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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3 (목)

[슈퍼리치 NOW] (27) 수십억원대 거래되는 바이올린…스트라디바리가 70억원? “가격 매력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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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어느 날 오후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 귓병으로 겪어온 이명의 고통을 풍선에 매달린 대형 침봉 설치 작품과 귀 모양 조형물로 표현한 윤영석 조각가의 ‘소피엔스’ 전시가 한창이다. 전시공간이 갑자기 부산해진다 싶더니 한편에 그랜드 피아노가 놓였다. 시간이 좀 지나자 사람들이 한두 명씩 모이기 시작했다. 미리 초청장을 받은 이만 입장이 가능했다. 서울옥션 VIP 고객들이다.

50여명 정도 되는 이들이 한자리에 모이자 경매사가 등장했다. 특별히 초청받은 고객에게는 프리뷰 전시(본격 경매 전에 열리는 사전 전시)에 나온 특별 경매 작품을 시연하겠단다. 그냥 보여주는 것도 아니고 시연이라니.

말쑥한 연주복 차림의 연주자가 악기를 들고 등장한다. 언론에 알려진 경매 시작가만 70억원짜리 바이올린이다. 이탈리아 악기 제작자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Antonio Stradivari, 1644~1737년)가 1692년에 제작한 일명 ‘팰머스(Falmouth)’다. 소장했던 가문의 이름을 땄단다. 정리하자면 초고가 바이올린을, 경매에 참여할 만한 슈퍼리치에게 사전에 보여주는 정도를 넘어 아예 실제 연주까지 들려주겠다는 말이다. 스트라디바리는 정경화, 조슈아 벨, 막심 벤게로프, 길 샤함, 사라 장, 힐러리 한, 김지연, 유니스 리 등 국내외 정상급 연주자가 연주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프랑스 글라주노프 국제 콩쿠르 1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국제 콩쿠르 2위 등 화려한 입상 경력 끝에 국내로 진출해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우즈베키스탄 출신 닐루(Nilufar Mukhiddinova) 바이올리니스트는 “스트라디바리는 바이올린 제작 역사에 있어 황금시대에 만들어졌고 연주자 사이에서도 진정 가치 있고 귀중한 악기로 대접받는다. 거의 모든 연주자가 스트라디바리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싶다는 로망을 갖고 있다. 다만 스트라디바리가 아주 예민한 소리를 내기 때문에 이를 다룰 수 있는 연주자는 제한적이다”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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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옥션 경매에 나올 뻔한 바이올린 ‘팰머스’는 1692년 제작된 것으로 경매 시작가는 70억원으로 책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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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귀한 악기 연주를 직접 현장에서 귀로 들을 수 있다니. 슈퍼리치의 대접 클래스는 다르다 싶다. 사실 이런 식의 시연 행사는 다른 세계적인 경매 회사에서는 평소 관리하는 VIP를 대상으로 비공식이지만 자주 열린다.

연주는 베토벤 로망스 F장조, 바흐 더블 콘체르토, 크라이슬러의 ‘중국의 북(Tambourin Chinois)’ 등 바이올린 본연의 다양한 음역을 소화할 수 있는 곡들로 채워졌다. 작은 음악회였지만 곡이 끝날 때마다 호응이 뜨거웠고 앙코르 곡까지 이어졌다.

시연회에 참석한 한 인사는 “정식 공연장이 아니지만 윤영석 조각가의 귀와 관련한 작품과 연주가 너무 잘 어울렸다. 바이올린 합주 때는 스트라디바리 바이올린의 음색이 확연히 좋다는 느낌이라 비교 기회로서도 만족한다”고 말했다. 음악에도 조예가 깊은 데다 예비 투자자로서 작품의 경제성(?)까지 연주회 내내 생각하고 있었다는 말이었다.

슈퍼리치와 애호가들 관심을 한 몸에 받은 팰머스 덕에 초고가 악기의 세계도 국내에 적잖이 알려지게 됐다. 사실 국내 경매 시장에서 고(古)악기가 거래되거나 회자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소장자도 외국인이라는 것만 알려졌을 뿐, 다른 정보는 철저히 함구됐다.

대신 불문율은 있다. 그간의 소장 이력과 문헌 등 바이올린의 지난 궤적만큼은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 그래야 진품 논란에서 자유로울 수 있고 추후 거래도 용이하기 때문이다.

