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3.19 (화)

[이사람-고산] 우주 도전 이어 제조 생태계 혁신 꿈..."앞으로 나가려면 딛고 일어서야죠"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3만8,000대1 경쟁률 뚫고 우주인 선발

스파이 혐의로 우주行 한달 앞두고 탈락

'난 한국인이다'는 생각 많이 하게 해줘

美유학서 IT·제조업 결합 창업에 눈떠

스타트업 지원·교육하는 팹랩서울 열고

제품생산 수요·공급자 연결 플랫폼 운영

가치있고 돈도 버는 솔루션 계속 고민할 것

서울경제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지난 2008년 3월 러시아 모스크바 인근의 유리가가린우주인훈련센터. “나는 유리 가가린의 나라에 우주인이 되려고 왔지 우주 관광객이 되려고 온 게 아닙니다.” 예비 우주인석에 앉아 있던 한국 젊은이가 우주선 발사를 한 달가량 앞두고 가진 우주인 전체 기자회견에서 ‘도대체 무슨 일을 한 거냐’고 묻는 현지 기자에게 러시아어로 또박또박 답한 말이다.

3만8,000대1의 경쟁을 뚫고 우주인 0순위로 선발됐다가 러시아에서 스파이 혐의를 받고 예비후보(이소연씨)에게 양보해야 했던 에이팀벤처스의 대표 고산(43)씨의 이야기다. 3D프린터를 제조하며 제조업의 수요·공급자를 연결하는 온라인 제조 플랫폼인 크리에이터블을 운영하는 그는 요즘 제조생태계를 바꿔놓겠다는 야무진 꿈을 꾸고 있다. 탐험가와 개척자의 기질이 농후한 그의 창업 스토리를 탐구하려면 아무래도 우주인 얘기부터 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시 그는 러시아 우주선에 탑승해 국제우주정거장으로 가는 우주인이 되기 위해 비상상황 대처법 등 고된 훈련을 악착같이 소화했다. 하나라도 더 확실하게 공부하기 위해 부정확한 영어통역에 의존하지 않고 러시아어도 열심히 익혔다. 우주로 떠나기 전 기자회견에서의 멋진 러시아어 연설도 꿈꿨다.

하지만 비밀이 많은 우주기지에서 호기심 많고 적극적인 성격이 뜻하지 않게 러시아 측의 의심을 사며 막판 우주인에서 탈락하는 불운을 겪는다. “그들은 그들의 일을 한 것이고 저는 제 일을 한 거죠. 러시아는 정서도 비슷하고 제2의 고향 같아요. 지금도 그때 교관이나 통역병과 연락하고 지내요.”

‘당시 좌절감이 컸겠다’는 질문에는 “좌절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어떻게든 딛고 일어서야 다음 단계로 가는 것 아니냐”고 명쾌하게 답했다. “대학 다닐 때 전국아마추어복싱대회 동메달도 따고 서울대 산악반에서 해발 7,500m의 파미르고원을 등반하는 등 운동을 많이 했거든요. 운동을 한 게 긍정적 마인드(정신자세)를 심는 데 도움이 됐어요. 만약 그때 우주에 갔다 왔으면 지금보다 못했을 수도, 훨씬 힘들었을 수도 있잖아요.”

그는 당시를 회상하며 “‘내 뿌리는 한국이고 나는 한국 사람이다’라는 생각을 많이 하게 해줬다”고 감사를 표했다. 뜻하지 않게 우주인의 꿈을 접어야 했지만 긍정적인 자세로 새로운 꿈을 개척해나가려는 의지가 엿보였다. 그는 서울대 수학과를 졸업한 뒤 컴퓨터비전을 공부(인지과학협동과정 석사)하고 삼성종합기술원에서 인공지능연구원으로 근무했다. 이후 우주인 도전이 좌초돼 귀국한 뒤에는 한국항공우주연구원 정책기획부에서 선임연구원으로 근무했다. 전쟁의 잿더미에서 굉장히 빨리 성장한 데는 과학기술의 힘이 있었다는 점에서 과학기술 정책에 관심이 많았다. 하지만 우리 정부의 우주개발 프로젝트에 대한 큰 그림이 부재하다고 보고 아쉬움을 삼켜야 했다. “미국이 이미 50년 전 달에 갈 때 화성을 목적지로 하고 달은 경유하는 곳으로 밑그림을 그렸잖아요. 하지만 (항우연 근무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우주에 대해 그런 미래 계획이 보이지 않았어요.”

서울경제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이에 그는 2010년 미국 유학이라는 탈출구를 모색한다. “미국 대학원 10곳에 지원서를 냈죠. 그중 8군데는 떨어졌는데 하버드대 케네디스쿨 석사과정에서 수업료를 면제해주겠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9월에 케네디스쿨에 입학하기 전 미국 실리콘밸리의 싱귤래리티대에서 10주 과정의 연수를 했는데 그것이 미래를 그릴 수 있는 계기가 됐죠.” 이때 첨단 과학기술의 급격한 발전상을 접하며 과학기술 창업을 통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다.

싱귤래리티대는 우주 사업가인 피터 디어맨디스가 오는 2045년이면 인공지능이 인간의 지능을 뛰어넘는다는 레이 커즈와일의 철학을 담아 세운 비영리대학이다. 실리콘밸리에 있는 미국항공우주국(NASA·나사) 에임스리서치센터 바로 옆에 있다. 과학기술의 진보에 대해 낙관적 시각을 갖고 우주인을 꿈꾸며 미래를 개척하려던 고 대표와 잘 맞았다.

