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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6 (월)

직장 갑질 신고하면 '네가 유별난거야'…직장 민주주의 아직 멀었다 [김현주의 일상 톡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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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현직 직원에 대한 이른바 '슈퍼 갑질'로 최근 구속된 양진호 한국미래기술 회장의 작태는 아직도 널리 회자되고 있습니다. 그만큼 심각했다는 뜻이기도 한데요.

직원에게 음료가 든 유리컵을 집어던지는 것은 물론 손찌검을 하거나, 회식 때 생마늘이나 겨자를 강제로 먹이는 것도 모자라 석궁이나 일본도(刀)로 산 닭을 잡도록 하는 엽기행각도 벌였습니다.

잘못 보이면 일터를 잃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악용해 직원에게 일반인이 상상도 못할 일을 거리낌 없이 저지른 것입니다. 당하는 사람 입장에서 심한 모멸감이나 스트레스를 감당해야 하는 직장 내 괴롭힘은 반드시 뿌리 뽑아야 합니다.

지금 이순간에도 수많은 직장인이 직장 내 괴롭힘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여태껏 근로기준법에 직장 내 괴롭힘 금지조항이 없어 가해자를 처벌할 수 없었습니다. 개정 근로기준법에 이 조항이 새로 들어간 것은 늦었지만 참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직장 갑질을 막아보려는 정치권의 의지를 제도화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적지 않습니다. 직장 내 괴롭힘에 시달려온 피해자 입장에서는 분명 반가운 소식입니다.

다만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이 만들어졌어도 괴롭힘의 기준이 모호해 다툼의 여지가 많다면 실효성이 떨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전문가들은 입법 취지를 제대로 살리면서도 시행상 혼란을 최소할 수 있도록 정부가 세부적인 메뉴얼을 만들어 배포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세계일보

직장에서 우월적인 지위를 이용해 직원을 괴롭히고, 인격적인 모멸감을 주는 갑질 행태는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닙니다.

"새로 온 대표는 직원들에게 술을 강요합니다. 중국집 회식에서 여직원들이 자장면을 먹고 난 그릇에 소주와 맥주를 섞어 더러운 술을 마시게 합니다."

"상사의 흰머리 뽑기, 옥수수·고구마 껍질 까고 굽기, 라면 끓이기 등 여러 일이 있었습니다. 마지막까지도 '네가 사회생활을 못 해서 나가는 것이다. 어느 회사도 취업을 못 할 거다'라고 했습니다."

이는 올해 하반기 시민단체 직장갑질 119에 제보된 직장 내 괴롭힘 사례입니다.

직장갑질 119는 올해 하반기 접수된 직장 내 괴롭힘 대표 사례 50개를 선정해 지난 23일 발표했습니다. 직장갑질 119에 따르면 7월1일부터 12월22일까지 들어온 이메일 제보는 1403건에 달했는데요. 월평균 234건, 하루 평균 8.25건의 제보가 들어온 셈입니다.

직장갑질 119가 발표한 사례 가운데는 쉬는 날 가족과 워터파크에 간 직원을 도중에 돌아오라고 지시하거나, 쓰레기 분리수거 등 집안일을 맡기는 등 직원을 노예처럼 부리는 사례가 수두룩했습니다.

여직원이 임신 사실을 알리자 '육아휴직 내면 돌아올 자리는 없다'고 폭언을 하거나 상사가 본인이 없을 때 대표와 나눈 대화를 녹음하도록 지시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사내이사가 근무시간에 술을 마시고 산소절단기와 해머로 계단을 부수는 황당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직장갑질 119는 "직장인들이 황당한 갑질을 당해도 신고할 곳을 찾지 못해 고통받고 있다"며 "폭언, 인격 모독, 괴롭힘 등을 당하거나 잡일 강요를 당했을 경우 반드시 기록하고 녹음하고 증거를 수집해 놓아야 한다"고 조언했습니다.

업계 한 전문가는 "갑질은 개개인의 비뚤어진 성격 외에 고질적인 상명하복의 조직문화, 물질 만능주의 등이 원인으로 꼽히고 있다"며 "직장인에게 직장은 삶의 터전이자 일상을 보내는 중요한 곳이다. 직장 내 갑질 행태를 더 이상 관행으로 넘기지 말고 바로잡아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네가 사회생활 못해서 나가는 거야!"

직장 내 괴롭힘 금지를 위한 근로기준법 개정안이 지난 27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것은 직장 내 괴롭힘 금지를 법에 명시했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병원에서 신임 간호사를 폭언·폭행으로 괴롭히는 악습인 이른바 '태움' 관행 등이 논란을 일으킨 것을 계기로 직장 내 괴롭힘 근절을 위한 법적 기반이 마련된 것입니다.

