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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2 (일)

[산책자]‘책’이라는 물건의 본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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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고 있는 책에 ‘본질주의’라는 단어가 여러 번 나와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우리에게 변치 않는 정체성 같은 건 없다는 말을 하려고 저자가 ‘본질’이라는 표현을 자꾸 쓰고 있는 것이다. 부실한 기억이나 반복된 상상이 만들어낸 산물을 엄격히 가려낸다면 우리가 사물, 인간, 집단에서 흔히 찾는 정체성이나 본질은 의외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경향신문

한때 하이파이 오디오에 빠져 지낸 적이 있다. 오디오 애호가로 공력이 붙으면 웬만한 납땜질과 수리 정도는 직접 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전자기기치고는 상대적으로 단순한 구조인지라 좋은 소리를 내려고 밤낮 기기를 주무르다보니 물리가 트였다고 할까? 앰프에 꽂힌 진공관은 물론이고 각종 소자에다 내부선재까지 바꾸는 일도 허다하다. 그러다보면 우스운 생각도 든다. 원래의 것이라곤 거의 케이스밖에 남질 않았는데 이 오디오가 그 오디오인가?

‘테세우스의 배’라는 일화도 있다. 반은 인간, 반은 황소인 미노타우로스를 무찌르고 아이들을 구한 영웅 테세우스를 기리기 위해 아테네에서는 해마다 그의 배를 몰고 나가 퍼레이드를 하는 풍습이 생겼다고 한다. 문제는 그때마다 낡은 배가 파손되어 곳곳을 수리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건데, 누군가 그랬단다. “배의 모든 부분이 교체되었는데, 이 배는 여전히 테세우스의 배인가?”

요즘 누군가의 주장이나 이론에 ‘본질주의’라는 말을 하면 비판이나 모욕으로 듣기 십상이다. 모든 사물과 사건의 배후에는 그것을 그것‘답게’ 하는 이데아 또는 본질이 숨어 있다는 생각은 플라톤 시대의 낡은 생각이 된 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언어와 사물이 일대일 대응을 한다거나, 인간을 정신적 존재로, 그리하여 현대 뇌과학에 와서는 ‘뇌’로 보는 것도 비슷하다. 세상은 끊임없이 변하고 인간도 복잡하기 그지없는 존재인데, 고정된 개념·본질·기표를 가지고 실재를 규정하려는 오랜 담론은 이제 허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지금 본질주의라고 해서 쓸모없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게 마련이고, 우리는 그런 이유를 밝혀냄으로써 같은 실수를 방지하거나 일의 효용성을 높이는 오랜 습성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누리는 과학과 문화의 많은 성과도 이런 과정을 통해 이룩되었을 것이다. 그러니 본질이 설령 임의적이고 만들어졌다 해도 아무런 효용조차 없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오히려 ‘탈진리(post-truth)’라는 말을 방패로 삼아 세상에는 마땅히 그러한 것도, 믿을 수 있는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만연하는 게 더 문제 아닌가 싶다. 탈진리는 무슨 탈진리, 사상가의 책갈피 속을 탈출하여 저잣거리에 나온 탈진리는 결국 세상사 아무것에도 관여하지 않으려는 냉소주의나, 세상이 다 그러하니 나도 내 이기적 욕망이나 추구하며 살겠다는 태도를 합리화하는 데 쓰인다.

하지만 인간이 오랜 세월 경험을 반복하며 쌓은 어떤 지혜, 삶의 실용적 가치들은 여전히 쓸 만하다. 아니 오히려 인간이야말로 어떤 고정된 본질 없이 그런 경험들을 통해 만들어진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망치가 인간의 손을 만들었고, 신발이 우리 새끼발가락을 여전히 붙어 있게 했다. 나는 지금 이 글을 쓰며 ‘책’이라는 오래된 물건을 머리에 떠올리고 있는 중이다. 손으로 쓰다듬고 책장에 침을 묻히며 앉아서도 읽고 누워서도 읽는 그 물건 말이다.

최근 문을 연 어느 서점에서는 독자가 책을 살펴보다가 옆의 카페나 푸드코트에 가져가 맘대로 책을 읽을 수 있게 했단다. 서점으로서는 ‘독서의 경험’을 팔고 있다고 강변하겠지만, 출판인이 보기에는 책을 팔아야 할 서점이 커피와 음식의 사이드디시로 책을 이용하고 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책 본문의 단순질박한 디자인과 꼼꼼한 교정의 미덕도 점점 사라지고 있는 중이다. 뻔해 보이는 본문 한 쪽의 디자인에도 행간과 자간의 넓이, 행의 길이와 여백, 페이지 번호, 문단 모양 등 얼마나 많은 노심초사가 숨어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아무런 이유도 없는 컬러와 잦은 소제목이 호흡을 방해하고, 몇 글자 들어가지도 않는 판면을 구성하는 식의 과잉 디자인이 편집을 압도한 지 오래다. 책의 본질이 텍스트보다 화려한 디자인과 만듦새로 점점 옮겨가는 셈이다. 그러니 그 책들이 팬시문구의 들러리나 식탁 위의 소품이 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변해가는 세상에서 책이라는 낡은 도구 하나쯤 어떻게 된들 무슨 상관이랴. 그러나 책이 이렇게 되어가는 것이 결국은 소비주의, 곧 인간의 깊은 경험이 얕은 경험에 굴복한 결과가 아닌가 싶어 심히 씁쓸하다. 탈진리의 시대다. 인간의 본질적 경험도 점점 사라지고 있는 중이다.

안희곤 | 사월의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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