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11.01 (금)

"한국말 알아요?" 산타에게 영어로 편지 쓴 손자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더,오래] 송미옥의 살다보면(67)
중앙일보

딸네가 가족을 만든 지 벌써 10년이란다. 오손도손 투덕투덕하며 사는 모습만으로도 부모 마음은 부자가 된다. [사진 송미옥]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6년 전 크리스마스이브, 소박한 파티를 한다며 딸네 손녀와 함께 케이크를 자르고 있는데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누군가하고 나가보니 호주에 사는 아들이 커다란 가방에 빨간 고깔모자를 쓰고 문 앞에 서 있는 것이다. 아이가 진짜 산타가 왔다며 환호성을 지르고 난리가 났다.

나도 너무 놀라서 평일도 아니고 크리스마스 전에 어떻게, 언제 왔냐고 끌어안고 정신없는 안부를 묻고 또 물으니 그냥 산타 놀이하려고 어제 비행기를 타고 왔다며 조카에게 가방 가득 과자를 부려놓았다. 아닌 밤중의 홍두깨라더니 그날 저녁 우리 집에는 어린 손녀가 과자봉지를 들고 좋아라 춤을 추고 우리는 그리웠던 이야기로 밤을 꼴딱 새웠다.

그러곤 새벽에 처가로 간다며 갔다. 크리스마스가 지난 다음 날 호주에 도착했다고 전화가 왔다. 무슨 홍길동도 아니고 아들의 행선지에 너무 정신이 없어서 허둥대다가 마음을 가다듬으며 생각해보니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왔다는 생각밖에 다른 이유가 없어서 종일 눈시울을 적신 날이었다.

중앙일보

호주에 갔는데 아이들이 어려서 근교에 있는 소렌토 비치란 곳을 다녀왔다. 형제가 되니 서로 잘 어울려 놀아서 보기만 해도 흐뭇했다. [사진 송미옥]




그런데 이번에 호주엘 가서 이런저런 대화를 하다가 놀라서 뒤집힐뻔했다. 그날 빨간 고깔모자를 뒤집어쓰고 우리에게 날아온 아들은 엄마가 보고 싶어서 온 게 아니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올 즈음 첫아이를 임신한 부인이 입덧이 심했는데 만릿길 먼 곳에서 하필 그때 친정엄마가 만들어주던 짜고 짠 오이지가 먹고 싶다며 울더란다.

다행히 부인이 항공사 직원이라 그걸 이용해 크리스마스 이틀 전부터 입석 표가 나기를 기다리며 공항에서 노숙했고, 밤을 새우며 기다린 결과 티브이 안 나오는 좌석이 취소되는 바람에 그 표를 얻어 열 시간 넘는 비행을 해서 날아온 것이다. 우리 집에는 인사만 하고 처가로 가서 가방 가득 친정 엄마표 오이지를 담아 그날 저녁 또 입석 표를 구해 긴 시간 쪼그려 앉아 하늘을 난 아들 산타….

이번에 호주에 가서 보니 그때 산타클로스가 되어준 남편이 고마워서 그런가? 하늘의 별을 따준 것과 같은 대우를 받으며 잘살고 있었다. 소소한 사랑의 표현이 평생의 선물로 남을 수 있는, 선물이 필요한 크리스마스다.

산타의 부재는 알 필요가 없는 그 날이 다가오면 아이도 어른도 모두 함께 들뜬다. 삶이 힘들고 지치더라도 그날만큼은 오 헨리의 단편 같은, 서로를 너무나 사랑한 젊은 부부의 바보 같은 크리스마스날의 풍경을 생각하며 사랑하는 이웃들과 작은 선물이라도 나누고 싶다.

산타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있다고 하는 어른의 거짓말은 대를 이어 한다. 교회에서 두 손 모아 기도하는 세 살짜리 아이에게 누가 거짓말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아주 구체적으로 그리기까지 할 수 있는 산타 할아버지를 말이다.

