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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전문가의 세계 - 전의령의 동물이야기] (11) 동물 싸움, 계급·인종적 불만과 불안 섞인 ‘남성의 대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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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 싸움, 어떤 사회적 불만과 긴장감이 도사리고 있는가?

경향신문

전통사회에서 소싸움(투우)은 어느 곳에서든 볼 수 있는 흔한 놀이였지만 현대사회에서는 동물학대라는 이유로 반대하는 목소리도 크다. 현재 동물보호법은 도박 또는 유흥을 목적으로 하는 동물싸움을 금지하고 있지만 소싸움만은 예외로 인정하고 있다. 경북 청도에서 해마다 열리고 있는 전국민속투우대회 장면. 경향신문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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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싸움 논란

작년 겨울 전북 정읍에 사는 수의사로부터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그는 내가 동물 관련 연구를 한다는 것을 듣고 당시 정읍에서 진행 중이던 활동과 관련해 도움을 얻고자 연락했다고 했다. 그에 따르면 정읍시는 소싸움을 지역 전통으로 내세우고 있으며, 건립 중인 축산테마파크 내에 상설 소싸움 경기장을 만드는 중이었다. 축산업이 경제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정읍시는 지역 축산업계와의 공조하에 이렇게 소를 다각도로 자원화하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하지만 그를 포함한 지역 주민들은 이에 반발해 소싸움을 동물학대로 규정하고 소싸움장 건립에 반대하는 1인 시위를 몇 달간 계속해 오고 있었다.

그날 그의 고민을 들어주는 것 외에 딱히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지 망설였던 나는 그로부터 몇 개월 후인 올해 봄 소싸움장 건립이 전면 백지화될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지역 주민들의 반대에 정읍시가 반응한 것이라 여겨졌지만, 그렇다고 모든 게 끝난 것은 아니었다. 소싸움 경기장 건립은 취소되었지만 소싸움대회 자체가 중단된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소싸움에 반대하는 입장은 인간이 소를 억지로 싸우게 하는 것 자체가 동물학대임을 이야기한다. 또 경기를 위해 몸집과 스태미나를 키우는 과정에서 초식동물인 소에게 낙지, 개소주, 뱀탕 등을 먹이기도 하고, 그렇게 몇 년간 혹독한 훈련을 거친 싸움소는 평균 5년간 경기에 임한 후 도축된다.

현재 한국의 동물보호법은 도박 또는 유흥을 목적으로 하는 동물 싸움을 금지하고 있지만, 소싸움만은 예외로 인정되고 있다. 따라서 현재 정읍을 포함한 전국 열한 곳에서 소싸움은 합법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허핑턴포스트, ‘21세기의 야만, 소싸움대회를 멈춰라’)

닭싸움, 개싸움, 그리고 남성성

인류학에서 동물 싸움은 그리 낯설지 않은 주제이다. 가장 유명한 사례는 클리퍼드 기어츠가 묘사한 인도네시아 발리의 닭싸움일 것이다. 1950년대 인도네시아에서 닭싸움은 위법 행위로 금지되어 있었지만 여전히 발리 사회와 문화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닭싸움은 기어츠가 현지인들과 ‘라포’(현지 조사에 필수적인 인류학자와 현지인들 간의 신뢰관계)를 형성하는 데 있어서도 중요한 현장이 되었다. 현지 조사 초기에 발리인들은 낯선 기어츠 부부를 투명인간처럼 취급했다. 하지만 어느 날, 여느 때와 같이 닭싸움이 벌어지고 갑작스럽게 경찰이 들이닥치자 그들은 현지인들과 함께 달아나 어느 집에 숨었다. 이 우연한 계기로 기어츠 부부와 현지인들 사이에 일종의 ‘공범관계’가 형성되었으며, 이후 현지인들은 그들을 더 친근하게 여겼다. 그렇게 해서 현지 사회에 깊숙이 들어간 기어츠는 발리인들의 친족관계, 사회 생활이 닭싸움이라는 의외의 현장에 깊이 스며들어 있으며, 닭싸움이 발리 사회 그 자체를 상징한다는 결론을 얻었다.