개정 근로기준법은 직장 내 괴롭힘을 "사용자 또는 근로자가 직장에서의 지위 또는 관계 등의 우위를 이용해 업무상 적정 범위를 넘어 다른 근로자에게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주거나 근무 환경을 악화시키는 행위"로 규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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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 내 괴롭힘이 발생하면 사용자는 즉시 이를 조사하고, 피해자 보호를 위한 근무 장소 변경과 가해자 징계 등의 조치를 하도록 했습니다.

취업규칙에도 직장 내 괴롭힘 예방과 대응 조치 등을 필수적으로 기재하도록 했습니다. 직장 내 괴롭힘을 신고하거나 피해를 주장했다는 이유로 해고 등 불이익을 줄 경우 사용자는 3년 이하 징역 혹은 3000만원 이하 벌금의 처벌을 받습니다.

◆근로기준법 개정안 국회 통과…직장 내 괴롭힘 직접적인 처벌조항 無

다만 직장 내 괴롭힘에 대한 직접적인 처벌 조항을 두진 않았습니다.

고용노동부는 "최초로 입법화되는 점 등을 고려해 처벌보다는 사업장 내 자율적 시스템으로 규율해나가도록 했다"고 설명했습니다.

갑질에 대한 경각심이 커지면서 직장 내 괴롭힘이 사회 문제가 됐지만, 노동부는 처벌 조항이 없어 근로감독으로 직장 내 괴롭힘을 적발해도 사법 처리하지는 못하고 행정 지도를 하는 데 그쳤습니다.

실제 양진호 한국미래기술 회장이 직원을 대상으로 한 엽기 행각이 노동당국의 특별근로감독에서도 확인됐지만, 폭행 등을 제외하면 사법 처리로 이어지지는 않았습니다.

당국은 근로기준법에 직장 내 괴롭힘 금지 규정이 마련됨에 따라 직장 내 괴롭힘의 판단 기준 등을 담은 매뉴얼을 만들어 법 시행에 차질이 없도록 할 방침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행위가 직장 내 괴롭힘에 해당하는지를 두고 현장에서는 논란이 일 수 있음을 고려한 조치로 풀이됩니다.

당국은 판례 등을 검토해 직장 내 괴롭힘으로 볼 수 있는 사례를 매뉴얼에 유형별로 정리할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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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한국노동연구원 조사 결과, 직장인 10명 중 7명(66.3%)이 괴롭힘을 당했다고 답하는 등 직장 내 괴롭힘이 심각한 수준인 것으로 집계됐습니다. 이는 노동자 개인의 피해를 넘어 기업 차원의 생산성 저하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게 당국의 판단입니다.

산업재해보상보험법 개정안도 이날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습니다. 개정 산재보상보험법은 산재보험이 보호하는 업무상 질병에 직장 내 괴롭힘과 고객의 폭언 등으로 인한 업무상 정신적 스트레스가 원인이 돼 발생한 질병도 포함하도록 했습니다.

◆갑질 하루아침에 뿌리뽑는 건 쉽지않아…구조적 요인 개선, 정상적인 직장문화 유도해야

이번 개정안에 가해자 처벌 조항이 빠져 실효성 논란이 일고 있습니다. 앞서 지난 2월 스스로 목숨을 끊은 A씨 간호사 사건을 조사하던 경찰은 "병원 내 폭행, 모욕, 가혹 행위가 있었다는 구체적 자료를 발견하지 못했다"며 사건을 종결한 바 있습니다.

처벌보다는 사업장 자율적 시스템으로 규율해나가라는 취지겠으나, 강력한 처벌 조항이 있어도 근절하기 쉽지 않은 게 현실입니다.

보통 직장인이 해고나 왕따를 각오하지 않고서는 상사의 갑질을 폭로하거나 공식적으로 신고하는 건 결코 간단치 않습니다.

부하 직원인 피해자가 상사의 괴롭힘을 입증하는 게 말처럼 쉽지 않고, 금지 대상인 괴롭힘의 적정 범위를 놓고 또 다른 갈등이 생길 우려도 있습니다.

근로기준법 적용을 받지 못하는 4인 미만 영세 사업장 근로자나 특수고용노동자가 배제된 것도 문제입니다.

갑질은 지독하게 왜곡된 하나의 문화여서 하루아침에 뿌리 뽑는 건 쉽지 않습니다. 정부가 더 적극적으로 나서 구조적인 요인을 개선하며 정상적인 문화가 자리 잡도록 유도해야 합니다.

세계일보

올해 갑질 폭로가 일상화한 것은 변화에 대한 욕구가 매우 커졌다는 방증이기도 합니다. 2019년은 새로운 직장문화를 일궈가는 원년이 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한 전문가는 "상사의 갑질로 눈물을 흘리는 젊은이들이 더 이상 나와서는 안 된다"며 "갑질로 인해 고통받는 직장 내 약자들의 눈물을 더 이상 외면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김현주 기자 hj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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