그 거짓말만은 신도 벌을 주지 않으신다. 부동산 재테크에 눈을 뜨신 것인지 핀란드에도, 일본에도, 세계 곳곳에 집 정도가 아니라 마을 전체를 통째로 갖고 계신다고 어느 지인은 그렇게 산타를 소개하기도 한다.

중앙일보

내년에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호주 사는 손주 녀석이 산타할아버지에게 편지 쓰는 모습이 사뭇 진지하다 못해 엄숙한 분위기다. [사진 송미옥]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휴가차 산타를 만나러 일본을 간다는 딸아이네 어린 손자들은 산타할아버지에게 편지를 잘 써야 선물을 받을 수 있다는 또 다른 거짓말에 그 편지만큼은 삐뚤빼뚤 어려운 한글을 하나도 어렵지 않게 잘 쓰니 희한하다.

결혼 10주년을 자축하는 가족선물이라고 하니 사치라고 생각하지 말고 잘 다녀오라고 말해주었다. 그날은 마냥 행복하기만 한 들뜬 거리 한 귀퉁이에서 성냥을 다 팔아야 집에 갈 수 있는 성냥팔이 소년 소녀 같은 젊은이도 있을 것이다. 그날만큼은 이른 저녁 성냥을 통째로 다 사 가는 선한 부자가 있었으면 좋겠다.

따뜻한 집으로 빨리 돌아가거나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오 헨리의 안타까운 선물 말고 작은 꽃 한 송이라도 주고받으며 사랑을 나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외로운 누군가는 그날 하루만큼은 나만의 촛불을 켜고 음악에 취해 소박하더라도 환한 하루를 보내기를.

퇴근길에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동화 같은 이야기에 잠시 차를 세운다. 추운 겨울날 쌀이 떨어져 쌀을 사러 간 엄마가 쌀은 안 사 오고 국화꽃 한 송이를 사 들고 들어오셨단다.

아…. 철없는 과부 엄마의 행동에 중학생이던 아들은 한숨을 쉬었다는, 큰 기억으로 남은 그 일이 훗날 꼬꼬 할머니가 된 엄마가 옛날이야기 하듯 하신 말씀이 집에 있는 돈을 다 모아서 장날 쌀을 사러 갔는데 쌀 한 되 값이 안 되어서 돌아오는 길에 마침 크리스마스라고 꽃을 팔고 있는 장사꾼에게 물으니 딱 가지고 있는 돈이 국화꽃 한 송잇값이었다고.

쌀을 못 사고 돌아오는 길에 산 국화 한 송이가 불쌍한 자신에게 위로가 되더라고. 내 삶이 폭폭하게 메마르고 추운 겨울이 계속되고 있지만 이번 크리스마스엔 나를 위한 꽃 한 송이는 사치로 살 수 있는 여유가 있었으면 좋겠다.

지난주 아들이 있어 다녀온 호주는 지금 한창 뜨거운 여름인 12월이 가장 화려하다. 집집이 크리스마스트리가 반짝거리고 온 집을 에둘러 별빛을 만들어 놓았다. 여름이라 그런가? 마음이 느긋하고 바쁘지가 않아 연말인가 싶지 않을 만큼 평화로웠다.

엄마 뱃속에서 짠 오이지를 먹고 자란 유치원을 다녀온 6살 손자가 트리가 놓여 있는 책상 앞에 앉아서 손가락을 재어가며 서툴지만 진지하게 편지를 쓴다. 산타에게 보내는 편지다.

중앙일보

6살 손자가 산타에게 보내는 편지. [사진 송미옥]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저기 바로 옆에 보세요. 뭔가요? 메리 크리스마스.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사랑해요. 한국말 알아요? 만약에 알면 아래를 보세요.

할머니 그리고 임현서. 모두 메리 크리스마스.”

송미옥 작은도서관 관리실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중앙일보 '홈페이지' / '페이스북' 친구추가

이슈를 쉽게 정리해주는 '썰리'

ⓒ중앙일보(https://joongang.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