마을의 남성 우두머리를 상징하는 인도네시아 발리의 ‘닭싸움’

미국 남부 노동계급 백인 남성들의 자존심 회복을 위한 ‘투견’

외부로부터 공동체 순수성을 지키려는 ‘노동절 비둘기 쏘기’

‘전근대적 악습’ 이면엔 변화에 대한 저항·보상심리 등 담겨

한국의 소싸움도 전통문화와 동물학대 사이에서 위상 흔들


기어츠는 또 발리에서 싸움닭이 마을의 남성 우두머리를 상징한다고 했는데, 실제로 동물 싸움에서 동물과 동물 주인 사이의 상징적 동일시는 여러 현장에서 발견된다. 그중 한 예가 미국 남부에서 벌어지는 ‘개싸움’이다. 투견은 미국의 50개 주 모두에서 불법으로 금지되어 있지만, 여전히 남부를 중심으로 공공연히 벌어지고 있다. 투견은 두 마리의 개 중 어느 한 마리가 중단하거나 심지어 죽을 때까지 계속되는데, 원래는 주인을 지키기 위한 개들의 용맹성을 시험하는 17세기의 풍습에서 유래되었다. 초기에는 사회의 모든 계급들이 향유하는 오락 또는 유흥으로 존재했지만, 산업화를 거치면서 서서히 남부 노동계급 백인 남성의 하위 문화로 자리 잡게 된다. 투견으로 투입된 개들은 그들의 (남성) 주인과 동일시되며, 경쟁·공격성·강인함·용맹함 등 ‘남성성’(또는 ‘남성다움’)을 보여줄 것으로 기대된다.

사회학자 포사이스와 그의 동료들은 1990년대 남부의 투견장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상세히 기록한다(Evans R., Gauthier D., and Forsyth C. 1998. ‘Dogfighting: Symbolic Expression and Validation of Validation of Masculinity’ Sex Roles, 39(11/12): 825~838). 여기서 ‘겁쟁이’ 또는 ‘똥개’로 명명되는 개들의 운명은 투견 문화의 주요 성격을 드러낸다. 이들은 투견 현장에서 잘 싸우지 못하거나 싸움을 회피하려고 하는 개들로서, 투견의 핵심적 가치인 용맹성뿐만 아니라 주인의 명예도 훼손했다고 여겨지며 곧바로 죽임을 당한다. 이 개들을 살려두거나 다른 이에게 양도하는 행위, 즉 투견에서 실패한 개들에게 마지막 온정을 베푸는 행위는 나약함 그 자체를 상징하며, 이미 떨어진 주인의 위신을 더욱 떨어뜨리는 행위가 된다. 포사이스는 전체 미국 사회에서 종종 ‘루저’ 또는 ‘백인 쓰레기’로 낙인 찍힌 남부의 노동계급 백인 남성들이 자신들의 상처받은 자존심과 남성성을 개들을 죽음에 이르게까지 하는 극단적 위신 경쟁에서 회복하려 한다고 지적한다.

경향신문

중국 허베이성 창저우 주민들이 공원 투계장에서 닭싸움을 지켜보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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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둘기 쏘기’: 러스트벨트의 상실감

포사이스와 그의 동료들이 관찰한 남부의 투견꾼들에게 투견은 남성성의 상징일 뿐만 아니라 소속감과 유대감의 원천이기도 하다. 인류학자 송훈은 탈산업화와 그에 따른 경제적 불황과 사회적 황폐화를 경험한 1990년대 펜실베이니아의 어느 탄광촌에 관해 연구했는데, 이 마을의 공동체적 유대감은 주류 사회로부터 잔인한 풍습이자 동물학대로 규정된 행위를 중심으로 형성되고 있었다(Song, Hoon. 2010. <Pigeon Trouble>. University of Pennsylvania Press). 문제가 되는 이 마을의 풍습은 탄광업의 황금기였던 1920년대에 시작되어 매해 노동절에 열리는 ‘비둘기 쏘기 대회’로, 참가자들은 여러 지역에서 공수해 온 수천마리의 비둘기를 산 채로 쏴죽인다. 동물단체들이 비난하는 학대 행위에는 살아 있는 비둘기의 목 비틀기 같은 행위들도 포함되는데, 어른 남성뿐만 아니라 남자아이들도 자행한다. 대부분이 백인들인 이 지역 주민들은 이를 ‘비둘기 학살’이라 부르며 반발하는 동물단체들의 시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 ‘전통’을 매년 기념하고 계승하는 것에 열을 올린다.

