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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2 (수)

‘조선의 르네상스’ 이끈 정조 이면에 숨겨진 고뇌와 모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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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보

박현모 지음/민음사/2만3000원


정조 평전/박현모 지음/민음사/2만3000원


정조 시대는 변화와 희망이 꿈틀대는 때였다. 서울로 인구가 집중되면서 주변 지역에 채소와 과일 등 상업적 농업이 발달하고, 금난전권(독과점) 혁파로 신흥 상업세력이 부상했다. 신분 제약이 철폐된 서얼과 아전 등을 포함한 15만여 명이 과거를 보겠다고 하루 동안 도성 안을 가득 메운 ‘과거 열풍’의 시대였다. 자신만의 전문 분야에 몰두하는 마니아 그룹도 나왔다. 소설을 목판으로 찍어 돌려야 할 만큼 출판문화도 번성한 시대였다. 문예부흥의 배경에는 국왕 정조의 개혁이 있었다. 정약용과 박제가, 김홍도 등 당파와 신분을 초월하여 인재를 등용하고, 규장각으로 국가 경영에 필요한 지식을 공급했다.

저자는 정조가 일평생 애민정신으로 나라를 다스린 성군이라는 점에 주목한다. 그 길을 가기 위해서는 정도가 아닌 권도를 사용하는 것도 꺼리지 않은 인간적인 매력을 지닌 임금이었다. 남몰래 이복동생을 만나기 위해 군사훈련을 빙자해 궁 밖으로 나갈 정도였다. 정조는 특히 다혈질이었다. 신하를 길들일 때 욕설이나 협박을 한 적도 있다. 이런 행태는 얼핏 성군의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정조는 극단으로 치닫지 않기 위해 자제했다. 통치방식은 개인 통치 방식이었지만, 하루도 거르지 않고 반성하며 쓴 일기만 수백권에 달한다.

정조 시대는 ‘조선의 르네상스’라 불릴 만큼 흥성했지만 이면에서는 끊임없는 대립과 모순이 소용돌이쳤다. 정조는 지배자가 최소화된 국가를 만들고자 했다. 그에게 좋은 정치란 중간의 장애물이 없이 왕과 백성이 직접 소통되는 정치였다. 지배자는 국왕 한 사람이면 족했다. 종래 사림정치 구도, 즉 군-신-민의 3단계 구도에서 신하의 역할을 부정 내지 최소화하고, 군-민의 2단계 구도를 추구했다.

또한 고질적인 당쟁의 폐해를 줄이기 위해 언관의 권한을 대폭 축소시켰다. 이러한 일련의 조치들은 후유증을 불러왔다. 저자는 조선 왕조를 오랫동안 지탱해 온 메커니즘에 중대한 변화를 초래해 공론정치를 변질시켰다고 지적한다. 정조 사후 세도정치라는 정치적 암흑기가 도래한 것은 이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200년 전 위대한 임금 정조가 남긴 교훈을 21세기 리더들은 어떻게 해석할까.

정승욱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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