“80명이 실리콘밸리의 첨단회사를 탐방했는데 기간은 짧았지만 과학기술로 당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비즈니스모델을 구상하게 됐지요. 대학에서 과학기술을 기하급수적으로 발전시켜 10년 내 10억명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는 제품이나 서비스를 개발하라고 했거든요.” 그는 당시 에이팀벤처스의 사업모델 중 하나인 3D프린터를 눈여겨본다. 마침 3D프린터의 특허가 풀려 원천기술은 공개돼 있었다. 당시 일론 머스크가 테슬라(전기차)와 솔라시티(태양광발전) 사업에 드라이브를 걸고 스페이스X(우주발사체) 프로젝트를 내놓으며 우주에 도전하는 것을 보고 영감을 얻었다. 아이폰 등을 내놓은 스티브 잡스도 많은 영감을 줬다. 내심 우주선에 들어갈 부품을 3D프린터로 만들어보겠다는 꿈을 꾸게 됐다고 한다. 이 꿈을 아직 이루지 못했지만 그의 버킷리스트에는 담겨 있다. 다만 이 꿈은 장기 계획인 만큼 당장은 3D프린터로 창업지원을 해보자고 결심했다. 동시에 싱귤래리티대 과정을 같이 다닌 유영석씨(암호화폐거래소인 코빗 공동창업자) 등과 창업지원 비영리법인 설립까지 모색하게 된다.

이러한 꿈을 안고 그는 케네디스쿨에서 공공정책 석사과정을 하다가 학업을 1년 만에 접게 된다. 빨리 현업에 뛰어들어야겠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타이드 인스티튜트(TIDE Institude)’라는 기술창업 지원단체를 조직하게 된다. 나아가 매사추세츠공대(MIT)가 시작한 ‘메이커 스페이스(제조공간)’인 ‘팹랩(FABLAB)’을 서울에 열게 된다. 바로 종로 세운전자상가 한편에서 스타트업을 지원하는 팹랩서울이다. 이때가 2011년이었다. 창업 초기에는 다른 기업들의 도움도 받았다고 한다. 점차 공공기관 과제를 수행하며 디지털 제작소를 완성했다고 그는 설명했다. 정보기술(IT) 장비와 3D프린터는 물론 레이저커터·CNC 제조장비까지 준비하고 MIT 화상수업 등 교육여건도 갖췄다.

서울경제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뭐니뭐니해도 제조업 기반이 살아나야 경제가 돌아가잖아요. 싱귤래리티대에서 배우며 당시 미국이 IT에 제조업을 결합하는 것을 인상 깊게 봤어요. 팹랩서울에서는 10대 학생부터 스타트업·중장년까지 창업교육도 받고 저렴하게 장비를 활용해 시제품도 만들 수 있어요.” 이렇게 팹랩서울이 활성화되면서 세운전자상가는 ‘핫’한 카페가 들어서는 등 도심 재생모델로 꼽히게 됐다. 저녁이면 으스스하기까지 했던 곳이 지금은 활기가 돈다. 이제 고 대표는 이사회 의장으로 뒤에서 후원하고 있다.

타이드 인스티튜트는 제주와 수원 등으로 메이커 스페이스를 확대한 데 이어 개발도상국으로도 진출하고 있다. 2년 전 미얀마 양곤의 현지 UIT대에 메이커 스페이스를 열며 교과목을 개설했고 올해에는 키르기스스탄에도 개소했다. 몽골·인도네시아와는 협의 중이며 앞으로 남북관계가 풀리면 북한에도 메이커 스페이스를 열겠다는 게 그의 포부다. 참으로 멋진 꿈이다.

요즘은 한발 더 나아가 국내 제조업 공동화 심화를 타파하기 위해 온라인 제조업 플랫폼을 활성화하는 데 역점을 두고 있다. 2014년 창업한 에이팀벤처스에서 3D프린터를 제조하고 판매하는 단계를 넘어 제품 생산을 원하는 수요자와 제조 공급업체를 온라인 플랫폼에서 직접 연결한다. 지난해부터 본격화한 온라인 제조 플랫폼인 크리에이터블은 하드웨어 스타트업과 제조사를 중간에서 효율적으로 연결해주는데, 이제는 제법 입소문이 났다. 온라인을 통해 수요자로부터 주문을 받으면 에이팀벤처스의 제조 전문가들이 적합한 소재와 제조방법을 컨설팅하며 제조 시 챙겨야 할 내용을 꼼꼼히 짚어준다. 시제품의 경우 이르면 2~3일, 최대 1주일 이내에 결과물 검수까지 마친 뒤 배송해준다.

“이런 게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제조업 혁명 모델이 아닐까 싶어요. 저는 창업으로 돈도 벌고 가치 있는 세상, 지속 가능한 세상을 만드는 솔루션을 계속 고민할래요.” 매번 자신의 껍질을 깨며 새로운 탐험을 거듭하는 고 대표가 일으킬 나비효과가 기대되는 대목이다. /고광본 선임기자 kbgo@sedaily.com

He is

△1976년 부산 △1995년 한영외고 중국어과 △2003년 서울대 수학과 △2005년 서울대 인지과학 협동과정 석사 △2007년~2011년 한국항공우주연구원 선임연구원 △2011년~2014년 타이드 인스티튜트 대표(현재 이사회 의장) △2014년~ 에이팀벤처스 대표 △2017~2018년 대통령 직속 4차산업혁명위원회 산업경제혁신위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