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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6 (월)

[정운찬 칼럼]사회작동원리로서의 동반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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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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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경제는 지난 10년간 저성장과 양극화로 시달려 왔다. 성장률은 2%대에서 헤매며 벗어나질 못하고 있다. 분배는 소득 상위 1% 사람들이 경제 전체 소득의 15%를 차지하고, 상위 10% 사람들이 47%의 소득을 가져가고 있다. 내년도 성장률도 2.6%를 넘기 어려워 보인다. 소득분배도 악화되면 되었지 개선되지 않을 것이다.

경향신문

재정정책이나 금융정책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나는 오래전부터 적어도 단기적으로는 동반성장이 한국 경제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해왔다.

한국 경제를 살리는 관건은 설비투자에 있다. 지난 20년간 대기업도, 중소기업도 투자가 부진했다. 대기업은 돈은 천문학적으로 많은데 투자대상이 부족하다. 연구·개발(R&D) 지출이 많다고는 하나 대부분이 개발을 위한 지출일 뿐, 본연의 연구는 부족해서 핵심·첨단기술을 개발하지 못했다. 그 결과 투자할 데가 마땅치 않다. 따라서 개발에서 연구로의 방향전환이 필요하다. 그러나 시간이 걸릴 것이다. 현재 우리가 안고 있는 경제문제는 심각한데 말이다.

한편 중소기업은 비록 최고급기술은 아닐지 몰라도 투자할 데는 많은데 돈이 없다. 따라서 대기업으로 흐를 돈이 자연스럽게 그리고 합법적으로 중소기업으로 흐르도록 유도하면 중소기업이 투자를 늘리고, 그것은 중소기업의 생산증가, 고용증가, 소득증가, 소비증가, 저성장 완화로 이어질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이들과 협력하는 대기업도 활발해질 수 있다(분수효과). 또한 중소기업은 전체 기업의 99% 이상을 차지하고 고용은 88% 이상을 맡고 있으므로 소득분배를 개선하는 데도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그 방안은 이익공유, 중소기업 적합업종 선정, 정부의 적극적인 중소기업으로부터의 구매 증가 등이다.

그러나 이를 놓고 이데올로기 싸움이 한창이다. 근본적으로 시장주의자들은 동반성장 단기 3정책이 자본주의 정신에 어긋난다고 주장한다. 특히 이익공유를 격렬히 비판한다. 이들의 비판은 애덤 스미스를 떠올린다. 왜곡된 스미스가 아니라 진짜 스미스 말이다.

모든 사회는 구성원들의 행동을 비롯하여 정책·제도·법의 내용에 영향을 주는 중심적인 작동원리가 있다.

자본주의사회 작동원리의 핵심은 애덤 스미스에서 찾을 수 있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각 경제주체가 자기 이익을 추구하며 경제생활을 하면 ‘보이지 않는 손’에 인도돼 사회의 부를 극대화하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했다. 인간은 스스로 어떤 것이 이익이 되는지 가장 잘 알며, 자신의 이익만을 좇더라도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사회 전체의 이익이 증대되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후대 사람들이 애덤 스미스의 주장을 왜곡한 것이다.

애덤 스미스의 진정한 모습은 <도덕 감정론>에 나타나 있다. 그는 경제와 사회가 제대로 발전하려면 세 가지 덕이 필요하다고 했다. ‘현려(賢慮)’의 덕은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개인과 이들이 모인 시장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정의(定義)’의 덕과 ‘인혜(仁惠)’의 덕은 공정한 사회를 만드는 정부의 역할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애덤 스미스는 각 경제주체가 자유롭게 경제활동을 하면서도 개인의 내면에 있는 ‘공정한 관찰자’가 개인의 경제적 이익을 사회의 도덕적 한계 내에서만 허용함으로써 스스로 자신의 무한 자유를 제어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공정한 관찰자 역할을 확대하여 정부가 독점이나 폭리 등의 불공정한 사태에 개입해 공정을 유지토록 하는 것을 정의의 덕이라 했다. 인혜의 덕은 ‘경제활동을 할 자유’가 없는 소외계층을 적극적으로 돕는 것이다. 스미스는 정의가 경제사회의 기둥이며 인혜는 그 지붕이라고 보았다. 기둥이 무너지면 모든 것이 무너지고, 지붕이 부실하면 세찬 비바람을 피할 수 있는 안정된 생활이 위협받는다는 뜻이다.

이처럼 애덤 스미스가 주장하는 자본주의 작동원리는 ‘모든 개인이 자신의 이익을 시장에서 자유롭게 실현하는 것’과 ‘공정한 관찰자로서 개인의 이기심과 탐욕 때문에 정의와 인혜에 기초한 공동체 사회의 조화와 질서가 붕괴하지 않도록, 개인의 경제적 이익을 사회의 도덕적 한계 내에서 허용하는 것’이다.

자본주의경제 질서는 다양한 형태로 변화해 왔다. 그러나 두 가지(개인의 자유로운 경제활동, 공정한 관찰자에 의한 조정과 통제) 원리가 하나의 토대로 기능하는 자본주의사회의 작동원리는 변함없이 지속되었다. 애덤 스미스 시대의 고전적 자본주의는 개인의 공정한 관찰자 개념을 국가로 확대한 케인스적 자본주의를 거쳐 개인의 자유로운 경쟁을 극대화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로 변화해 왔다.

그러나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는 위기를 맞았다. 애덤 스미스가 정립한 자본주의의 두 가지 사회 작동원리 가운데 ‘공정한 관찰자에 의한 개인 이기심의 조정과 통제’를 배제하고, ‘개인의 자유로운 경쟁’만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공정한 관찰자’의 덕목을 상실하고 ‘자유로운 경쟁’만이 남은 인간은 오직 개인의 욕망만을 추구하기 때문에 공동체 사회는 이러한 욕망 실현의 장소와 대상에 불과하다. 능력주의와 실력주의란 명분으로 적자생존의 법칙이 인간사회에 관철되면서 오직 자본의 이윤 추구만이 인간의 삶과 사회를 결정할 뿐이다. 그 결과는 경제적 불평등의 심화와 양극화 그리고 미국발 글로벌 금융위기였다.

바로 여기에 동반성장이 필요하게 된다. 동반성장은 개개인을 상호작용의 관계를 갖는 공동체 사회 구성원으로 본다. 그리고 그들 사이의 관계를 ‘동반자’ 관계로 설정한다. 그래서 개인이 구현할 수 있는 행복과 자유는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이 누리고 있는 행복과 자유, 그리고 공동체 사회에 구현된 행복과 자유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이러한 가치를 바탕으로 사회제도·법·정책이 만들어지고 구현될 때 개인과 개인, 개인과 사회가 서로 행복을 증진하는 동반성장 사회로 갈 것이다.

이데올로기의 시대는 이미 지났다. 얼마 전만 해도 중국이 미국을 향해 자유무역 하자고 주장하는 것을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렇게 자유무역을 외치던 미국이 세계를 향해 국제수지 적자를 더는 용납할 수 없다며 관세폭탄을 투하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맹목적 자유주의는 갔다. 이제 남은 것은 국익을 위한 실용주의뿐이다. 대·중소기업 간, 빈부 간, 도농 간, 지역 간, 세대 간, 남북한 간, 그리고 국가 간 동반성장만이 살길이다.

정운찬 | 동반성장연구소 이사장·한국야구위원회 총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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