대통령의 명언(名言). 마흔을 코 앞에 뒀던 어느 날, 문득 거울 속 자기 모습이 낯설어졌다. 촘촘하던 이마선은 꽤 횅해졌고, 몰랐던 잔주름도 꽤 늘었다. 푸석푸석한 피부는 신경 안 쓴지 꽤 됐다. 이 얼굴에 담긴 39년의 삶은 뭐 였을까. 돌아봐도 그저 달렸던 것 말고는 기억이 안 났다. 불과 1년 전 일도 가물가물했다. 크게 보면 취업도 그럭저럭 했고, 결혼도 했고, 아들도 하나 생겼다. 안정적 삶이었다, 객관적으로 보면. 그런데 맘은 어쩐지 복잡했다. 절반 정도 왔는데, 이게 원하던 삶인가, 잘 살았었나, 이제 뭘 해야하나, 난 누구인가, 앞으로 살아갈 세월은 어떡하나.

이른바 '마흔앓이'다. 공자 어록인 '불혹(不惑: 세상일에 정신을 뺏겨, 갈팡질팡하거나 판단을 흐리는 일이 없게 됨)'은 옛말이다. 평균 수명이 마흔살일 때나 맞았던 말이다. 지금의 마흔살은 흔들린다. 젊지도, 늙지도 않아서.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들이 더 많아서. 문득 삶의 '이정표'가 사라져서(10대 땐 공부, 20대 땐 연애와 취업, 30대 땐 일과 결혼이었는데). 몸이 예전 같지 않아 괜히 불안해서. 또 삶은 그래도 웬만큼 자리 잡혔는데, 돌아보니 잘 살고 있는 건지 혼란스러워서다.

올해 갓 마흔이 된, '마흔 신입생'들은 더 그렇다. "이제 낼모레면 마흔"을 입버릇처럼 달고 살다, 진짜 마흔이 됐다. 그래도 "아직 30대"라며 실낱같은 동아줄을 붙잡고 있었는데, 그마저 끝났다. 불과 일주일 남짓 지났는데 생각이 뭉게뭉게. '이제 정말 '중년'이구나'란 걸 머리는 알지만, 마음은 어쩐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대기업 직장인 박정호씨(40)는 지난 3일 모임에 나갔다가, "올해 몇 살이세요?"란 물음에 말문이 턱 막혔다. "이제 마흔 됐어요"라 해야 하는데, 차마 입에서 잘 떨어지지 않았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80년생이에요"라고 둘러댔다. 박씨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됐구나는 걸 새삼 느꼈다"며 "나이를 비밀로 하고 싶어진다"고 했다.

마흔이 주는 '무게감'이다. 월스트리트저널 기자이자 작가인 파멜라 드러커맨은 저서 '맙소사 마흔'에서 "40이란 숫자는 무게감과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고 인식된다"고 했다. 예수는 40일 동안 금식했고, 마호메트는 40세 때 자기 앞에 나타난 대천사 가브리엘을 만났으며, 성경에 나오는 대홍수는 40일 밤낮으로 계속됐단다. 저자는 "어떤 언어에서 40은 '많다'를 의미한다"고 했다. 프랑스 소설가 겸 극작가였던 빅토르 위고는 마흔을 '젊은이의 노년'이라고 했단다.

그런데, 요즘 시대에 마흔은 그냥 '많다'고만 하기엔, 또 많지 않은 나이가 됐다. 평균 수명이 100세라는데, 아직 60년이나 남았다. 까마득하다. 그래서 왠지 '젊지도, 늙지도 않은 나이'처럼 여겨진다. 뭔가 많이 해왔지만, 또 뭔가 많이 할 수 있는 나이가 된 것이다.

그래서 살아온 날들을 반추(芻)하게 된다. '잘못 낀 단추' 같은 과거는 곱씹으면서.

주부 성모씨(40)는 새해 저녁, 옛 사진을 보다 갑자기 눈물이 났다. 일곱 살배기 딸내미가 "엄마, 왜 그래?"하며 쪼르르 달려왔다. "이제 늙어가는구나, 청춘은 남 얘기구나, 예전 같지 않구나란 생각에 서글퍼졌다"고 했다. 그도 한땐 잘 나가던 직장인이었다. 임신을 하고, 아이를 낳고, 잠시 버티다 결국 회사를 그만뒀다. 말로만 듣던 '경단녀(경력단절여성)'가 됐다. '성 과장'이란 호칭은, 'OO엄마'로 바뀌었다. 이름이, 자신의 삶이 사라졌다. 성씨는 "여태껏 뭐 했나 생각하다, 아이를 보며 진정이 됐다"고 토로했다.

직장인 이은주씨(40·가명)는 현 직장에 들어온 걸 후회하고 있다. 원래 그의 꿈은 비영리단체(NGO)서 일하는 거였다. 젊었을 때부터 품은 꿈이었다. 서른살이 넘어서까지 버티다, 간신히 취업을 했다. 그 당시엔 다행이라 여겼다. 하지만 10여년 동안 다니면서 결국 안 맞는 옷을 입었단 걸 깨달았다. 이씨는 "뭘 하기엔 늦었고, 그렇다고 안 하기엔 시간이 많이 남은 나이가 마흔인 것 같다"며 "당분간 고민이 많을 것 같다"고 하소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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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도 "젊은 시절로 되돌아가고 싶진 않다"는 게 마흔살들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어찌 보면 '아이러니'한 이야기다. 자영업자 이상원씨(40)는 "30대는 현실이 너무 치열하고 고달프고 불안정했었다"며 "마흔살에 느끼는, 안정된 삶 속 복잡한 감정들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씨는 "다시 그 시기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고 했다. 직장인 송정훈씨(40)도 "한 단계를 겨우 지나왔는데, 이전 단계로 가려니 막막해진다"며 "어쩌면 마흔에 느끼는 마음은, 다음 단계에서 겪는 자연스런 감정인 것 같다"고 했다.

이 시기를 지나온 이들은, 마흔살들에게, "나이를 먹는 게 꼭 나쁘지만은 않다"고 조언한다. 일본 작가 기시미 이치로는 '마흔에게'란 저서에서 "자전거를 타고 오르막길을 오르려면 힘이 든다. 하지만 다 올라가면 반드시 내리막길이 나온다"며 "바람을 가르고 내려오는 내리막길은 얼마나 상쾌하냐"고 했다. 꿈과 목표, 야심, 초조함을 어깨에 메고 필사적으로 살아왔다면, '앞으론 어깨 짐을 내려놓고 가볍게 즐기자'라고 생각하라는 의미다.

이를 넘어 '나이 듦의 가치'에 대해서도 강조했다. 기시미 이치로는 "지금까지 인생을 살며 배우고 경험하고 축적해 온 것들을 전부 집약해 무언가 표현할 수 있고, 어떤 평가를 받는 개의치 않고 배우는 기쁨을 만끽할 수 있고, 게다가 젊은 시절보다 사물을 깊이 이해할 수 있다"고 했다.

인문학자 김경집 교수도 저서 '마흔 이후 알게된 것들'에서 "하나의 삶에도 그 중간이 있다. 어쩌면 날마다 그날이 남은 절반의 삶의 시작이라 생각하면 섭섭하고 아쉬울 것도 불안하고 두려울 것도 없을 듯하다"며 "오히려 앞으로 살아갈 절반의 삶을 더 충실하게 꾸려야겠다는 각오와 너그러움을 함께 누릴 수 있다"고 했다.

남형도 기자 hu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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