이번 팰머스를 예로 들면 스트라디바리가 그를 상징하는 ‘롱 패턴(Long Pattern·보통의 바이올린보다 좀 더 긴 사이즈를 일컬음)’으로 제작된 악기라는 외형 소개부터 이름이 팰머스로 정해진 이유가 런던의 바이올린 회사 W.E. Hill&Sons(힐앤드선즈)의 문헌에 소개돼 있다는 것까지 꼼꼼하게 제공됐다.

더불어 이전 소장자도 공개한다. 소장자 명성이 높을수록 상품 가치가 올라가기 때문이다. 팰머스는 저명한 컬렉터였던 드와이트 파텔로(Dwight J. Partello)의 손을 거쳤으며, 1987년 ‘스트라드(Strad)’라는 매거진에도 이 사실이 수록됐다. 팰머스는 또한 그리스 연주자 레오니다스 카바코스(Leonidas Kavakos)가 1996년 자크 프랑세즈(Jacques Francais)에서 구매해 사용했는데 2004년 ‘스트링스(Strings)’란 매거진에서 “팰머스의 짙은 음색은 제 연주의 다른 방식들을 잘 받아들이기에 적합하다. 스트라디바리에는 마법 같은 힘이 있다”고 인터뷰하기도 했다. 세계적인 연주자가 인정했다는 점에서 가치가 상당하다는 것을 슈퍼리치에게 어필하기 위한 스토리텔링이다.

또 하나. 초고가 고악기 소유자들 간에는 ‘그들만의 리그’가 있다. 슈퍼리치 악기 소유자 대부분은 ‘스트라디바리 소사이어티(The Stradivari Society)’에 소속되려 한다. 미국 명품 악기상 ‘바인앤드푸시(Bein&Fushi)’를 운영하던 제프리 푸시(1943~2012년)와 로버트 바인(1950~2007년), 그리고 메리 갤빈 여사가 1985년 설립한 조직. 초고가 악기 소유주와 재능 있는 연주자를 연결해주는 곳이다. 삼성문화재단은 스트라디바리 바이올린 2대, 비올라 1대, 첼로 1대를 보유하고 있는데 역시 소사이어티로부터 주선받았다.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클라라 주미 강이 여기서 대여받은 1708년 스트라디바리 바이올린으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서울옥션 관계자는 “악기만큼은 오히려 이름 있는 연주자와 매칭해서 계속 생명력을 유지하는 것이 더욱 가치를 높이는 길이다. 초고가 악기라도 최고 연주자에게 대여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라고 말했다.

악기를 갖게 되면 단순 보유를 넘어 글로벌 슈퍼리치와 네트워킹을 할 수 있다는 측면 또한 국내 슈퍼리치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대목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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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악기 제작자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Antonio Stradivari, 1644~1737년)로 추정되는 인물의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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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가 바이올린은 매매가가 178억원

여러 화제를 모았지만 결과적으로 이번 서울옥션 경매는 무산됐다.

미국인 소장자가 돌연 마음을 바꿨다는 것만 알려졌다. 물론 취소 수수료 등으로 적잖은 돈을 물어야 하겠지만 한편에서는 다른 곳에서 좀 더 높은 가격을 제시받았을 수 있다는 추측이 나돈다. 참고로 스트라디바리 바이올린 중 최고가로 팔린 바이올린은 매매가가 1582만달러(약 178억원, 수수료 포함)였다. 이번이 국내 첫 초고가 악기 경매라 많은 언론이 이미 다루다 보니 출품자가 외부 관심에 부담을 느꼈다는 후문도 무성하다.

이번 경매에 참여하려 했던 한 인사는 “가격(시작가)도 합리적이고 레퍼런스가 좋은 악기였는데 갑작스레 취소됐다 해서 아쉬웠지만 그만큼 가치가 높은 물건은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다는 점에서 크게 개의치 않는다. 앞으로 한국에서도 이런 경매가 많아지기를 바랄 뿐”이라고 말했다.

서울옥션 관계자는 “이번 기회에 국내 슈퍼리치의 수요를 확인했다는 점에 의미를 둘 수 있다. 수십억원대가 아니라 100억원대 이상이라도 일단 문화적 감성 충족은 물론 슈퍼리치 네트워크를 만들어볼 수 있다는 점에 상당히 관심이 많았다. 스트라디바리 외에도 과르네리, 아마티와 같은 고악기도 충분히 다뤄볼 수 있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박수호 기자 suhoz@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1988·송년호 (2018.12.19~12.25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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