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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일)

[포토다큐] 그리움·차별에 지친 삶 보듬는 ‘지구인의 정류장’···시린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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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지난 9일 ‘지구인의 정류장’이 운영하는 경기 안산시 원곡동의 이주노동자 쉼터에서 캄보디아 청년들이 소등시간인 밤 11시에 불을 끈 채 어둠 속에서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다. 이들은 페이스북, 유튜브 등에 접속해 고향의 가족, 친구들의 소식을 접한다.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는 한국에서의 삶을 어떻게 표현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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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노동자를 위한 노동인권상담소와 쉼터 등을 운영하는 ‘지구인의 정류장’은 이주노동자들이 많이 거주하는 경기 안산시 원곡동에 있다. 지난 9일 찾아간 쉼터는 상담소 근처 상가건물 4층이었다. 옥상으로 향하는 계단에는 방에 들이지 못한 큰 여행 가방들이 쌓여 있었다. 3개의 방과 부엌, 거실에서는 10여명의 캄보디아 청년들이 휴대폰에 고개를 묻고 있었다. 쉼터에 머무는 이유는 다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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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상으로 통하는 문 앞에 방으로 들이지 못한 짐가방이 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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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11시에 소등한 뒤 휴대폰을 들여다보는 이주노동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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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니(27)는 건설현장에서 4년 넘게 일했다. 건설사와 계약기간이 끝났지만 임금을 못 받아 애태우다, 지역 노동청에 진정서를 넣고서야 받게 됐다. 체류기간이 몇 개월 남았지만 겨울에는 현장 일을 구하기도 어렵다. “가족이 너무 그립다”는 그는 집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고 있다. 버섯농장에서 일했던 너홋(32)은 분쇄기에 소매가 빨려 들어가 왼손을 크게 다쳤다.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한 채 1년을 더 일하다 지난달 그만뒀다. 체불임금과 산재 진정서를 접수한 상태. ‘고향의 아내와 부모님이 다친 걸 아느냐’고 하니, 얼굴에 짙은 그늘을 보이며 “네”하고 답했다. 섬낭(23)과 모라(23)는 잔업이 많더라도 임금을 좀 더 받을 수 있는 사업장을 알아보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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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청년들이 닭과 생선을 재료로 만든 고향 음식을 차려놓고 거실 바닥에 둘러앉아 식사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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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 시간을 보내던 이들은 밤 8시가 되자 식사를 준비했다. 닭과 생선으로 만든 캄보디아 음식 두 가지가 차려졌다. 이들은 거실 바닥에 둘러앉아 늦은 저녁을 먹었다. 체류기간이 4년10개월이 다 됐지만 고용주의 재고용 약속에 신이 난 노라미(28)가 밥을 먹다 기자를 쳐다봤다. “형님~, 식사 좀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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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노동자를 위한 쉼터에 머물고 있는 캄보디아 노동자들이 휴대폰에 저장된 가족사진을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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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터에 머물고 있는 여덟 명의 노동자들이 “기념사진을 찍자”는 기자의 말에 포즈를 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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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이에 캄보디아 여성노동자들을 위한 쉼터도 있다. 낡은 연립주택에 8명의 노동자들이 머무르고 있었다. 이들은 주로 상추, 깻잎 같은 야채나 버섯을 재배하는 농장에서 일한다. 폰포테이(31)는 빈번한 임금체불을 이유로 사업장을 옮기려 한다. 고용주의 사인이 필요하지만, 농장주는 사인을 해주지 않는다고 했다. 근로계약서에 적힌 대로 일하지 못하고, 노동시간에 비해 월급이 턱없이 모자란다는 게 공통의 경험이었다. “계약서 다 몰라요. 사장님 혼자해요. (임금에서) 기숙사, 전기, 가스 짤라. 다 짤라. 농장 다 비슷해요.” 스테이나(37)가 서툰 한국말로 열심히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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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레리아가 쉼터를 떠나기 전 화장을 하고 있다. 그는 의정부의 한 농장에 새 일자리를 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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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의 한 농장에 새 일자리를 찾은 여성이주노동자들이 쉼터를 떠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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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린(30)·시앵리(22)·스레리아(26)는 의정부의 한 농장에 새 일자리를 얻었다. 다음날 아침, 짐을 챙겨들고 쉼터를 떠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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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인의 정류장’은 다큐멘터리 감독이었던 김이찬 대표가 2009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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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지구인의 정류장’을 연 김이찬 대표(53)는 다큐멘터리를 찍어온 영화감독이다. 처음엔 이주노동자에 대한 미디어 교육을 통해 자신의 삶을 표현하고 나누는 사랑방을 계획했다. 이주노동자들의 절박한 문제 앞에서 꿈을 미뤄야 했다. 임금체불, 폭행, 성희롱, 산재 등에 대한 상담과 문제해결에 대부분의 시간과 역량을 쏟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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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노동자가 기록한 출퇴근 시간. 13일의 경우, 오전 6시에 출근해 오후7시에 퇴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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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찬 대표가 한 이주노동자의 실제 노동시간을 근거로 작성한 미지급 임금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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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례를 설명하던 김 대표가 모니터에 파일을 띄웠다. 한 이주노동자가 기록한 출퇴근 시간을 근거로 작성한 한 달 동안의 실제 노동시간, 이에 최저임금을 적용한 월급과 실제 지급된 급여가 정리돼 있었다. 320시간을 일한 달의 임금이 150만원 조금 넘었다. 최저임금을 적용하면 90만원 가까이 미지급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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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을 다 지급받았다’는 내용의 강요된 합의서에 서명을 한 노동자가 이름 위에 자국어로 적어 놓은 ‘(사실이) 아니다’라는 글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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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문서는 합의서였다. 어려운 용어로 가득한 한글 아래 캄보디아인조차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의 캄보디아어를 병기했다. 한마디로 ‘임금을 다 지급받았다는 것을 확인한다’는 내용이다. 이 강요된 합의서에 서명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는 서명 옆에 작은 글씨로 ‘(사실이) 아니다’라는 뜻의 자국어를 써넣었다. 김 대표는 “농업 노동현장에서 이런 일들이 자주 발생하고 있다”며 “불법을 넘어, 무법 상황”이라며 씁쓸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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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인의 정류장’ 사무실 탁자 위에 한글과 캄보디아어가 병기된 ‘이주민의 노동기본권’ 책자가 놓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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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 말 고향 가는 비행기에 오르는 선한 인상의 청년 무니는 쉼터를 나서는 기자에게 머뭇거리다 말했다. “한국 사람 외국인한테 말이 안 좋아요. ‘야, 인마’ ‘새끼야’ 너무 많아요. 기분 안 좋아요.” 힘든 일과 추위는 견뎠지만 거친 말들은 상처로 남은 듯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나라 안 똑같아요. 사람 다 똑같아요.” 이날(12월10일)은 ‘세계 인권의 날’이었다.

강윤중 기자 yaj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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