외국인이며 심지어 ‘새 공포증’이 있는 인류학자의 눈에 비친 이 마을은 논리적 설명이 어려운 여러 가지 모순들로 가득 차 있고, 이는 주로 주민들이 비둘기에 대해 이야기하는 방식에서 드러난다. 비둘기를 왜 쏘고 어떻게 정의하는지 궁금해하는 인류학자에게 그들이 처음 들려준 대답은 비둘기는 ‘날개 달린 쥐’이기 때문에 농작물에 이들이 끼치는 피해를 줄이기 위해 죽일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대답에 만족하지 못한 인류학자가 농업이 차지하는 비율이 극히 미미한 이곳에서 굳이 비둘기를 대량 제거할 필요가 있는지에 대해 재차 묻자, 이제 주민들은 비둘기의 원래 서식지(대도시)에서 이들에게 독극물을 살포하기 때문에 방역을 위해 죽일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물론 이 답변 또한 만족스럽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애초에 ‘노동절 비둘기 쏘기’를 위해 비둘기 수천마리를 외지에서 들여오는 이유를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 큰 모순은 이 전통이 처음 시작되었던 1920년대에는 ‘비둘기는 해충’이라는 의식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한동안 식용으로 먹기도 했다는 사실에 있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비둘기 쏘기에 활발히 참여하면서도 비둘기를 애완동물로 키우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더 깊은 미궁에 빠져드는 것 같았던 인류학자에게 한 가지 확실하게 다가오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마을 사람들과 비둘기에 관해 이야기하면 할수록 이들에게서 과거에 대한 노스탤지어, 상실감, 외부(인) 특히 도시(민)에 대한 적대감이 강렬하게 전해진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비둘기는 자본주의의 급격한 변화 속에서 좋은 시절을 잃어버린 그들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연결해주는 메타포였다. 또한 비둘기는 그들로부터 좋은 시절을 앗아간 외부의 적을 상징했으며, 납에 중독된 비둘기는 외지인의 도덕적·육체적 타락을 상징했다. 따라서 비둘기를 쏘고 죽이는 것은 외부의 오염과 위험으로부터 공동체의 순수성을 지키는 의례와 같은 행위였다. 결국 저자는 시대의 변화 속에서 낙오된 백인 노동계급 거주지에서 끈질기게 이어져 온 ‘노동절 비둘기 쏘기’라는 불가사의한 전통 속에 반유대주의, 음모론, 백인우월주의 등이 복잡하게 꿈틀거리고 있음을 이야기한다.

시대착오적 외관 속에 가려진 현재적 불만

소싸움, 닭싸움, 개싸움, 비둘기 쏘기 등 지금까지 이야기한 사례들은 다양한 지역적·문화적 맥락 속에 존재한다. 하지만 서로 간의 이질성에도 불구하고 어떤 공통점이 발견되는데, 이는 이것들이 20세기 이후의 지배적 시대 정신을 거스른다는 데 있다. 즉 이 시대의 지배적 에토스는 점점 더 신체에 대한 잔인성과 불필요한 고통을 방지하고 금지하는 데 기울어 있으며, 이 맥락에서 위의 행위들은 종종 시대착오적 또는 전근대적 악습들로 그려진다. 예를 들어 기어츠가 묘사한 1950년대 인도네시아에서 닭싸움이 금지되었던 배경에는 이 풍습을 해방된 인도네시아의 근대화에 저해되는 것으로 보는 국가적 시선이 있다. 또한 미국 남부의 투견문화와 탈산업화된 러스트벨트에서 벌어지는 비둘기 쏘기는 ‘못 배우고 뒤떨어진 백인 루저들의 문화’라는 낙인이 강하다.

하지만 그와 같은 시대착오적 외관 뒤에는 현재에 대한 계급적, 인종적 불만과 불안이 스며들어 있다. 이는 특히 위에서 이야기한 미국의 투견문화와 비둘기 쏘기에서 두드러진다. 여기에는 변화에 대한 저항, 상실에 대한 보상심리, 또 외부인에 대한 강한 분노와 혐오가 도사리고 있다. 지난 미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에게 승리를 가져다 준 러스트벨트에 비둘기 쏘기라는 독특한 전통이 살아남은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물론 한국의 소도시들에서 벌어지고 있는 소싸움에 같은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은 억지이고 무리일 것이다. 소싸움은 소외된 계층이 아닌 지자체들이 주도하는 행사이며, 정체성의 정치보다는 전통문화의 자원화라는 맥락에서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전통문화’라는 위치는 소싸움을 동물학대로 재규정하는 지역 주민들에 의해 흔들리고 있으며, 여기에 소싸움을 둘러싼 현재적 불만이 있다. 누군가가 말했듯이 ‘전통’은 내려져오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고, 언제나 굳건한 것이 아니라 언제나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흔들림 속에 소싸움의 현재가 있다.

▶필자 전의령

경향신문

미국 노스캐롤라이나대학교(채플힐) 인류학과에서 한국의 시민사회가 이주와 다문화에 대해 담론화하는 방식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신)자유주의 통치성, 반다문화와 우익 포퓰리즘, 동물과 생정치에 관한 논문들을 써왔으며, 세상의 모든 것은 다 연결되어 있다는 인류학적 믿음 하나로 다양한 연구 주제를 밀어붙이고 있다. 현재 전북대 고고문화인류학과 조교수로 강의와 연구를 병행 중이며, 전주와 파주를 오가며 세 마리의 고양이와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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