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5.21 (화)

[터치! 코리아] '퀸', 대한민국을 훔치다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 돌풍… 한치 앞 안 보이는 위기에도

온갖 정치 쇼만 하는 나라에서 '퀸의 聖歌'로 위로받는 사람들

조선일보

김윤덕 문화부장


"나훈아 닮은 저 콧수염 남자는 왜 TV만 틀면 나오느냐"고 물은 이는 시어머니였다. 초등학생 딸이 알은체했다. "아~ 남자랑 뽀뽀하던 아저씨?" 12세 관람가에 동성애 코드가 있는 줄 모르고 딸과 함께 좌불안석으로 봤던 지난달 초만 해도, 이 영화가 돌풍을 넘어 한국 극장가를 제패하리라고는 짐작도 못 했다. 딸은 운동회 때 들은 노래가 나오자 잠시 신났을 뿐이고, '미제(美製) 노래'인 팝송 대신 민중가요를 불러야 했던 '386끝물' 엄마는 불량한 행색의 로커에게서 파바로티 못지않은 천상의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새삼 감탄했을 뿐이다. 록밴드 '퀸'을 다룬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 얘기다.

방탄소년단의 뜨거웠던 인기를 단숨에 제압했으니, 가히 기(奇)현상이다. TV에선 뉴스, 예능 할 것 없이 퀸 노래를 배경음악으로 깔고, 갈릴레오·스카라무슈 등 퀸의 노랫말을 인문학적으로 해석한 동영상도 등장했다. 보세 가게엔 리드 보컬 프레디 머큐리가 즐겨 입었던 가죽점퍼를 구하러 10대가 줄을 서고, 서점가엔 프레디 자서전이 재출간돼 팔려나간다.

별 셋 미만 낮은 평점을 준 식자(識者)들을 비웃으며 영화가 흥행한 건, 록 문외한의 귀에도 감겨드는 선율, 대중을 '갖고 노는' 퀸의 천재적 쇼맨십 덕분일 것이다. 도입부터 '러브 오브 마이 라이프' 등 무수한 히트곡이 흐르다 마지막 20분 '세기의 퍼포먼스'라 불리는 '1985 라이브 에이드' 공연이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지니 작품성을 따질 명분이 사라졌다.

오페라와 팝을 절묘하게 결합한 '보헤미안 랩소디'의 탄생 과정도 통쾌했다. 테이프가 늘어질 때까지 3주간 180번 오버더빙해 완성한 역작을 음반사 사장이 혹평하자, "음악에 공식은 없어. 똑같은 걸 반복하면 퀸이 아니지"라며 계약서를 찢는 오만과 패기는 기성세대 갑질에 치를 떠는 청춘의 심장을 저격했다. 이 노래는 전 세계인이 가장 많이 들은 20세기 음악으로 등극했다.

아이러니는, 영국 식민지 탄자니아에서 태어나 45년 짧은 생을 노래와 마약, 동성애에 탐닉하다가 에이즈로 죽은 한 남자, 프레디가 건넨 '뜻밖의 위로'다. 동성애라는 형벌, 자신을 죽이지 않고는 탈출할 수 없었던 '감옥'에서 "죽어도 좋아!"라는 절규로 써내려간 노래여서일까. 싱어롱 이벤트가 열리는 상영관에 가면 매우 기이한 장면과 마주한다. 두 손 높이 들고 퀸을 따라 부르는 군중의 풍경이 흡사 여느 대형교회의 부흥성회 같다. 이들의 합창이 '패자는 없어. 우린 모두 챔피언이니까'란 대목에 다다르면 '성회'는 절정에 오르고 사람들은 일제히 울기 시작한다. 그들 중엔 수능을 망친 고3, 취직을 못 해 몇 년째 알바를 전전하는 청년, 명퇴를 통보받은 가장들이 섞여 있다. 한 치 앞 안 보이는 경제, 치솟는 실업률, 평화를 앞세운 가짜 쇼가 넘쳐나는 시대에, 이들은 "퀸 음악만 들으라고 불 꺼줘도 극장에 남아 있겠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퀸은 그 답을 알려준다" "패배 앞에 무릎 꿇어선 안 돼, 눈을 떠 하늘을 바라보라고 말해주는 프레디가 있어 행복하다"고 찬양한다. 생전의 프레디가 사랑했던 일본이 아닌, 옆 나라 한국에서 퀸 열풍이 번진 이유다.

1985년 7월, 전 세계 시청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록 역사상 최고의 퍼포먼스가 열린 영국 웸블리 경기장. 퀸이 15만 관중과 함께 '위 아 더 챔피언'을 열창할 때, 무대 뒤에 있던 엘턴 존이 외쳤다. "그들이 쇼를 훔쳤다!" 그로부터 33년 후 이 전설의 록밴드는 어떤 정치 지도자, 어떤 종교인, 어떤 석학에게도 위로받지 못한 채 울고 있는 대한민국을 송두리째 훔쳤다.

[김윤덕 문화부장]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